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대로였다. 싱어송라이터 이아립은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읊조리듯 대화를 이어나갔다. 말 사이사이에는 들숨이 잦았고 곳곳에는 유머가 있었다. 그간 이아립의 음악들은 이 모든 특징들을 모아둔 것의 총체였다. 하지만 5집 《망명》은 어딘가 다른 분위기다. 곡조는 숨길 수 없이 어둑해졌고 가사는 보다 직설적이다. 1999년에 데뷔한 이후 처음으로 소속사에 들어가 앨범을 만든 것이 부른 변화 같았다. 이아립은 스웨터, 하와이 등의 팀으로 앨범을 내기도 했고 그보다 더 오랜 시간 혼자 묵묵히 음악 작업을 해왔다. 그렇기에 새로운 둥지를 만나 만든 《망명》은 이아립에게 변곡점일 것이다. 이아립만의 색을 지키면서 동시에 이아립에게 낯설었던 것들을 취해본 결과물로서 말이다.
-지난 2월3일 3년 만에 《망명》을 발표했다. 이후 콘서트 등으로 팬들과 만나고 있는데 앨범에 대한 반응은 어떤 것 같나.
=아마도 이전의 팬들은 무겁지 않고 담백한 멜로디에 직설적이지 않은 가사, 이른바 이아립의 시그니처라고 할 만한 특색들을 좋아해주셨던 것 같다.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번 앨범은 이아립이 음악적으로 뭘 해보려고 했는가에 좀더 귀를 기울여주시는 듯하다. 그 어떤 앨범보다도 색깔이 선명한 곡들이다.
-앨범이 전반적으로 전 앨범인 《이 밤, 우리들의 긴 여행이 시작되었네》보다 어두워졌다는 인상을 가장 먼저 받았다.
=그간의 앨범은 빛의 세계에서 만들었다. 인공적이지 않은, 태양빛 아래서. 그 안에도 스펙트럼이 있다. 그중 내가 좀 더 좋아하는 빛깔을 찾아갔다. 이번에는 빛이 모두 꺼진 세계,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것들을 찾아봤다. 깜깜하지만 그 속에서도 대상의 흔적들은 드러나는 법이다. 빛이 비추는 곳은 밝게 보이나 주변은 잘 안 보인다. 오히려 빛이 사라지고 나서야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을 생각하며 곡을 써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소리를 꽤 들었겠다.
=지인들이 묻더라. “무슨 일 있었니? 많이 힘들었니?” <그 사람>이라는 곡에서는 대놓고 ‘그 사람 미워요’라고 말해버리니까. (웃음) 이별의 아픔? 이별 안 한 지가 너무 오래다. 이별할 사람이 없어서 이별을 안 했겠지만. 앨범은 이제 막 나왔지만 곡은 2013년 이후부터 계속 써왔으니 사실상 지금은 다 털어냈다. 상실, 이별,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애틋한 것들에 대해 썼다. 그래서 쓸쓸함이 묻어나나 보다. 이런 감정의 단초가 돼준 곡이 두 번째 트랙이자 타이틀인 <계절이 두 번>이다. 일렉트릭 뮤즈의 김민규 대표가 이 곡을 듣더니 ‘이번 앨범은 이 곡을 시초 삼아 가봅시다’ 하시더라.
-직접 ‘열두폭 병풍’이라는 레이블을 만들기도 했지만 소속사에 들어간 건 이번이 처음이다.
=김목인, 강아솔 등 좋아하는 뮤지션들이 공교롭게도 일렉트릭 뮤즈 소속이었다. 특히 취향이 맞아 수다 시너지가 어마어마하게 일어나는 강아솔을 보면서 느꼈다. 소속사에서 함께 작업하면서 아티스트로서 성장해가는 게 확실히 보이더라. 뮤지션이 오직 음악 하나에만 집중할 수 있게 지원해주는 레이블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플라스틱 피플로 활동한 김민규 대표의 음악도 좋아했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니 대표님은 뮤지션이 뭘 하고 노는지, 사생활이 어떤지에는 관심이 1도 없다. 오직 음악, 앨범 만들기 그 생각뿐이다. 좋은 음악을 하고 싶은 내 목표와 딱 맞아떨어졌다.
-혼자서 하는 작업에 회의라도 든 건가.
=혼자서 하는 건 할 만큼 했다. 어느 순간 매일 일기 쓰듯 곡 쓰고 컨셉을 잡아서 앨범 내는 게 헛헛했다. 물론 이렇게 계속 앨범을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진짜 내가 원하는 게 뭘까.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면서 ‘정말 누군가와 함께해야 하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속사에서 작업하고 성장하는 뮤지션들을 보면서 약간의 샘도 났고.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그간 혼자 작업하면서 무리했던 게 음반에 고스란히 드러났으니까. 음반을 내고 이걸 어떻게 디자인해 홍보하고 팔아야 하나, 다음 공연을 또 어떤 기획으로 누구와 연락해서 만들어야 하나 등. 음악에만 집중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오롯이 음악에만 신경을 썼다. 작업이 끝나자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안 나더라. ‘됐다!’ 그 생각뿐이었다.
-깊은 동굴에서 퍼지는 듯한 낮은 울림을 가진 당신의 목소리는 변함없이 훌륭한 악기가 돼줬다.
=어릴 땐 목소리가 굉장히 컸다. 체육대회 때 앞에 나가서 선창하는 그런 아이였다.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부르게 되면서 점점 목소리가 작아진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카페의 음악 소리가 크면 사람들도 더 크게 말한다. 완벽하게 귀를 기울이게 되는 소리는 큰 소리가 아니다. 오히려 작고 소곤대는 소리에 집중하게 되지 않나.
-앨범 타이틀이 ‘망명’이다. 한자를 찾아보니 ‘亡命’이 아닌 ‘亡明’이더라.
=조어다. 어느 책에서 ‘망명(亡明)한 시대’라는 글귀를 봤다. ‘빛이 사라진 시대’라니. 이번 앨범을 만들며 대표님과 ‘다크 사이드 오브 이아립을 보여주자’고 얘기했다. 그렇다면 이만한 제목이 없겠더라. 물론 망명(亡命)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내가 나름 일렉트릭 뮤즈로 망명을 한 셈이니까.
-지난 3년간 많은 곡을 썼을 텐데 6곡의 수록곡을 추리는 과정이 쉽지 않았겠다. 이중에서도 특히 애착이 가는 곡이 있을 것도 같고.
=곡의 선택은 이런 식이었다. 대표님이 ‘곡을 보내주세요’라고 하면 작업한 여러 곡을 보낸다, 미팅을 한다, 대표님이 한곡씩 코멘트를 해주며 선택되거나 까인다. 애착이 간다면 첫 번째 곡 <1984>? 제일 열심히 썼나? (웃음) 조지 오웰의 동명 소설에서 영감을 받았다. 지금 시대가 빅브러더의 세계 같다. 빅데이터와 SNS의 수많은 말들로 가득 채워진 세상. 스스로가 자신의 집을 유리로 만들어버리고 계속해서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사회 같다.
-그럼 SNS는 안 하는 건가.
=카카오톡도 안 쓴다. SNS도 안 했는데, 최근 사진 위주인 인스타그램을 시작했다. 개인 홈페이지를 운영해왔는데 그것도 뜸해져서 공연 소식이라도 알려야겠기에.
-이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다. 이아립표 밝은 리듬의 곡에는 ‘뽕기’가 있달까. (웃음)
=정확히 뽕기 맞다. <사랑의 내비게이션>도 그랬고. 사람을 움직이는 건 흥과 한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게 뽕기로 나오나보다. 왈츠풍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다고? 그렇다면 트로트 왈츠라는 걸 한번 개척해봐야 하나. 하하.
-영화와도 인연이 깊다. <버스, 정류장>(2001) O.S.T에 참여했고 태준식 감독의 <어머니>(2011)의 음악을 맡기도 했다.
=<허공에의 질주>(1988)를 보고 음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특히 피아노를 정말 좋아했던 천재로 나온 리버 피닉스를 보고 정말 놀랐다. 그는 연기를 하는 게 아니었다. 그 자체로 영화였다. 영화가 끝난 후, ‘그렇다면 나는 뭘 해야 하나?’라는 생각에 휩싸여 발을 동동 굴렀다. 그때 ‘음악을 하자! 음악을 해서 리버 피닉스를 만나자!’라고 결심했다.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에 영화쪽과 인연이 계속되고 있는 게 아닐까, 라고 추측해본다.
-<씨네21>에 기고를 하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캐롤>(2015)에 수록된 음악들에 관한 글을 보내줬다(1041호 기획 <캐롤> 참조).
=대사를 다 외울 정도로 <캐롤>을 많이 봤다. 누구를 보고 반하기까지의 시간이 이렇게도 짧구나. 나도 앞으로 살면서 누군가와 또 스쳐지나갈 텐데 내게도 그런 빛나는 1분, 1초가 있지 않을까 싶어 설렌다. 특히 캐롤(케이트 블란쳇)과 테레즈(루니 마라)가 터널을 지날 때 캐롤의 테마와 함께 <You Belong to Me>가 흐른다. 각각의 소리가 다 살아 있는데 사실 되게 불협이다. ‘사랑이라는 게 불협인가? 그래, 완벽한 하모니는 아닐 거야’라는 생각이 든다. 테레즈와 여행을 떠나기 전, 친구 애비(사라 폴슨)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줄 아느냐?”라고 하자 캐롤이 “언제는 알고 했나?”고 말하는 장면도 생각난다. ‘아, 나이가 들어도 저래야지. 뭘 안다고 생각하는 그런 어른이 아니라. 모르겠어가 맞는 거지’ 싶더라.
-꾸준히 활동하는 40대 여성 싱어송라이터가 많지 않다. 흔들림 없이 계속 음악을 하는 당신의 꾸준함의 미덕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인디계의 암모나이트, 화석과 같은 존재가 됐다. (웃음) 나에게 어제는 없다. 아카이브가 없는 여자랄까. 오늘 공연하면 오늘부터가 시작이다. ‘예전에는 이랬지’가 없다. 그래서 노하우가 없고 기복이 심한 걸 수도 있다. 누구에게도, 어디에도 익숙해지지가 않더라.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래서 현재진행형으로 계속 음악을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청탁도 없이, 그저 듣지요
미지에 있는 《망명》의 청자들에게 전할 한마디를 부탁했다. 이아립의 대답은 이러했다. “어떤 부탁도 어떤 청탁도 드리고 싶지 않다. 앨범을 들은 누군가의 마음이 움직인다면 그걸로 충분히 좋을 것 같다. 일상에서, 일에서, 어떤 관계에서 떠나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분들에게 《망명》이 또 다른 망명의 시간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