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연기의 귀재. 스크린과 브라운관에서 배우 조정석을 마주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말이다. 능청맞은 말투로 관객의 혼을 쏙 빼놓은 <건축학개론>(2012)의 감초 납뜩이, 냉철하고 절도 있는 드라마 <더킹 투하츠>(2012)의 은시경 중대장, <관상>(2013)의 순수하고 익살스러운 팽헌, 높은 프라이드와 ‘철벽’ 허세로 무장한 드라마 <오 나의 귀신님>(2015)의 강선우 셰프, <특종: 량첸살인기>(2015)의 인간미 넘치는 ‘허당’ 허무혁 기자까지. 다양한 인물들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캐릭터의 자장을 넓혀온 그가 새롭게 보여줄 캐릭터는 어떤 것일까 하는 기대감을 안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이번 작품은 캐릭터적으로 접근해 뭔가를 만들어내려고 하지 않았다. <시간이탈자>는 캐릭터보다 스토리텔링이 우선인 영화다. 중요한 건, ‘내가 이야기에 어떻게 묻어나느냐’였다.” 그는 타임슬립 소재의 장르물 <시간이탈자>의 이야기에 단단히 매료된 모양이었다. “다음 장 다음 장이 궁금해지는 시나리오였다. 복잡다단하면서 흥미롭더라. 단순한 타임슬립물이었으면 신선하진 않았을 텐데, 1983년의 남자와 2015년의 남자가 꿈을 통해 교감하며 한 여자의 죽음을 막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는 발상이 신선하지 않나. 그 이야기를 최대한 잘 전달하는 것이 목표였다.”
<시간이탈자>에서 조정석이 맡은 역할은 1983년대를 사는 음악교사 지환이다. 그는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 미래에 일어날 비극을 막기 위해 몸을 던진다. 부러 “캐릭터를 만들지 않은” 조정석은 지환의 얼굴에 가장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을 담아냈다. “지환은 지극히 평범한 일반인이다. 유쾌하다거나 열정적이라거나 재미있다거나 하는 수식어들이 붙지 않는 그저 평범한 남자.” 그런데 이 남자가,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는 누구보다 용감해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심정엔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릴 때 엄마가 죽는 꿈을 꾸고는, 엄마를 부둥켜안고 펑펑 운 적이 있다. 꿈만 꿔도 그렇게 슬프잖나. (웃음)” 조정석이 지환을 연기하며 캐릭터의 개성을 누르고 수사들을 절제한 데에는 “가장 평범한 사람의 용기”를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멋진 남자주인공’이 아닌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모습으로 다가서고 싶었다. 히어로물처럼 영웅적인 인물을 부각시키는 게 아니라 이야기 자체에 몰입할 수 있어야 하니까.” ‘가장 보통의 영웅’을 보여주기 위해 그는 어려운 촬영 과정을 거쳤다. “일반인이 마구잡이로 싸우는 액션이 오히려 더 힘들더라. 비 때문에 옷이 달라붙어 보호 장비도 없이 맨몸으로 막 부딪혔다. (웃음)” 여기에 그가 살짝 첨가한 양념이 있다면 “1980년대의 시대성”이다. “그 시절 사람 특유의 감성을 담아내려 했다. 요즘보다는 보수적이고 고리타분한 면도 있다. 1980년대를 살아왔기 때문에 시대의 분위기를 잘 알고 있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웃음)”
신스틸러 ‘납뜩이’로 스크린 데뷔 후 다양한 캐릭터를 두루 거쳐 한 시절의 가장 평범한 얼굴을 연기하기까지, 조정석은 한번도 쉰 적이 없다. <시간이탈자> 촬영 후에 찍었던 원톱 주연 <특종: 량첸살인기>는 이미 개봉했고, 도경수와 형제로 호흡을 맞춘 휴먼 드라마 <형>도 지난해 촬영을 마쳤다. “<형>에선 “동생을 등쳐 먹는 양아치다. 그렇게 막 나가는 캐릭터는 처음이었는데, 정말 재미있더라. (웃음)” 그는 다작의 원동력이 “연기의 재미” 그 자체라고 말한다.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연기가 좋으니까. 신인배우들이 많이들 ‘다양한 캐릭터로 많은 삶을 살아보고 싶다’고 하지 않나. 식상해 보이지만 사실 그게 정답이다. 그 마음을 계속 간직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여러 역할을 소화하며 언제나 “그때그때 당기는 걸 했다”는 조정석은 다음번엔 아직 “뭐가 당길진 모르겠다”고 말한다. “난 취향이 없다. 취향은 한정을 지어버리지 않나. 특정 장르를 선호하지도 않는다. ‘병맛’나는 삼류 코미디가 재미있을 수 있고, 남들이 보기엔 정적이어도 나한텐 신이 날 수도 있다. 난 모든 것에 열려 있다. (웃음)” 그의 “열려 있는 마음”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공연 11년차인데, 어떤 공연은 쫄딱 망하고 어떤 공연은 대흥행했다. 실패는 이미 많이 맛봤다. (웃음) 성패에 상관없이 언제나 도전하는 자세로 임해야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지 않겠나.”
현재 그는 친정이나 다름없는 뮤지컬로 돌아와 <헤드윅>을 공연 중이다. 2006년에 첫 <헤드윅>을 선보이고 딱 10년 만이다. “돌아온 ‘뽀드윅’ (피부가 뽀얀 헤드윅이라는 뜻으로, 조정석이 연기하는 헤드윅을 뜻하는 애칭.-편집자)이라고들 하시지만, 내 마음속에서 돌아왔다거나 다시 시작했다거나 하는 건 없다. 공연은 워낙 좋아해서 늘 하고 싶고, 드라마와 영화도 마찬가지다.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어떤 장르에서도 활용될 수 있는 배우 조정석이 되고 싶다. (웃음)” 그가 생각하는 배우란 “이야기의 메신저”다. “기본적으로 연기를 할 때, ‘자 봐, 내가 들은 얘긴데, 굉장히 재밌어. 지금부터 들려줄 테니 들어봐’ 하는 마음으로 한다.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관객도 공감하며 즐기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이야기를 이해하고 전달하는 즐거움을 아는 배우 조정석이 들려줄 이야기는 아직 무궁무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