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스페셜] 순수를 선언하다 - <비밀은 없다>, ‘박찬욱 사단’이라는 계승과 오해에 대하여
2016-07-13
글 : 이용철 (영화평론가)
<비밀은 없다>

<비밀은 없다>를 보지 않았던 이유는 간단하다. 박찬욱의 영화를 흉내낸 작품이란 말을 들었다. 그가 이경미의 데뷔작 <미쓰 홍당무>(2008)를 제작했던가? 이번에는 각본에 참여했단다. 후원자 혹은 동반자의 인장이 박혀 있다면 굳이 볼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호기심을 유발한 건 <씨네21>의 반응이었다. 간혹 평작에 열렬히 반응하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관심이 생길 만했다. 그래서 동네 상영관을 찾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건 이경미의 영화임을 알 수 있었다. 박찬욱(이나 나카시마 데쓰야)의 흔적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걸 모방이라 부른다면 지금, 세상에 새로운 창작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로테스크하거나 상식적 틀에서 벗어난 어떤 것에서 사람들은 쉬 박찬욱의 영화를 떠올리는 모양이다. 그만큼 그런 영역에 도전하는 한국영화가 드물다는 방증이다. 난데없이 후안 루이스 브뉘엘이 떠올랐다. 루이스 브뉘엘의 아들.

하나, 아버지 루이스 브뉘엘을 먼저 말해야 할 것 같다. <비밀은 없다>가 그의 영화처럼 거부당했기 때문이다. <비밀은 없다>를 다시 보려면 도시를 건너야 했다. 개봉하고 1주일이 지나자마자 이런 상황이면 철저한 거부가 아니고 무엇이겠나.

둘, 후안 루이스 브뉘엘이 떠오른건 적자의 슬픔 때문이다. 영화사의 거장이자 유일한 천재이면서 동시에 거부당했던 인물을 아버지로 둔 남자가 감독의 자리에 도전해 여러 편의 영화를 찍었다. 결과는? 그를 제대로 인정한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그의 영화에서 아버지 영화의 흔적을 찾거나 그가 아버지를 흉내낸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후안 브뉘엘이란 이름으로 연출한 <붉은 부츠의 여인>(1974)을 다시 꺼냈다. 무려 브뉘엘의 아이콘인 카트린 드뇌브와 페르난도 레이를 출연시킨 작품이다. <붉은 부츠의 여인>은 신기한 능력을 지닌 여성 작가와 사악하고 엉큼한 부르주아의 게임을 그린, 어쩌면 피터 그리너웨이 영화의 앞선 버전처럼 보인다. 흥미로운 영화를 제대로 보려면 차라리 아버지와 배우의 이름을 모르는 게 나았다. 그들의 그림자는 영화를 똑바로 마주하는 걸 방해하고야 만다.

혼란 사이로 봐야 할 것들

사실 <비밀은 없다>를 보면서 브뉘엘의 <자유의 환영>(1974) 중 ‘사라진 앨리에트’에피소드를 떠올렸다. 어른들은 아이를 바로 옆에 두고도 아이가 사라졌다고 믿는다. 심지어 아이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부재를 확신하는 부모는 어딘가 <비밀은 없다>의 연홍과 종찬 부부를 떠올리게 한다. 내용만 유사한 게 아니다. 브뉘엘이 실종된 아이를 빌려 세상을 뒤집어 바라보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경미의 태도는 익숙한 세계를 낯선 시선으로 읽도록 유도한다. 무엇보다 두 영화를 연결하는 중요한 요소는 그 너머에 있다. 인과관계 없는 몽타주가 그것이다. 앞뒤로 도무지 인과관계가 없는 에피소드를 여러 개 연결해놓은 <자유의 환영>의 방식은 <비밀은 없다>의 일부러 거칠게 연결한 편집과 닮았다.

<비밀은 없다>의 편집 방식은 평범한 상업영화의 그것과 많이 다르다. 무당의 굿과 휴대폰의 비밀번호와 아이의 죽음을 무자비하게 몽타주한 장면 정도는 약과다.

다시 하나, 종찬의 차를 모는 기사가 연홍에게 다친 손은 괜찮은지 묻는다. 그녀가 언제 손을 다쳤던가. 이어지는 장면에서야 나는 그녀가 손을 다치는 걸 보게된다. 둘, 연홍이 느닷없이 욕설을 내뱉는다. 그런데 그녀의 목소리는 화면 바깥에서 들려온다. 그녀가 어떤 상황에서 그 단어를 사용하는지 확인하려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야만 한다. 앞뒤로 고르지 않게 잇는 방식은 낯설게 보기를 의도한 것이면서 한편으로 연홍의 혼란을 보여주기에도 효과적이다. 아이의 세계로 진입하려는 엄마의 입장을 거칠고 혼란스럽게 이어붙이는 것으로 표현했다고, 처음에는 생각했다. 그런데 두 번째 보면서 나는 이 영화의 편집이 고도로 정교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비밀은 없다>는 무작정 낯설게 보기를 반복하는 게 아니라 그 혼란 사이로 무엇을 보아야 할지 중심을 잡는 영화다. 그것은 순진함을 가장하려는 어른의 얼굴 같았다. <오디션>(2003), <잘돼가? 무엇이든>(2004), <미쓰 홍당무>에서 그리도 민낯 드러내기를 쑥스러워하던 이경미는 아예 가면을 쓰기로 한 것일까?

또다시 하나, 영화의 도입부, 선거 유세 첫날, 연홍의 집 시퀀스를 기억해보자. 오른쪽으로 쏠린 경계를 중심으로 왼쪽에선 선거 진영의 남자들이 모여 앉아 부산을 떤다. 연홍과 시어머니와 딸 민진은 오른쪽 공간에 서 있다. 나란히 선고부는 유세에서 나눠줄 김밥을 싸는 중이다. 그녀들 곁으로 산더미처럼 쌓인 일회용 도시락. 그들의 존재는 총선 후보 종찬을 중심으로 매겨진다. 종찬의 어머니, 종찬의 부인, 종찬의 딸, 누군가의 부속품. 어릴 적부터 연홍은 자신을 꿈의 중심에 두지 못했다. 그녀의 꿈은 대통령의 부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딸의 실종과 죽음을 계기로 정체성을 찾아간다. 이경미의 영화는 언제나 여주인공의 정체성 찾기와 연결된다. 또다시 둘, 영화의 클라이맥스, 선거 당일, 연홍의 집 시퀀스를 기억하자. 그녀가 새벽부터 준비하는 것은 거대한 상차림이다. 긴 테이블 끝에 앉은 연홍은 물론 종찬도 이것이 ‘마지막 만찬’임을 안다. (다음 시퀀스에서 보여주듯이) 누가 악당인지 다 밝혀진 상황이고, 연홍은 더이상 누군가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니며, 종찬도 다가올 무언가를 어렴풋이 눈치챈다. 이경미는 매섭게도 그들이 클라이맥스에서 꿈을 파괴하기를 바란다. 연홍이 ‘노재순(상대 후보)을 이겨’라고 주문하자, 이어지는 시퀀스에서 종찬은 ‘노재순을 이겼어’라고 답한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들은 자진해 꿈을 산산조각으로 부순다. 그것이 곧 그들의 죽음이다. 하지만 이것은 죽음이 아닌 부활에 대한 이야기다. 죽음의 순간, 음흉한 인간 같던 종찬은 처음으로 아기의 미소를 짓고, 이어지는 시퀀스의 첫 숏은 태아의 자세로 옹크린 연홍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다시 태어난다, 왜?

이제 해야 할 일은 순수의 복구

<붉은 부츠의 여인>에는 그런 대사가 나온다. “아이들에겐 선악의 개념이 없어. 그게 그들이 잔혹한 이유야. 또한 그것은 예술가들을 다 큰 아이라 부르는 이유이기도 해. 그들은 순수성을 유지하려고 필사적으로 애써, 때때로 죽을 때까지.” 새롭게 세우려면 모든 것을 파괴하고 의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연홍은 자기가 걸어온 길을 거꾸로 통과한다. 민진과 친구들이 했던 것은 선악과의 싸움이 아니다. 아이들이 그토록 저항한 건 ‘세상사에 물든 것들’이다. 종찬은 말했다. “아이들이 죽는다고 부모들, 죽지 않습니다.” 그건 악당의 말이 아니라 세상사에 찌든 것들의 말이다. 세월호를 이제 그만 잊자는 말도 다 그런 치들의 입에서 나온다. 다시 태어난 연홍이 이제 해야 할 일은 순수의 복구다.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민진의 친구 몫인데, 아이는 “엄마가 멍청해서 지켜줘야 한다”는 민진의 말을 전한다. ‘지킨다’는 ‘보호’를 뜻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의 비극은 ‘보호받지 못한 순수’에 있다. 그게 이경미의 목소리다. 박찬욱이 낄낄거리고 나카시마 데쓰야가 혼란스러워 손을 놓아버린 자리에서, 이경미는 순수를 선언한다. <비밀은 없다>는 고스란히 이경미의 작품이다. 수많은 기표와, 그것보다 훨씬 많은 수의 해석을 기꺼이 용인하는 영화를 엉뚱하고 차갑게 재단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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