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김성욱의 영화비평] 아가씨는 예쁘다 <아가씨>
2016-07-19
글 :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박찬욱의 새로운 게임의 규칙

“이쁘면 이쁘다고 미리 말해줬어야지. 당황스럽잖아.” <아가씨>에서 하녀 숙희(김태리)는 아가씨 히데코(김민희)를 만나 이렇게 혼잣말을 한다. 이미 전날 저녁, 처음 저택에 들어온 숙회는 아가씨의 갑작스런 비명에 깨어나 그녀를 다독거리며 자장가까지 들려주었다. 하지만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본 것은 처음이다. 그러고는 깜짝 놀란다.

<아가씨>

숙희의 입에서 튀어나온 ‘예쁘다’는 말은 이상한 표현은 아니다. 아가씨는 예쁘다. 우리는 이를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숙희의 독백이 흥미를 끄는 것은 그녀가 예쁘다는 것을 당황스럽다며, 미리 알지 못했다는 것과 연결시키는 대목이다. 그녀는 아가씨가 예뻐서 놀란 것이 아니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놀란 것인가? 이는 하녀로 위장 잠입해 아가씨의 돈을 갈취하려는 백작(하정우)과의 치밀한 공모의 허점을 드러내는 것인가? 아니면 그녀의 숨겨진 욕망을 드러내는 것인가? 어떻든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내가 흥미를 느끼는 것은 ‘예쁘다’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가령, 1부의 서두에서 백작이 숙희의 무리들을 찾아와 공모에 대해 논의할 때, (아마도 백작에게 마음을 뺏긴 때문인지) 끝단이(유민채)는 아가씨가 예쁜지를 질문한다. 이에 대한 어떤 부가적인 설명이 없기에, 우리는 끝단이의 입에서 흘러나온 ‘예쁘다’는 말의 진의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녀는 아가씨를 두고 질투하는 것인가? 그 비슷한 말이 다른 곳에서도 반복된다. 2부에서 히데코는 백작과 공모를 하면서 자신의 하녀를 내쫓기 위해 그가 하녀와 일을 치르게 한다. 그때 하녀의 입에서도 그 비슷한 말이 튀어나온다. 정확한 대사를 기억할 순 없지만 이런 식이다. 제가 아가씨보다 이쁘다는 말이 정말인가요? 왜 아가씨를 말하면서 예쁘다는 말이 계속 반복되어 나오는 것일까? 대체로 이 말에서 우리는 <친절한 금자씨>(2005)에서 나왔던 다음의 대사를 또한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예뻐야 돼. 뭐든지 예쁜 게 좋아.”

‘예쁨’과 ‘아름다움’에의 혼란들

우리는 다른 영화에서 그녀로 향한 이런 말을 이미 접했었다. 가령, 홍상수의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에서 춘수(정재영)는 희정(김민희)에게 ‘예쁘다’고 말한다. 이미 영화의 첫 장면에서 춘수는 창가에 서서 거리에 서 있는 보라(고아성)를 보며 “너무 예쁘다, 너무 젊다. 조심해야 해”라고 되뇐다. 그가 예쁘다는 것을 왜 두려움으로 감지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당연한 말이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필이면 동일한 배우에게 ‘예쁘다’는 말이 반복해 표현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영화를 만드는 작가에게 내부에서 육화되어 제기되는 질문이 중요한 것이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춘수가 여자를 보며 ‘예쁘다’고 말한 것은, 나로서는 영화의 제목이 상기시키는 바 지금은 맞지만 그때는 틀릴 수도 있는, 그 어떤 아름다움에 대한 질문처럼 느껴졌다. 엄밀한 어법을 따질 필요 없이(가령, 예쁘다는 것과 아름답다는 것은 본질적으로는 다른 것이다), 그의 영화에서 예쁘다는 것은 시간 속에 놓여 있다는 점만을 강조하고 싶다. 지금과 그때의 시간. 아름다움은 여기서 순간적이면서 영원의 문제다. 감독인 춘수는‘정말 더 예쁜 걸 만들겠다’고 말한다. 이는 아직 보지 못한, 만들지 못한 미래의 영화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조심해야 해’라는 식의 두려움을 넘어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박찬욱의 영화에서 ‘예쁘다’는 것은 어떤 두려움을, 혹은 무엇을 넘어서는 표현일까?

이 질문에 다가서기 위해서 몇 가지 상황들을 거론해야만 할 것 같다. 코우즈키(조진웅)는 백작에게 ‘한국은 추하고, 일본은 아름답다’고 말한다. 백작은 그 반대의 말을 꺼내지만, 여기서 예쁘다,아름답다는 말은 추함과 비교되어 말해진다. 나중에 백작은 히데코에게 ‘매혹적’이라고 말한다. 히데코는 그러나 이 말을 다른 식으로 받아들인다. 게다가 그녀는 숙희에게 어머니의 사진을 보여주며 자신이 엄마보다 못하다고 말한다. 사실 이 말은 그녀의 이모(문소리)가 어린 히데코에게 마찬가지로 사진을 보여주며 했던 말이기도 하다. 이상한 열등감의 표현들. 실제로 우스꽝스런 순간들도 있다. 백작은 히데코에게 접근하기 위해 코우즈키에게 그림 수업이 필요하다며 서양에서는 귀족의 여인들에게 아름다움에 대해 가르친다 말한다. 이어 히데코의 그림 수업이 진행되는데, 백작과 히데코는 숙희를 모델로 그림을 그린다. 화면은 가짜 백작의 그나마 아름다운 그림(그는 이 공모를 위해 몇년간의 위작 그림을 그리는 수업을 거쳤다)과 히데코의 아이들 수준의 그림을 동시에 보여준다. 나는 히데코의 초보적인 그림, 말하자면 그녀가 그린 숙희의 초상을, 숙희가 처음 저택에 들어서는 순간 배경에 보이는 히데코의 초상, 또 부재하는 어머니의 사진과 비 교해 말해보고 싶지만, 여기서는 단지 이 영화가 그림이나 사진과 달리 다면적으로, 유동적으로 여인의 초상을 그리려는 시도를 보였다는 점만 지적하고 싶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초상화와 사 진과 달리 두 여인의 초상을 언제나 있던 자리에서 달아나는 것으로, 계속적인 이동 속에서, 변장과 가면 속에 있는 것으로 포착한다. 여인의 초상은 계속 달아난다(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대한 해석도 이와 무관치 않다).

변화무쌍한 건축물들도 이를 거든다. 양식과 일본식이 결합한 저택, 계단이 강조되면서도 실제로는 수평으로 길게 늘어진 내부의 구조들이 있다(이 영화가 김기영의 계단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유다. 이 영화의 수직성은 나무 아래에 매달린 히데코의 모습에서 강조될 뿐이다). 뒤섞임과 혼합의 매력을 지닌 이런 무대 장치는 영화의 연극적 국면들을 보조한다. 여기서 ‘예쁨’과 ‘아름다움’ (그것이 비록 도착적인 것으로 변형되어 있을지언정 그러하다)에의 혼란들, 현기증, 연극적인 속임수가 발생한다. 이 통일성 없는 세계는 변화무쌍한 형상들의 세계다. 여기에 이중성의 다양한 형태들이 있다. 두명의 여인들. 두명의 하녀들. 두명의 낭독자들. 숙희가 자신의 무대에 들어섰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는 이 모든 것이 속임수이며 가짜이고, 방이 열리면 또 다른 깊 은 무대가 펼쳐진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닫게 된다. 숙희의 진정한 모험은 그런 혼란을 받아들이는 데에 있다. 이는 미리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이다.

마음속에 욕망이 일어나게 하는 그 무엇

그런데 아가씨를 두고 예쁘다고 말하거나 아름답다, 매혹적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가? 여기서 인물들이 말 하는 정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런 말들이 그들의 눈앞에 있는 아가씨의 모습을 넘어서서 무언가를 생각하게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말하자면, 이끌리고 마음을 사로잡고, 마음속에 욕망이 일어나게 하는 그 무엇 말이다. 가령, 낭독회의 남자들을 사로잡는 히데코의 책 읽기에서 요지는 그 음란한 내용들이 아닌 것이다. 대신, 고도로 훈련된 그녀의 목소리와 제스처야말로 매혹적이다. 하지만 숙희를 사로잡은 아름다움이란 이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이에 대한 설명은 드라마의 개연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어떤 심연이다. 그녀는 거기에 있고, 그녀에게 빠져드는 것은 하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녀의 욕망을 논하는 것은 호기심이 들지라도 흥미롭지는 않다. 영화는 그 대신 이들의 공모를 그려내는 데에 더 많은 것을 할애한다. 이 둘의 공모는 심리적인가, 혹은 계급, 남성에 대한 투쟁에 근거한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더한 설명이 필요할 수 있겠지만, 나로서는 그 어떤 규명 대신 이들이 새로운 관계의 모럴을 만들어가는 것에 일단 주목하고 싶다. 말하자면 공생의 계약 말이다. 새로운 힘을 만들어내기 위해, 영원히 지고 마는 반복의 죽음을 넘어서기 위해 하녀와 아가씨는 공생을 시도한다. 이는 박찬욱의 새로운 게임의 규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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