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행>에는 마치 영화의 작은 결말처럼 보이는 장면이 등장한다. 바로 할머니 인길(예수정)이 좀비로 변한 순간 동행자였던 할머니 종길(박명신)이 좀비들의 객실 문을 열어젖혀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많이 언급된 좀비 액션만큼이나 중요하게 거론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부산행>이 현실의 문제를 텍스트 내에서 적극적으로 파고들고 있다고 느껴지는 거의 유일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세태를 비판적으로 반영하는 장치가 이것 하나뿐이라는 말이 아니다. 가령 4·16을 환기시키는 요소들만 해도 영화 곳곳에 심어져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날카롭지 않고 뭉툭하다. 뭉툭해서 그것을 빼놓더라도 전개에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열차 신은 다르다. 영화의 서사는 이 장면을 위해 처음부터 꽤 많은 것을 차근차근 준비한 뒤 열차 신에 이르러 생존주의라는 문제를 테이블의 중앙에 올려놓고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러니 만약 <부산행>이 현실의 무언가를 텍스트 내로 끌어들여 다루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면, 그 무언가의 자리에 올 수 있는 것은 4·16이나 무능하고 기만적인 정부의 대처 같은 것이 아니라 생존주의다. 문제는 영화가 생존주의를 다루는 방식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종길이 객실 문을 열어젖힌 데는 두 가지 배경이 함께 작용한다. 하나는 용석(김의성)과 사람들의 생존주의가 이기적인 방식으로 표출된 사건으로 인길이 좀비가 되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좀비가 된 인길의 얼굴이 온순하게 무기력하다는 점이다. 첫 번째와 관련해 용석이 단순한 악인이 아니라는 점부터 말해야겠다. 연상호 감독은 “용석이야말로 거의 유일하게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말한 적 있다(<씨네21> 1063호 커버스토리). 용석을 이성적이라고 묘사한 점이 흥미로운데 그에 대한 설명 때문이 아니라 초기작 <지옥: 두개의 삶>(2006, 이하 <지옥>)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지옥>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천국에는 고통이 없다고 한다. 어렸을 때 사람이 이성을 가지면서 고통이 없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천국에는 이성이 없다고 한다.” 두 작품에서 사용되는 ‘이성’이라는 단어에 얼마간 결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런 표현도 가능할 것 같다. 연상호의 세계에서 천국에는 이성이 없는 반면, 반대편 즉 <부산행>이 그리는 지옥도의 중심에는 용석이라는 이성적인 인물이 있다.
용석이 단순한 악인이 아니듯
용석의 목숨은 질기다. 그는 매 순간 여타의 가치 판단을 제쳐두고 최대한 이성적인 판단만을 내리며 수많은 고비를 넘긴다. 생존만이 유일한 목표가 되어버린 <부산행>에서 오늘날 한국 사회의 원초적 풍경을 이루는 생존주의를 읽어내는 건 어렵지 않다. 영화 초반 용석과 석우(공유)는 유사한 캐릭터로 그려진다. 두 사람 모두 연상호가 말한 의미의 이성적인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영화는 두 인물을 통해 생존주의의 상황에서 비껴갈 수 있는 사람은 없음을 보여준다. 두 인물은 대전역에서 남들보다 빨리 살길을 찾기 위해 직업과 지위를 내세운다. 유명 펀드매니저인 석우는 지인에게 종목 추천을 약속하며 탈출 경로를 확보하고, 대기업 임원인 용석은 좀비들이 나타나자 생존자를 남겨둔 채 기차를 빨리 출발시키기 위해 승무원에게 자신의 명함을 내민다. 석우의 탈출은 실패하고, 용석의 경우 기차는 그의 바람대로 출발하지만 이후 가까스로 기차에 올라탄 생존자들과의 충돌로 유예되었던 생존의 위기가 그를 다시 찾아온다. 두 인물이 방패로 사용하려던 직업과 지위는 바로 쓸모가 없어지거나 곧 쓸모가 없어진다. 이러한 설정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생존주의의 늪으로 침잠하는 현실을 강조한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종합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먼저 용석이 단순한 악인이 아니듯, 좀비에 감염되었을지도 모르는 생존자들에게 문을 열어주지 말자는 용석의 선동과 그의 말에 따르는 사람들의 행동을 단순한 악행이 아니라 극단적인 생존주의 상황에 대처하는 이성적인 반응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생존자들을 격리시키기 위해 한마디씩 거칠게 말을 얹는 사람들의 화가 난 얼굴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이기심이라는 마음의 상태가 아니다. 이들의 얼굴에서 관찰되는 것은 자신의 생존의 문제가 언제 더 깊은 나락으로 추락할지 모른다는 막연하지만 강렬한 불안이 그 불안을 표출할 대상을 찾자 구체적인 분노로 바뀌는 마음의 전이다. 실제로 카메라는 사람들이 용석의 말에 불안하게 동요하는 얼굴을 풍경처럼 보여준 뒤 이내 그 불안한 얼굴들이 분노하는 얼굴들로 변한 풍경을 다시 비춘다. 한국 사회의 여러 풍경을 접하며 우리는 불안과 분노가 점점 더 닮은 얼굴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불안과 분노의 상호작용을 생존주의라는 사태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데 동의하는 순간 열차 신이 생각보다 복잡한 문제들로 얽혀 있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열차 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생겨난다. 감염이 의심되는 생존자들의 목숨보다 자기 자신의 목숨을 더 중히 여긴 사람들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그 대가로 단호하게 죽음을 선고해도 괜찮을까. 더욱이 영화가 우리를 잠식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생존주의를 얼마간 떠올리게 할 때, 그리고 그 생존주의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행위”라는 것이 실은 “박애, 사랑, 도덕과 같은 사회적인 것의 성스러운 환상이 벗겨진, 사회적인 것의 불가능이 생산해낸 형식”이라고 할 때(김홍중의 논문 ‘서바이벌, 생존주의, 그리고 청년 세대’), 종길이 대리하고 있는 영화의 처분은 불가능한 환상으로서의 비판과 단죄는 아닐까. 이러한 의문은 열차 신의 두 번째 동기, 좀비가 된 인길의 얼굴을 고려하면 더욱 짙어진다. 인길의 온순하게 무기력한 얼굴은 예외적인 좀비의 형상이다. 이 예외는 종길과 우리에게 생존주의에 적응력이 강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게 만든 뒤 비판의 칼날을 전자에게 겨냥하게 만든다. 이때 후자를 향한 동정과 연민의 감정이 전자에 대한 분노와 혐오의 감정으로 치환되고 영화는 그 분노와 혐오를 동력으로 삼아 전자의 죽음을 요청하고 정당화한다. 이 정당화는 섬뜩하다. 만약 인길이 다른 좀비들처럼 게걸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해도 우리는 종길의 복수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진짜 문제는 이 섬뜩하게 설계된 불가능한 환상으로서의 단죄가 “놀고들 있네”라는 종길의 쿨한 대사, 종길이 문을 열어주는 장면, 좀비가 사람들을 물어뜯는 화려한 액션으로 마무리될 때 발생한다. 우리는 이 장면의 연쇄에서 오는 카타르시스를 즐기지 않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어쩌면 그 순간 영화는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거래를 하면서 자신의 잔인함을 은폐하고 우리는 그 카타르시스의 거래를 승낙하면서 영화의 잔인함을 묵인하게 된 건 아닐까.
작은 결말을 생각하다
신파에 관한 이야기로 글을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열차 신 이후의 전개는 의아할 정도로 액션의 이미지를 더한 신파의 서사에만 집중한다. 그런데 신파의 서사는 많이 말해진 것처럼 단지 낡고 세련되지 못한 데서 오는 문제일까. 영화의 의도와 달리 신파에 대한 냉소의 반응이 많지만, 어쨌든 계획상 신파가 조준하는 눈물이나 그에 준하는 감정은 카타르시스가 지나간 자리를 가득 메우도록 마련된 것이다. 신파의 서사로 순도 높게 채워진 자리를 보며 역으로 영화의 어떤 흐름이 멈추었다는, 그것은 이미 열차 신에서 끝났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느낌은 아마 석우와 용석을 같은 지점에서 출발시킨 뒤 차곡차곡 쌓아가던 생존주의에 관한 하위 서사가 열차 신에서 나름의 작은 결말을 맺고 퇴장한 것과 관련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뇌리에 남은 것은 영화의 희망적인 큰 결말보다 섬뜩하고 비관적인 영화의 작은 결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