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김소희의 영화비평] <아가씨> 이야기의 구조적 쾌락을 위해 소비되는 사랑
2016-06-29
글 : 김소희 (영화평론가)
<아가씨>

<아가씨>를 논할 때 자주 언급되는 단어는 퀴어, 여성, 연대 같은 것들이다. 나는 <아가씨>가 이 단어들과 관계가 옅을 뿐만 아니라 거의 무관하다고 말하고 싶다. 이런 단어가 드러내는 가치는, 마치 영화가 가장하는 외피에 감싸인 진실인 양 추앙된다. 그러나 <아가씨>는 외피가 싸고 있는 내용이 아니라 외피가 전부인 영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구조라고 바꿔 말해도 좋을 외피가 내용을 이해하는 방식을 교묘히 조종해, 결국 그 내용까지 바꿔놓기 때문이다.

박찬욱 감독은 관객에게 인물과 사건의 단면을 미리 던져주고는 종국에는 이에 대한 이해에 가닿는 것으로 극을 종결시키는 방식을 즐겨 사용해왔다. <공동경비구역 JSA>(2000)에서 남한 병장 이수혁이 방문객을 막아서다 찍힌 사진이 사건 전후로 제시되는데, 사건 이후의 사진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망 속에 놓인다. <스토커>(2013)의 오프닝 시퀀스에 등장한 미스터리한 소녀와 추상적인 이미지는 클로징 시퀀스에 이르러서야 생략된 장면들이 함께 제시되며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아가씨>가 제시하는 최초의 이미지는 동무들과 가족들을 떼어놓는 일제강점기의 엄혹한 작별 이미지다. 그러나 이 이미지가 극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앞서 예로 든 이미지가 영화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비해 옅다. 이미지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해 거의 모든 러닝타임을 사용하는 다른 작품과 달리 <아가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미지의 실체(막대한 재산을 노리고 하녀로 둔갑한 도둑)를 누설한다. 비밀을 재빨리 폭로하는 대신 영화는 이미지의 실체를 몇겹에 걸쳐 감싼 뒤 진실이 반전의 형식으로 꼬리를 물면서 드러내는 방식을 채택한다. 달리 말해 이 영화에서는 이미지보다 이야기의 이야기의 구조가 더 중요해진다.

3부 중 1부와 2부는 서로 다르게 흐르던 시간이 만나는 것으로 구조화되며, 겹치는 시간대의 정보가 적절히 나누어 배치되어 있다. 최초의 이야기 창안자인 백작을 중심에 두고 보면 1, 2부의 구분점은 명확하다. 1부에서 부유한 일본인 아가씨(김민희)와 그녀의 이모부 코우즈키(조진웅)를 등칠 계획을 소상히 늘어놓던 백작(하정우)은 2부에 이르러 히데코와 손잡고 숙희(김태리)와 코우즈키를 등치려 한다. 그러나 숙희 혹은 히데코를 중심에 두고 이야기의 구분점을 생각할 때 이상한 지점이 생긴다. 2부에서 숙희의 태도에 실망한 히데코가 자살을 시도하고, 숙희가 이를 막아서며 서로 마음을 터놓는 시퀀스는 두 주인공이 화해하는 장면이자, 관객만 알고 있던 비밀을 비로소 두 주인공과 터놓게 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러나 두 여인이 화합에 이른 바로 그 순간, 1부를 이끌어 온 숙희의 목소리가 위태로워진다. 1부의 마지막에 히데코 대신 정신병원에 가게 되어 당황한 숙희의 모습 뒤로 ‘히데코는 그냥 나쁜 년이다’라는 숙희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이때의 시점은 숙희가 히데코와 모의한 이후이므로 자신이 배신당하지 않았으며, 히데코가 나쁜 년이 아님을 당연히 알고 있을 때다. 내레이션의 시간은 이야기의 시간과 동시적이거나 그 이후일 테니 시간상의 알리바이도 설정할 수 없다. 영화 속 숙희의 행동은 백작을 속이기 위한 연기였다고 이해하더라도, 내레이션 속 숙희가 한 말이 거짓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숙희의 속마음을 엿들은 것이 아니라 내밀한 속마음처럼 들리는 어떤 것을 숙희가 취사선택해 들려준 것이 된다. 그 순간 관객은 숙희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는 가까운 친구의 위치에서 박탈된다. 이제 숙희는 어쩌면 연출자의 입장에서 이야기의 전개를 꿰뚫고 있는 내레이터-숙희와 극중 숙희로 분리되며, 분리된 숙희는 우리가 보고 느껴왔던 극중 숙희의 존재를 위태롭게 한다.

동행자에서 관찰자의 자리로 내몰린 관객

이런 맥락 속에서 3부로 나뉜 이야기를 관통하는 섹스 신, 그중에서도 숙희와 히데코의 사랑의 징표처럼 드러난 2부의 섹스 신은 의심스럽다. 1부의 섹스 신은 백작과의 섹스를 염두에 둔 예행연습으로 시작됐고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2부에서는 1부에서 생략된 장면을 덧붙여 이들의 관계가 단지 예행연습이 아니었음을 항변한다. 이들의 관계의 깊이를 보여주기 위해 추가됐을 장면들은 그러나, 두 사람의 감정을 드러낸다고 보기 힘들다. 이들의 섹스 신에서 엿보이는 것은 오직 이들이 느끼는 쾌락이며, 이는 관객을 위한 서비스처럼 제시된 유머, 이를테면 숙희의 “처음이시라면서, 타고나셨나 봐요” 등의 대사와 적절히 버무려진다. 이 대사는 마치 히데코가 그리 순진한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관객을 위해 하는 말처럼 들린다. 원작자로부터 ‘이성애자의 레즈비언 판타지’라는 비판을 받았던 <가장 따뜻한 색, 블루>(2013)조차 설사 섹스 신에서 카메라의 시선이 문제적이었다 해도 적어도 그것이 두 인물의 감정을 이해하는 데 위배된 것은 아니었다. 이와 달리 <아가씨>의 섹스 신은 여러 자세를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주며 동성간의 섹스가 이성과의 섹스와 별다르지 않음을 전시하는 데 그친다.

섹스 장면을 포함해 2부에서 추가된 장면들은 숙희가 어떤 아이인지 미리 알고 있던 히데코의 시점에서 동일한 사건의 이면을 보여주는 모양새를 취한다. 그러나 독서 시간의 실체라든지 그녀가 학대받은 과거 등 숙희가 볼 수 없었던 장면이 추가되는데, 이것이 히데코와 숙희의 관계를 이해하는 척도로 쓰였다기보다는 관객의 시선을 끌기 위해 추가됐다는 혐의가 짙다. 숙희는 히데코가 해주는 이야기만으로 그녀를 가여워하며 쉽게 공감한다. 히데코의 과거를 보지 못했고, 그녀의 낭독 장면을 목격하지 못한 숙희가 도서관에 꽂힌 책의 음란한 그림만으로 분노에 휩싸일 수 있다면 관객 역시 그래야 한다. 그러나 히데코의 과거와 현재를 엿본 관객은 그럴 기회를 박탈당한다. 관객인 나는 그 순간 숙희와 히데코의 감정을 이해한다고 믿었지만, 이 장면에 동조한 진짜 이유는 영화에서 히데코가 학대당한 역사가 상세히 그려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관객이 이해한 것은 히데코와 숙희의 감정이 아니라 그저 학대받은 여성과 다른 여성의 연대에 대한 상상적 이해였을 뿐이다. 이와 더불어 숙희와 히데코의 목소리로 표현된 내레이션은 영화가 몇 가지 정보를 숨기는 방식으로 관객을 은밀히 속이면서도, 관객이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착각하도록 쓰인 장치에 머문다.

3부에서 박찬욱은 실제 관객이 점한 위치가 어디였는가를 드러낸다. 숙희와 히데코의 선실에서의 섹스 신이 불편한 진짜 이유는 관객의 쾌락을 위해 여성의 몸을 전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관객이 이들의 동행자가 아닌 관찰자에 불과하다는 의심을 이 장면이 기정사실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선실 섹스 장면은 관객을 향한 영화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전시한, 역설적으로 가장 진실한 장면이라고도 볼 수 있다. 박찬욱의 전작들이 편견이나 무지에 대한 관객의 자각과 교정을 인물에 대한 이해와 뗄 수 없는 방식으로 제시했다면, <아가씨>에서는 등장인물을 이용해 관객을 착각하도록 유도하면서 편견이나 무지에 대한 자각과 인물에 대한 이해가 서로 배척되도록 만든다. 도입부에서 언급한 퀴어, 여성, 연대와 같은 단어들이 이 영화의 수식어가 되는 데 반대하는 이유는 이런 영화의 내용이 실체에 대한 가림막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내용상 숙희와 히데코의 사랑과 연대를 그리고 있지만, 이들의 사랑은 이야기의 구조적 쾌락을 위해 소비된다. 숙희와 히데코가 이야기 속으로 사라지는 동안, 관객 역시 이야기 바깥으로 소외된다. 남는 것은 이 모든 것이 그저 하나의 이야기뿐일 수도 있다는 앙상한 가정이다.

숙희와 히데코는 정말 탈출했는가

<아가씨>를 읽는 가장 적절한 방식은 이것은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일 뿐임을 인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가씨>에서 3부로 나뉜 이야기 뭉텅이가 기존 박찬욱 영화 속 이미지의 기능을 대신하는 것으로 본다면, 우리가 서사와 이미지를 이해할 때 내레이션과 같은 언어에 얼마나 큰 영향을 받는가를 거꾸로 이해하게 된다. 이런 가능성을 인정한다 해도 2부를 거쳐 다시 1부를 곱씹어봤을 때 백작뿐만 아니라 나 역시 속았다는 사실 외에 뭐가 남는지 궁금하다. 더욱 나쁜 것은 숙희와 히데코가 이야기에서 빠져나간 영화의 결말이, 영화가 그리는 주제와 맞물려 인물들의 주체적인 행위인 것처럼 포장되고 오인된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지난 1060호 영화비평(‘계급과 성차의 대립항을 세우고 부순 박찬욱식 영화언어’)에서 김영진 평론가가 지적했듯 ‘남성들의 지식세계에 물들지 않은 숙희가 남성들의 지식세계를 체화해온 히데코를 구원하는 것’으로 영화를 이해한다면 이들이 영화의 이야기로부터도 빠져나오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야기로부터 빠져나간 것이 아니라 여전히 구조화된 이야기의 일부로서 우리를 희롱하는 또 다른 이미지에 놓여 있다. 이 이미지는 이야기를 균열시키지 못한 채 이야기와 함께 사라져버린다. 이제 관객에게는 숙희와 히데코라는 살아 숨쉬는 생명체가 아니라, 이야기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신기루 같은 두 인물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관객인 내가 이해하고 싶은 것은 ‘동성애’나 ‘여성들의 연대’ 따위가 아니라, 이들의 ‘감정’이었다. 그러나 이야기의 구조는 이들의 관계의 외피만 남기고, 이들의 감정을 드러내는 경로는 차단해버렸다. 나는 영화가 그려낸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짜인 관객의 자리와 그것이 미리 재단해놓은 영화보기 방식이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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