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남(이정현)은 규정(이해영)과 결혼하고 집을 사기 위해 밤낮으로 일하지만, 내 집 마련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대출을 받아 마련한 집의 재개발을 위한 서명서가 갈가리 찢기고 지하에 갇혀 모진 가혹행위를 당하고서, 그녀는 변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행복을 방해하는 모든 이들을 잔혹하게 응징하는 것이다. 이 순간부터 영화는 잔혹 복수극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낸다.
그러나 수남과 규정을 중심으로 서사를 재구성해보면 영화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규정은 사고로 손가락을 잃은 후 수남을 차갑게 대한다. 수남은 그런 남편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남편의 꿈인 내 집 마련을 결심한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남편의 자살시도이며, 그 후에도 그녀는 남편의 병간호와 병원비 마련을 위하여 헌신하다가 결국 그와 신혼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이상한 것은 수남의 헌신이 아니라, 이 두 서사가 가진 온도차이다. 수남을 괴롭힌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잔인한 복수의 타깃이 되었다. 수남의 행복에 있어 방해가 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고의가 아닐지라도 결과적으로 수남의 시련은 대부분 규정에 기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에 대해 최소한의 문제의식이나 개선의지조차 없으며 오히려 규정에게 계속 헌신한다. 두 서사의 괴리에 대한 영화의 설명은 죄책감, 혹은 사랑이라는 관념에 위태롭게 의지하고 있다. 그러나 회상 장면을 제외하고서 수남에게 규정의 존재는 섹스, 성기, 그리고 프러포즈라는 단순한 요소들로 환원된다. 그러므로 손가락을 잃게 했고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영화적 괴리에 대한 어설픈 봉합이다.
그보다 설득력 있는 이유를 우리는 근래 천만 관객 영화들에서 찾을 수 있다. <명량>(2014), <국제시장>(2014)에 이어 <베테랑>(2015)까지, 최근 천만 영화는 강한 남성의 율법을 따르는 것들이다. 그리고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2014)가 복수의 칼을 들이대는 대상들은 사악한 붉은 여왕, 괴팍한 노인, 폭력적인 정신질환자와 무능하고 성가신 경찰들이다. 이들은 모두 현재 한국영화의 주변부에 위치한 인물들이다. 즉, 영화는 앨리스에게 시련을 준 인물들 중에서 관객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주변인들에게만 잔혹한 복수를 난사한다.
일반적인 잔혹 복수극은 무차별적 복수를 장르적 쾌감의 원천으로 삼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안전한 자들에게만 선택적 복수를 가한다. 그것은 결국 가정으로 회귀하여 아내의 자리에서 행복을 찾는 고전적 방식으로 마무리된다. 이때에 수남이 머무는 곳은 영화가 시종일관 시도하는 전복적인 복수자가 아니라 적당히 앙큼한 아녀자의 자리이다. 영화 속 앨리스는 한국 극장가의 생리에 정통하다. 그녀는 그래도 되는 대상에게는 가혹할 정도의 복수를, 불편한 대상에게는 철저한 순종을 선보인다. 그러므로 피가 흐르고 살이 튀는 장면들이 넘쳐나도 이 영화에 진정으로 전복적인 순간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