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촬영을 위해 스튜디오에 들어선 임수정이 메고 온 하얀 가방에 빨간 글씨로 “얼굴이 빨개지는”이란 글귀가 적혀 있었다. 부끄러움을 담는 가방이란 뜻일까. 물론 아무 뜻이 없을지도 모르겠으나 배우 임수정과 연관지어 생각해보면, 그녀를 영화에서나 혹은 실제로 만났을 때 느껴지는 기운은 부끄러움과는 거리가 멀다. 그녀는 영화 안에서 때때로 아파하거나 슬퍼 보일 때조차 늘 당당함을 잃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그녀에게서는 쓸쓸하면서도 씩씩한 기운이 느껴진다. “나 역시 이중적인 면이 있다. (웃음) 혹은 외모에서 드러나는 이미지도 있을 거다.” 다중적인 면을 드러내는 <장화, 홍련>(2003)의 수미를 비롯해서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의 싸이보그 영군, 아프지만 결코 아프다는 걸 내색하지 않는 <행복>(2007)의 은희, 그리고 <내 아내의 모든 것>(2012)의 연정인, 최근 <은밀한 유혹>(2014)에서 벼랑 끝에 내몰린 뒤 반전을 꾀하는 지연까지, 그녀가 연기하는 인물들은 매 순간 언제나 자신의 처지를 드러내고 돌파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곽재용 감독의 신작 <시간이탈자>에서 맡은 역할 역시 호락호락한 선택은 아니다. 그녀는 이번 영화에서 독특하게도 1인2역 연기를 선보인다. 1983년과 2015년, 두 시대를 오가며 진행되는 <시간이탈자>는 30년이라는 시간을 사이에 두고 두 남자에게 동시에 어떤 사건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그들이 사랑하는 여인이 위기에 처하게 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2015년의 형사 건우(이진욱)가 과거 사건기록을 통해 알게 된 윤정이란 인물은 30년 전 고등학교 교사 지환(조정석)의 연인이었지만 누군가에게 살해당해 아직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채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 인물이다. 그리고 건우는 현실에서 우연히 윤정과 닮은, 그러니까 사실 똑같이 생긴 소은이란 여인을 알게 되고 무엇에 홀린 듯 그녀의 뒤를 쫓기 시작한다. “1인2역을 연기하는 데 특별한 어려움은 없었다. 상대배우들이 워낙 같은 듯 다르게 현장에서 좋은 호흡을 보여줬고, 무엇보다 우리 모두 80년대를 거쳐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20대보다는 아무래도 여유롭게 몰입했던 것 같다. (웃음)” 물론 그녀는 스릴러와 판타지,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며 미제 살인사건을 다루는 복합적인 장르영화에 대한 출연에도 전혀 부담감이 없었다. “우리끼리는 ‘감성추적스릴러’라고 이야기하는데 스릴러를 평소에도 즐겨보는 데다 워낙 시나리오의 흡인력이 좋았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선택했고 즐겁게 촬영했다.”
그녀가 연기하는 윤정과 소은은 각기 다른 시대를 살아가면서 각각 두 남자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다. “과거와 현재의 두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의 죽음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데, 그 중심에 있는 내가 그들에게 동기부여를 해줘야 하는 역할이다.” 곽재용 감독은 앞서 이야기했던 배우 임수정의 매력이 윤정과 소은 캐릭터에 그대로 스며들길 바랐다. “윤정은 1980년대를 살아가는 여성이지만 요즘 사람들처럼 자기주장이 강하다. 그건 소은도 마찬가지다. 사건의 중심에 자신이 서 있다는 걸 인지하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면도 있고. 어쩌면 대중이 배우 임수정에게서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일 수도 있다.” 언제나 보여지는 이미지가 중요한 배우로서 피로감을 느낄 법도 하지만 “(특정 연기에) 질린 적도 없고 앞으로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결국 배우는 연기로서 대중의 공감을 이끌어내야 하는 숙명을 지녔으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삶을 받아들이게 된다. (웃음)”
그래도 가끔은 대중의 공감과는 거리가 멀지라도 배우로서 도전하고 싶은 영역도 있지 않을까. “아직 배우 임수정의 매력을 많이 보여주지 못했다. 악역 연기! 내 안의 어두운 악마의 기운을 마구마구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를 맡게 되면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반은 농담이지만 아마 사기꾼 캐릭터가 나한테 잘 어울리지 않을까. (웃음) 그리고 물론 30대 후반의 여배우로서 조금은 더 성숙한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영화에도 출연하고 싶다. 앞으로 내가 풀어나가야 할 숙제다.”
점점 한국 영화시장에서 여배우가 연기할 수 있는 캐릭터가 한정적이 되어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낙담하지는 않는다” . 영화 외에도 배우가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면 언제, 어떤 자리든 찾아가겠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올해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 참여해 <허공에의 질주>를 추천하며 관객과 같이 본 이유도 그래서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들이 남긴 작품을 보고 있으니 ‘배우는 영원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더라. 정말 배우는 축복받은 직업이다.” 이런 그녀가 최근 푹 빠져 있는 것이 배우들이 직접 강단에 올라 청중 앞에서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레터스 라이브 행사’다. “베네딕트 컴버배치, 이안 매켈런, 톰 히들스턴 등의 배우가 직접 편지를 연기와 실제 모습을 넘나들며 낭독하는 모습에서 충격 아닌 충격을 받았다. 대중과 만나는 장소, 내가 지닌 목소리에 대한 활용 등을 생각해보면 이런 행사에 직접 참여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여배우라는 현재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곳을 향해 시선을 던지는 그녀가 진짜 ‘시간이탈자’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