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커버스타] 숙희, 언제나 강한 아이 - <아가씨> 김태리
2016-05-24
글 : 이예지
사진 : 백종헌

이처럼 강렬한 데뷔가 있을까. 1500 대 1의 오디션을 뚫은 박찬욱 감독의 새로운 뮤즈이자 스크린의 뉴 페이스 김태리. 박찬욱 감독은 그녀를 두고 “위엄이 있고, 주눅 들지 않는 자신감이 있었다”고 말했고, 상대배우 김민희는 “신인배우와 연기한다는 느낌이 전혀 없이, 자기 몫을 하는 배우였다. 용감하고 담대하며 깡이 있는 친구”라고 평한다. 실제로 마주한 그녀는 아이같이 천진한 눈과 짙은 눈썹, 완고해 보이는 입매를 지녀, 소녀의 순수함과 여인의 강인함이 어우러진 미인이었다. 그런데 입을 열자, 또래의 언어와 꾸미지 않은 웃음들이 경쾌하게 쏟아져 나온다. 칸 입성에 대한 소감도 즐거이 밝혔다. “유럽엔 처음 가보는 건데, 첫 입성을 이렇게 칸으로 하다니. 러키걸이다. (웃음)” 그녀는 자신에게 향한 기대감에 짓눌리지 않고, “신인배우의 특권”을 잘 누렸다. “모르는 게 있거나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있으면 감독님께 꼭 이유를 묻곤 했다. 감독님의 의도를 확실히 이해해야 작은 뉘앙스도 살릴 수 있지 않나.”

박찬욱 감독과의 긴밀한 소통을 통해 김태리가 다가선 숙희의 모습은 어땠을까. 그녀는, 저잣거리의 숙련된 도둑이자 아가씨를 속이기 위해 하녀로 들어가게 되는 숙희를 “다정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숙희는 아기를 어르고 달래는 데 익숙하고, 모성애를 지닌 인물이다. 자신이 속여야 하는 대상인 아가씨에게도 그런 마음이 발동된다. 커다란 새장 속에 갇혀 재미없는 책들만 읽고 있는 아가씨를 보살펴주고 싶어지는 거다.” 그녀는 숙희가 되기 위해 여러 과정을 거쳤다. 야무지고 단단한 몸을 만들기 위해 6개월 정도 헬스를 했고, 태닝을 하고 주근깨를 그려 넣었다. 숙희에겐 김태리 본연의 모습도 반영됐다. “민희 언니의 동작은 우아하고, 자세는 바르고 제한되어 있다. 반대로 나는 동선이 많고 역동적이다.” 숙희를 만들어내면서 고민의 과정도 있었다. “나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시나리오의 전체를 알고 있으니, 처음엔 숙희가 그렇게 강하지만은 않은 애구나 하는 생각에 갇혀 있던 것 같다. 하지만 막상 연기를 해보니 극중 정황이 그렇게 보일 뿐, 숙희는 언제나 강한 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야기의 바깥이 아니라 숙희의 안에서 그녀를 이해하며 캐릭터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다.”

김민희와의 연기도 김태리에겐 행복한 일이었다. “<아가씨>에서 상대 배역이 민희 언니인 줄도 모르고 있었던 때, 가장 좋아하는 배우로 김민희를 꼽자 감독님이 ‘그래애?’ 하면서 좋아하시더라. (웃음)” 그녀는 김민희가 ‘태리, 그거 뭐야?’라고 말을 붙이면 본인이 먹던 음료의 빨대를 스스럼없이 김민희의 입에 물려주며, 속으로 ‘언니가 먼저 물어봐주다니 너무 좋다’고 생각하곤 했다. 하녀로서 아가씨를 목욕시키는 신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긴장감에 휩싸였다. 김민희는 이렇게 말한다. “태리가 ‘언니, 너무 떨려요. 어떻게 하죠?’ 하더라. 심호흡을 천천히 해보라고 했다. 자기가 자기를 다스리는 일이 제일 힘든 건데, 스스로 극복하고 이겨내더라.” 김태리는 “언니에게 의지하며 평정심을 찾았다”고 밝히며, 더운 수증기와 진한 향료의 향기 속에서, 은골무를 끼고 아가씨의 뾰족한 이를 갈아주는 에로틱한 순간을 완성해냈다. 이후론 발 마시지도, 옷을 입히고 벗겨주는 일도 스스럼없이 했다는 그녀다. “가장 감정적인 순간을 연기할 때 가까이서 언니가 우는 얼굴을 봤는데, 너무 슬프고 아름답더라. 무릎 꿇었다. (웃음)”

첫 장편영화 데뷔에 감독과도, 한참 선배인 배우들과도 무리 없이 호흡한 담대한 성정 이면엔, 3년 동안의 극단 생활로 다져진 내공이 있었다. 경희대 신문방송학과에 재학하며 연극 동아리에서 활동한 그녀는 “연기는 평생 해도 행복할 직업이겠다”는 걸 깨닫고, 졸업 후 극단 이루에 들어가 막내 단원으로서 연극 <넙죽이>의 언더 배역 등을 하며 기본기를 다졌다. 갑자기 나타난 혜성처럼 보이지만, 그녀가 쌓아온 삶의 궤적은 지금의 김태리를 만들 수 있는 발판이었다. 그녀는 앞으로 일상적인 이야기 속의 보편적인 인물을 연기해보고 싶단다. “고흥으로 지방 촬영을 갔는데, 중요한 장면을 앞두고 심정이 복잡해져 실마리라도 찾으려고 도서관을 찾아간 적이 있다. 그런데 어떤 순경 아저씨가 책을 빌리러 와선 어수룩한 말투로 ‘이거 책 빌려도 되는 거예요?’ 하고 묻더라. 그 순간의 정황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그렇게 일상을 사는 사람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연기해보고 싶더라.” <아가씨>라는 시작의 무게에 눌리지 않고 가장 일상적인 것부터 가벼운 걸음을 내딛고 싶다는 김태리. 김민희가 다양한 색채로 겹겹이 칠해낸 유화 같다면, 김태리는 단 한번의 붓질로 맑은 농담을 선연히 드러낸 수채화 같달까. 이제부터 그녀가 그려낼 붓자국을 오래 응시하고 싶어진다.

스타일리스트 고민정 실장·헤어 제니하우스 올리브점 성은 실장·메이크업 제니하우스 올리브점 오윤희 원장·의상협찬 DVF, 퍼블리카 아뜰리에, 브라이드앤유, 미르부티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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