개성 없는 순응사회를 풍자하는 양식으로 꼭두각시 인형극은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존 말코비치를 퍼펫처럼 조종하고 <시넥도키 뉴욕>에서 도시를 모형으로 축소한 찰리 카우프먼 작가/감독이라면 더 설명이 필요 없다. 스톱모션애니메이션 <아노말리사>의 인물은 정말 인형이다. 신드롬 애호가인 카우프먼이 선택한 <아노말리사>의 모티브는 프레골리 망상(Fregoli delusion)이다. 자기 외의 모든 타인을 위장한 동일 인물로 인식하는 이 증후군은 주인공 마이클(데이비드 튤리스)이 묵는 극중 호텔의 이름으로 인용됐다. “남들은 다 똑같다”는 마이클의 인지장애는, 사랑에 빠지는 두 주인공을 제외한 남녀노소 전원의 목소리를 한 배우(톰 누난)가 연기함으로써 표현된다. 라디오극 버전의 <아노말리사>가 무척 궁금하다. 얼마나 혼란스럽고 오묘할지.
02/19
지난해 10월 아홉명의 관객과 조를 이루어 영화를 관람하는 부산국제영화제 시네마투게더 프로그램을 통해 <사울의 아들>을 처음 보았다. 영화인 지망생이 포함된 우리 조원들의 첫 반응은, 이 데뷔작의 기술적인 세련도에 대한 당혹이었다. “음… 진짜 너무 잘 만들어서 놀랐어요”라는 표현에 여럿이 끄덕였다. ‘너무’라는 부사가 최근 국립국어원의 결정으로 ‘지나치게’라는 의미의 한정을 벗긴 했지만 그날 밤 동료 관객의 반응에는 확실히 석연치 않은 감정이 포함돼 있었다. 서구 영화역사상 가장 고통스럽고 민감한 주제에 헌정된 영화에서, 매끈한 자기완결적 형식과 마주쳤다는 사실에 우리는 우왕좌왕했던 것 같다.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봉합된 표면과는 다른 종류지만 <사울의 아들>은 형식적으로 주도면밀하다. 영화 내내 카메라가 따라다니는 사울과 프레임 테두리 사이에, 서사 정보를 적당히 배치하는 방식과 그 드러냄의 정도, 비주얼보다 덜 노골적인 음향을 활용하는 복안, 관객으로 하여금 더도 덜도 말고 딱 간신히 ‘지옥’을 견딜 만큼 받쳐주는 스릴러 구조까지 엄격히 계량돼 있다. <사울의 아들>에 대한 일부 서구 평론가의 회의적인 평을 읽어보니 시네마투게더 멤버들의 1차 반응과 맥락이 비슷해 보인다. 우선 ‘아트하우스 스릴러’라는 의미 축소가 보인다. 하지만 이는 하나마나한 수사로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필름 코멘트>의 스테판 그리스만은 한편 ‘잔혹의 전시’(Atrocity Exhibitionism)라는 제목 아래, 이 영화가 주인공 사울에게만 수용소 내에서 이례적인 행동의 자유를 허용함으로써 (작위적인) 서스펜스를 연출했다고 썼다. 내가 본 제일 냉소적인 평은 “홀로코스트 배경의 1인칭 비디오게임”이라는 표현이었다. 이건 좀 못됐다.
말하자면 라슬로 네메시 감독은 재현하기 몹시 까다로운 역사를, 그럼에도 재현하는 대안을 제출했고, 평단은 네메시의 영화적 고안이 적절한가를 놓고 각자 판단하는 중이다. 홀로코스트영화가 유난히 윤리적 심문을 거치는 데에는 당연히 클로드 란즈만의 이정표적 다큐멘터리 <쇼아>가 작용한다. 란즈만은 일체의 기록영상을 배제하고 생존자와 관련자의 증언을 통해 현재 시제로, 20세기 초 가장 선진적이었다는 유럽 문명 복판에서 일어난 참사를 ‘재구성’했다. 그러면서 “홀로코스트는 감히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밝혔고 “내 손에 어느 나치가 가스실을 몰래 촬영한 필름이 들어온다고 해도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채 파기할 것이다. 이유는 설명할 수 없다”고 부언했다. 란즈만의 해결책은 이미지 없는 비전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쪽에서는 “홀로코스트 소설은 둘 중 하나다. 소설이 아니거나 홀로코스트에 관한 것이 아니거나”라는 유대계 작가 엘리 위젤의 말이 란즈만의 입장과 호응을 이루는 것으로 보인다. 매우 숭고하고 최종적인 결론으로 들리는 이 명제들에 대해, <사울의 아들> 이전까지 나는 솔직히 제대로 이견을 고민해본 적이 없었고 일기를 쓰는 이 순간에도 답 없는 질문 한 무더기만 끌어안고 있다. 확실히 <사울의 아들>은 촬영 과정을 상상하기 무척 불편한 영화다. 연출진이 나체로 포로를 연기하는 단역배우들에게 동선을 지시하고, 가스실의 비명을 녹음해 영화에 맞게 음량을 조절하는 광경은 떠올리기 버겁다. 그럼에도 궁극적 질문은 남는다. 홀로코스트는 어떤 경우에도 극영화로 재현할 수 없는 걸까? 그렇다면 왜 홀로코스트만 특별한가? 과거의 여타 대학살과 지금도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는 인류에 대한 인류의 야만은 어떠한가? 오직 홀로코스트만 예술적 터부로 구획 짓는다면, 나치가 드러낸 잔혹성을 인류의 예외적 일탈로 치부하고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지 않을까? 일단 묻기 시작하면 재현과 관련된 각론도 연이어 끌려나온다. 영화로 과거를 재구성함에 있어서 100% 기록, 100% 증언, 100% 재현, 혹은 세 요소의 병용은 형식 자체로 미학적 위계를 가질 수 있을까? 생존자의 증언을 따라 카메라가 폐허가 된 수용소를 훑어가는 숏은 재현인가 비재현인가? 이미지 아닌 사운드를 통한 재현은 어떻게 다른 함의와 효과를 갖는가?
02/21
지금 내게 가능한 일은 라슬로 네메시 감독이 숙고해서 실현한 대안을 정리해두는 정도다. <사울의 아들>에는 두개의 ‘스토리’가 있다. 하나는 아들의 매장 및 포로들의 반란과 관련된 사건의 사슬이고, 나머지 하나는 연출과 촬영 방식이 전하는 무언의 메시지다. 둘은 모두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공장식’ 학살에 노동력을 제공한 존더코만도의 존재에서 비롯된다. 감독은 단순히 홀로코스트를 재현하는 렌즈로서가 아니라 중요한 제재로서 그들의 경험을 상술한다. 영화는 몇몇 팩트를 분명히 전한다. 존더코만도들은 부역자가 아니라 목숨을 볼모로 노동을 강제당했으며 그 노동의 내용이 같은 포로의 죽음이었던, 최악의 상황에 놓인 노예였다. 존더코만도는 실제로 기록과 무력 반란으로 나치에 저항했다. 그러나 동지애로 뭉친 집단은 아니었고 상호 반목도 있었다. 존더코만도의 작업을 통해 유대인 포로들이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였다는 일부 진술이 기만임도 <사울의 아들>은 재확인한다. 그러니 첫인상과 달리 <사울의 아들>은 절대 사건과 정보가 적은 영화가 아니다. 한편 <사울의 아들>의 촬영은 사울이라는 특정 캐릭터의 시점숏이라기보다 존더코만도들의 심리와 위치를 관객에게 유일한 전망의 자리로 지정하는 장치다. 라슬로 네메시 감독은 <사울의 아들>의 영감을 존더코만도들이 어렵게 찍어 반출한 네장의 사진에서 얻었다고 밝혔다. 문제의 사진들은 멀리서 포착한 화장장의 연기와 그 틈으로 어렴풋이 보이는 살아 있거나 이미 시체가 된 벌거벗은 포로들, 그리고 얼떨결에 황급히 셔터를 눌러 찍힌 걸로 짐작되는 무심한 나무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사울의 아들>의 야외 장면은 기본적으로 위 이미지들의 변용이다. 1:1.33의 화면비율도 현실을 무의식적으로 차단한 존더코만도의 심리를 반영한 선택인 동시에 존더코만도들이 몰래 찍어 남긴 사진들의 옹색한 프레임을 의도적으로 이어받은 것처럼 보인다.
사학과 학부생 시절, 과 신문을 위해 서양사에 관한 영화 리스트를 작성하며 목록의 의미를 찾으려고 고민했던 적이 있다. 텍스트로 쓴 역사가 분석과 추상화에 유용하다면 영화가 기술하는 역사는 추체험으로서 독자적 가치가 있다. 매우 평범한 명사지만 이 경우 ‘체험’은 극히 까다롭다. 체험이 체험의 상태를 유지하려면 고통을 미학화하지 않아야 한다. 연출의 차원에서 라슬로 네메시는 이 원칙을 완료시제와 풀숏의 거부를 통해 실천한다. 짐작건대 그가 보기에 총체성의 완성은 영화예술의 일이 아니다. 요컨대 라슬로 네메시는 극영화도 역사 기록의 한 방식으로 성립할 수 있되 텍스트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격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에 동조한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후일담에 따르면 클로드 란즈만 감독은 <사울의 아들>에 찬사를 보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란즈만이 이야기해온 홀로코스트의 재현 불가능성은, 결국 역사를 취급하는 영화예술에서 겸양이 갖는 무한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표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족. 관객으로서 나는 <사울의 아들>을 보는 극장 안에서 아름다움을 느끼진 않았다. 감동이나 희열이 없었다는 말의 비유가 아니라 감각적으로 아름답다고 즉각 반응한 순간이 없었다는 의미다. <쇼아> 그리고 어떤 면에서 알랭 레네의 <밤과 안개>가 내게 허락했던, 영화를 보는 동안 생각하고 심상을 그릴 여유를 <사울의 아들>은 주지 않았다. 왜였을까? <사울의 아들>의 형식은 줄곧 하나의 매니페스토로서 집요하고 완강하게 나와 눈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울의 아들>이 지닌 엄정함과 정교함에서 감각 너머의 아름다움을 찾은 것은 극장을 나서고도 한참 후였다. 처음부터 이 영화는 스크린 앞의 쾌(快)를 배제한 것일까. 아니면 내가 충분히 좋은 관객이 아니었을까.
좋아요
작명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다큐멘터리 <내 이름은 말랄라>가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 방영됐다. 파키스탄의 개혁운동가 지아우딘 유사프사이는 맏딸 말랄라의 이름을 아프가니스탄의 잔다르크에 해당되는 여성 영웅 말랄라이에게서 따왔다. 말랄라는 탈레반의 만행으로 고통받는 마을의 실상을 세상에 알리고 여성의 교육받을 권리를 주장하다가 15살에 총격 테러를 당했다. 구사일생한 소녀의 행보는 꺾이지 않았고 노벨평화상은 그녀를 스타로 만들었다. 하지만 말랄라는 괜찮은 걸까? 이 10대 소녀는 왜 본인의 어려움은 토로하지 않을까? 데이비드 구겐하임 감독은, “여자아이가 뭘 알겠나. 다 활동가 아비의 사주다”라는 세간의 비방과 우려를 보아넘기지 않고 직접 묻기를 택했다. 장차 많은 변화의 여지가 있지만 현재의 말랄라는 단호하다. “아버지는 내게 이름을 지어줬을 뿐 나를 말랄라로 만든 건 내 선택이에요.” ‘He Named Me Malala’라는 이 영화의 원제에는 ‘다만’이 생략돼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