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영화를 마지막까지 지지할 것이다.’ 극장 밖을 나설 때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킨 후 떠오른 생각은 그 하나였다. 목적에 맞게 잘 정돈된 영화는 많지만 분석의 잣대까지 뒤흔드는 경험은 흔치 않다. 처음엔 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느슨하게 바라봤다. 중반 이후엔 허리를 곧추세운 채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와일드 로즈 힐>이라는 곡이 흐를 무렵부턴 분석을 포기하고 영화가 잡아끄는 대로 따라갔다. 불균질한 마찰이 일으키는 강렬한 파열음과 불꽃에 눈이 멀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호불호를 변명 삼아 이 영화를 그저 괴작으로 밀어두는 건 책임을 방기하는 일이기에 나를 뒤흔든 감흥을 끝까지 좇아가보기로 했다.
보이는 것과 보지 않아도 좋은 것들
일단 ‘불균질하고 적대적인 에너지’라는 다소 모호한 표현으로 시작하자.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뭉툭하고 무책임하게 들릴 수도 있는 이 단어를 가능한 정확한 형태로 깎아나가기 위해서다. 처음엔 당연히 호불호가 갈릴 영화라고 생각했다. 내 얕은 기억을 기준으로 한국 상업영화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연출 방식이라 판단했고 감독 내부의 시간과 호흡을 따라가는 영화라고 느꼈다. 무엇보다 중반 이후 심장이 요동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기운들이 상영시간 내내 전신을 육박해 들어왔다. 다소 수사적인 표현을 남발하는 것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적어도 나는 이 영화가 굳이 정교한 해석을 필요로 하는 영화는 아니라고 본다.
<비밀은 없다>의 엔딩이 주는 충격은 너무도 분명하고, 하고자 하는 말은 선명했으며, 감독의 태도 역시 명쾌하고 일관되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거칠고 혼란스럽고 난삽하게 느껴진다면 매 장면, 매 시퀀스의 충돌하는 에너지에 홀린 탓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생경한 아름다움으로, 또 누군가에게는 불쾌한 만듦새로 다가왔을 파열음의 연쇄. 이 파열음은 나를 강렬하게 매혹하는 한편 의심과 미혹을 일으켰다. 무언가 강렬한 에너지가 저 편에서 있다는 건 알겠는데 내가 그걸 정확히 본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리얼타임 비평을 지지하며 자신이 신뢰해온 비평가들은 “중요한 숏을 결코 놓치지 않는 사람들”이라 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나는 한 번 보고 모든 숏의 연결을 기억하는 동체시력을 지니지 못했으니 부득이하게, 두 번 봤다. 그제야 보이지 않는 것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하지만 이내 깨달았다. 실은 그건 볼 필요가 없는 것들이었다. 자크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관조하면 할수록 더 이상 그 자신이 아니게 되는” 이미지들. 어쩌면 두 번 봤기 때문에 장르라는 미명 하에 무의식적으로 충성해온 스펙터클과의 차이를 자각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비밀은 없다>는 이해와 해석이 아닌 감정의 공명을 이끌어내는 영화다. 이 영화 속에서 충돌하는 각 이미지 요소들을 개별로 뜯어놓고 관계를 해석해선 안 된다. 이 영화는 동체시력으로 파악한 화면의 운동, 그 움직임들이 충돌하며 빗어내는 기운, 혹은 감정적 덩어리에 관한 체험이기 때문이다.
먼저 스스로 내뱉은 오류를 정정하려 한다. 영화를 보고 나오자마자 나는 <비밀을 없다>에 대해 “낯선 것을 마주 했을 때의 기분 좋은 당혹”이라 평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무작정 낯설고 다른 영화가 아니다. 정확히 말해 낯섦이란 표현을 쓰려면 대상과 범주를 분명히 했어야 했다. <비밀은 없다>가 스릴러, 추리, 미스터리 장르물의 기대를 배신하는 영화라는 오해는 여기서 발생하는 것 같다. 이 점에 대해서는 씨네21 1046호에 실린 듀나의 <비밀은 없다> 비평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장식을 전부 제거하고 플롯만을 따라 가보면 이만큼 한 치의 오차 없이 성실하게 설계된 영화도 드물다. “사건과 관계된 모든 인물에게 완벽한 설명을 내놓고 있으며”(1046호 듀나의 <비밀은 없다> 영화비평) 초중반 깔아놓은 복선도 대부분 놓치지 않고 회수한다. 만약 이를 낯설고 어색한 플롯이라 느낀다면 그건 ‘장르적 개연성’이라는 허상에 길들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이질적이라 말하는 이들은 좀 더 협소한 의미에서 ‘장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때의 장르적 관습이란 정확하게는 ‘남성이 행위의 주체로 작동해온’ 패턴을 지칭한다. 플롯 자체가 이질적인 것이 아니다. 플롯을 추동하는 주체의 역할과 위치가 변형되고 뒤바뀌어 있기에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연홍과 민진, 미옥의 정서적 연대가 영화의 중심을 차지했을 때 다른 모든 것은 주변으로 밀려난다. <비밀은 없다>의 낯섦과 다름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연홍은 분명 특별한 캐릭터다. 하지만 그 이질감은 캐릭터 내면이 아니라 캐릭터의 위치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연홍은 사실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매우 보편적이고 공감하기 쉬운 캐릭터다. 다만 딸의 사망에 망연자실 눈물 흘리며 주저앉는, 그간 숱한 이야기에서 반복해왔던 반응을 건너뛰고 대뜸 눈을 희번덕거리며 “내 새끼 죽였냐?”라며 덤벼온다. 상처 입은 짐승의 몸짓은 이제 더 이상 연기는 없다는 선언처럼 들린다.
연홍이 딸을 찾아가는 과정 역시 복잡하긴 해도 독창적인 플롯은 아니다. 복잡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실상 전개를 꼬아놓아서 그렇다기보다는 실종이라는 사건의 플롯에서 딸의 심정에 동조하는 이해의 플롯으로 전환되는 방식 또는 타이밍이 생소하기 때문이다. 추리서사에서 모녀 간의 유대와 이해로 전환되는 기점, 서로 다른 톤의 이야기를 하나로 잇는 방식이야말로 이경미 감독의 개성과 자의식이 또렷하게 드러나는 지점이다. 동체시력이 필요한 지점도 바로 여기다. ‘생각보다 착하지 않을 지도 모를’ 딸의 몰랐던 모습을 알아내기 위해 딸의 일기장과 정리 안 된 메일함을 뒤지는 연홍의 필사적인 탐사. 하다하다 방법이 없어 굿을 하며 딸의 안녕을 비는 모습과 미옥이 민진의 핸드폰의 비밀번호 패턴을 푸는 장면의 교차편집은 사실 이상하다. 인과의 배치로 따지면 이 장면들은 충돌해야 하지만 두 장면 사이 격렬한 에너지는 실상 충돌하기 보다는 같은 곳을 향한다. 아니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충돌하지 않는 장면이다. 우리는 그 인과관계를 좀 더 뒤에야 ‘이해’할 수 있지만 실상 이 장면을 보는 관객은 이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너를 좀 더 알고 싶다’는 감정. 상대의 심정을 상상하며 마음속에 그려보는 독해의 과정. 여기서 내가 주목하고 싶은 건 시각적 기호나 사건, 캐릭터의 분석이 아닌 삶의 일부를 상실한 인물들 사이에 오가는 감정의 연대다. 이 덩어리진 감정은 멈춰 보고, 뜯어보고, 분석해 의미화 시키는 행위를 통해선 발견되지 않는다. 그 흔적은 오직 충돌과 마찰, 다시 말해 미칠 것 같은 불편함의 틈새에서만 발견된다. 장면과 사운드의 파열, 적대적인 주변으로부터의 탈주하는 과정에서 피어나는 기이한 에너지, 삐죽 튀어나오고 정돈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연결들이야말로 이 영화의 동력이자 핵심이다.
정서적 연대를 완성하는 감정의 직류
이제 주목해야 할 것은 명백하다. 불꽃이 피어나는 ‘과정’에 시선을 빼앗겨선 안 된다. 원인을 알아내려 각 요소를 해체할 필요도 없다. 그냥 불꽃을 응시하라. 우리가 진정 주목해야 할 것은 각 장면에서 이미지와 사운드 충돌로 일어나는 불꽃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비밀은 없다>에 관한 한 나는 그저 고양되는 감정을 감각하길 권한다. 애써 저항하지 말고 연홍, 미옥, 민진이 쏟아내는 감정의 격류에 몸을 맡기면 그걸로 족하다. 풀어야할 방정식으로서의 영화는 여기 없다. 처음 봤을 때 내가 받은 인상, 그러니까 홀렸다는 표현이야말로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는 방식이었던 셈이다.
이 때 빛을 발하는 것은 감독의 독자적인 구성력이다. 적어도 이경미의 세계에서 자식을 잃었을 때 주저앉아 오열하는 어머니의 관습적 재현은 없다. 영화는 익숙한 룰 안에서 ‘이야기’를 전달하지 않고 아이를 잃어버린 연홍의 ‘상태’를 묘사한다. 딸 민진이 따돌림을 당했다는 걸 알게 된 후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하는 편집은 연홍의 심리를 반영한 결과다. 이경미 감독은 시도 때도 없는 보이스 오버, 화면과 대사의 불일치, 빈번하게 시도되는 사운드 몽타주, 늘어지는 디졸브와 화면분할 등 충돌을 일으킬 수 있는 거의 모든 연출을 활용한다. 사건 전개가 혼란스러워지고, 고르지 않는 톤의 연출법들이 뒤섞일수록 연홍과 소녀들의 심리는 분명해진다. 영화는 그에 부응하듯 장르적 관습을 깨부수며 질주한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생각하자”를 연신 되뇌며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또렷해지는 연홍의 심리 상태를 따라 이경미 감독의 연출도 감독만의 것으로 변모한다. 딸이 타던 그네의 사운드 오버랩을 시작으로 연홍의 감정이 요동칠 때마다 연출 방식도 시시각각 바뀐다. 딸의 실종으로 끝도 없이 불안할 땐 감시의 카메라를 들이대고, 주변이 모두 의심스러울 땐 화면을 분할한다. 자신이 놓친 게 무엇인지 혼란스러울 땐 기묘한 사운드 몽타주가 지속된다. 거칠다고 느낄 수 있는 연출의 다채로움은 연홍의 감정을 쏟아내 조각한 조형물들의 전시에 가깝다. 그 이질적인 요소들의 연결 방식이나 논리를 하나하나 따져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관객의 다채로운 해석을 이끌어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다만 이미 밝혔듯 개별요소들의 구성 ‘논리’는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과정이란 단지 효과적이라 증명되고 학습된 형식일 따름이고 <비밀은 없다>의 경우 ‘연홍의 심리의 장면화’라는 명제 하나만으로 이 영화 속 충돌하는 요소들 대부분 설명이 가능하다. 그만큼 명료하고 목적지가 확실한 서사다. 요컨대 <비밀의 없다>의 뼈대는 실종사건의 추리가 아니라 자식 잃은 어미가 겪을 수 있는 심리의 난사다.
두근거림의 유무는 관객이 연홍의 심리에 얼마나 동화할 수 있는지에 달렸다. 기존 장르영화가 사건의 인과로 이를 설득한다면 <비밀은 없다>는 심리의 조형을 통해 이를 공명시킨다. 넓게는 사운드 몽타주, 좁게는 대사와 장면의 불일치 등의 틈새는 이를 위한 통로나 다름없다. 이 충돌이 단지 거칠고 불편하게 다가온다면 당신은 끝내 연홍의 심리에 동화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불협화음이 거칠수록 불안은 증폭되고 확인하고 싶지 않은 실체가 분명해질수록 심장의 고동소리도 커진다. 불협화음이나 이질적인 음악들은 영화 속 여성들이 적대적으로 배치된 주변 환경 속에서 ‘미치지 않고’ 버티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파열음이다. 당신이 모녀의 연대에 동화했다면 그 소리가 슬프고 애잔하게 들릴 것이고, 그렇지 못했다면 눈살을 찌푸리는 게 당연하다. 앞서 다소 두루뭉술하게 ‘기이한 에너지’라고 표현했던 것은 이런 상황마다 연홍이 겪어야 했을 불안, 좌절, 죄책감, 미안함, 쓸쓸함의 총체적인 합이다. 결국 화면에 토해낸 연홍의 황폐한 내면, 그리고 거기에 공명하는 나(관객)의 심리는 ‘불균질하고 적대적인 에너지’로 둘러싸이는 것이다. 하나 더 놀라운 건 이 불안한 두근거림은 현재 한국사회의 거의 모든 병폐를 훑고 지나가면서 이를 배경으로 녹여낸다는 점이다. 이경미 감독은 영화적 수사와 과장으로 직조된 세계를 현실의 바닥까지 끌고 내려와 짓이기고 비빈 끝에 결국 ‘나와 당신의 이야기’로 만든다. 이것이 <비밀은 없다>를 단지 세밀하게 그려낸 심리드라마가 아니라 올해의 발견으로 꼽고 싶은 이유다.
나는 <비밀이 없다>가 어지럽다거나 거칠다거나 모호한 구석이 있다는 감상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영화 중간 그런 생각이 들 수는 있어도 마지막 대사를 듣는 순간 미혹은 눈 녹듯 사라질 수밖에 없다. “엄마는 바보 같아서 자기가 지켜줘야 한다고 했어요.” 민진의 속마음이 미옥의 입을 거쳐 연홍에게 가 닿을 때 영화 중간 방치해 놓았던 장면들과 다소 과잉된 연출마저 바람을 맞은 돛처럼 단번에 팽팽하게 당겨진다. 그 순간 영화는 마지막 현을 정리하고 튕긴 악기마냥 완벽하게 조율된다. 이것은 인과로 맺어진 서사가 아니라 영화전체를 관통하는 감정의 직류에 관한 이야기다. 마지막 대사를 듣는 순간 모든 관객은 비로소 연홍이(혹은 어머니가) 된다. 다시 말하자면 억압받고 주변에 밀려난 이들의 위치에 선 후, 연대한다. 삐죽 튀어나와 파열음을 내는 것처럼 보였던 불균질한 장면들마저 하나의 멜로디로 배치되어 아름다운 음악으로 승화시키는 마법의 말. 한 문장으로 요약된 올해의 엔딩. 이 정서적 연대와 연결과정에 빈틈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 영화는 반드시 좀더 많은 사람들이 경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