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스페셜] 충무로가 강박적으로 기존의 성공 코드를 답습하는 방식
2016-08-03
글 : 송형국 (영화평론가)
<부산행>

연상호 감독의 대표작 <돼지의 왕>(2011)을 보며 <말죽거리 잔혹사> (감독 유하, 2004)를 떠올리지 않기는 어렵다(교실 안 폭력의 정점에 두 무리가 있고, 한쪽 세력은 학생들을 선도한다는 명목으로 힘을 휘두르며, 주인공은 그 상대편 무리의 하부에 위치하면서 폭력의 질서에 끌려간다). <말죽거리 잔혹사>에는 이런 장면이 있다. 쉬는 시간 교실에서 이소룡 역을 맡은 ‘짱’이 악당들을 물리치는 역할극을 펼친다. 놀이를 제안하는 ‘짱’은 이렇게 말했을 터다. “나 이소룡, 너 나쁜 놈 두목, 나머지 너희들은 그 부하들이야. 자, 다 덤벼.” 제안이 아니라 지정이다. 이제 정해진 역할에 따라 예정된 스토리가 시작된다. 10대 남자애들의 역할극에서 악당은 어쩌다 악에 물들게 됐는지, ‘부하2’의 어머니는 얼마나 자식을 걱정할지 따위를 돌아볼 여유란 없다.

전형적이라고 해서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부산행>은 솜씨 좋은 상업 기획영화다. 인물들이 전형적이라고 해서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갑질로 시작해 살인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 버스회사 상무,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배운 것을 실천하는 어린이, 아내뿐 아니라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의리파 남자 등 영화 속 인물들은 정해진 선로를 따라 성실하게 달린다. 문제는 전형성이 아니라 일방성에 있다. ‘짱’이 제 맘대로 역할을 정하듯 <부산행>은 캐릭터를 제안하거나 설득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한 채 관객에게 떠넘긴다. 아니면 그 노력이 편집실에서 제외됐거나. 캐릭터란 지정하는 것이 아니라 구축해야 하는 것이다.

석우(공유) 일행이 좀비들이 우글대는 객실을 뚫고 고립된 이들을 구해 안전한 칸으로 돌아오는 장면은 <부산행>의 대표적인 사고 구간이다. 용석(김의성)을 포함해 남아 있던 승객은 석우 일행이 감염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격리시키려 한다. 갑자기 객실 내 단역들의 비중이 커진다. 아노미 상태에서 누구나 괴물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부산행>의 내용상 핵심에 해당하는 장면 중 하나다. 영화는 그간 눈길 줄 틈 없던 단역들에게 갑작스럽게, 일방적으로, 안전한 칸에 남아 있었다는 공통점 하나만으로, 이들의 등을 떠민다. 영화가 “지금부터 당신들 모두 이성을 잃는 거야” 하니 그리되었다. 석우 일행을 향해 빨리 이 칸에서 나가라고 윽박지르는 사내가 이 믿을 수 없는 사태 속에서 얼마나 놀라고 두려웠으며 가족을 걱정하고 있을지는 단 한숏도 염려하지 않는다.

연상호 감독이 <씨네21>과의 인터뷰(1064호)를 통해 참고했다고 밝힌 영화 <미스트>(감독 프랭크 다라본트, 2007)를 보자. 여기에도 괴물이 되어가는 한 무리가 있다. 처음에 믿지 않다가 충격과 공포의 날벼락을 맞고, 정신없이 살 궁리를 하다가 사이비 종교인의 설교에 하나 둘 그 세력이 늘어가는 과정이 압축적이지만 정교하게 제시된다. 지역사회에서 하위 계층에 속하는 짐(윌리엄 새들러)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한 일을 겪은 뒤에야 이 무리에 가담할 때, 사람이 저렇게 미쳐가는구나 하며 관객은 영화의 캐릭터 제안을 공감 속에 받아들이게 된다. 120분 안팎의 상업영화에서 캐릭터 설명을 언제 다 하고 있느냐는 말이 핑계에 불과하다는 근거는 할리우드영화에 얼마든지 있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측면에서 <부산행>은 성공적이다. 흔한 할리우드 재난영화처럼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박사가 국가안보회의에서 강의를 하지 않고도 영화는 코레일 관할 구역 안에서 효율적으로 질주한다. 선한 인물이든 악한 사람이든 좀비 앞에 평등하다는 설정들은 재난의 실체에 가깝다는 점에서 특히 긍정적이다. 그런데 <부산행> 속 다수의 인물들은 난생처음 보는 좀비의 흉측함과 그로 인한 충격에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여줄 기회를 얻지 못한다. 관객은 이미 좀비를 봤지만, 이후에 등장한 몇몇 극중 인물들은 처음 맞닥뜨린 좀비 앞에서 딱 관객만큼만 놀란다. 비유하자면 이들은 <부산행>의 첫숏에 클로즈업되는 마네킹처럼 지정된 역할만 수행하는 기계처럼 보인다. 앞뒤 보지 않고 자기 살 궁리만 하기. 좀비에 맞서 용감히 몸싸움 벌이기. 다른 사람을 도우며 순수한 영혼임을 보여주기 등. 예상치 못한 재앙 속에 익히 예상되는 캐릭터들의 내부 충돌이, “전형적”이라는 다수의 인상으로 뭉뚱그려져 표출되는 것으로 보인다. 좀비 사태를 “폭력 시위” 라고 말하는 안전행정부 장관의 한심함을 비롯해 몇 차례 등장하는 영화 속 발언을 가지고 ‘연상호 감독 특유의 사회 인식’이라고 한다면, 요즘 이 정도의 사회 비판조차 없는 상업영화를 찾는 게 더 어렵지 않느냐고 반문하고 싶다. 2000년대 후반 이후 우리 증시나 개미투자자들이 일개 펀드매니저에 의해 좌지우지된다거나 증권사가 데이터 조작이 아닌 바이오업체의 실물을 건드려 바이러스 유출의 원인이 된다든지 하는 극의 뼈대 역시 현실성이 떨어진다.

어린이날 딸에게 사준 선물이 무엇인지 기억하기보다 새로 뽑은 아우디에 묻은 얼룩을 더 신경 쓰는 듯한 아빠 석우는 딸과 함께 생존하기 위해 분투한다. 증시에 작전을 걸고 군인에게 청탁 전화를 하는 그는 <부산행>에서 가장 입체적이며 리얼리티에 부합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같은 아빠 캐릭터를 몇 차례 본 적이 있다. 대표선수를 뽑자면 <우주전쟁>(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2009) 속 아빠(톰 크루즈)다.

이제 영화의 답습에 대해 얘기할 차례다.

<부산행>이 <월드워Z>(감독 마크 포스터, 2013)에서 차용한 디테일은 숱하다. 좀비들이 쌓이고 엉기면서 거대한 생물체처럼 변모해 움직이는 묘사만 그런 게 아니다. 차창 밖에서 사람이 휙 사라지는 모양을 안쪽에서 보여줌으로써 좀비의 출현을 알리고, 항공기 내부를 대신한 열차 객실 한칸 전체가 그 폐쇄성으로 인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팔뚝 보호장구를 뚝딱 만들어 착용하고, 헬기 다리에 좀비들이 매달려 위태롭게 날아가고, 상냥하던 승무원이 좀비로 돌변해 충격을 주고…. 공격당한 승무원이 엎어져 있다가 얼굴을 치켜드는 각도조차 <월드워Z>의 그것과 똑같은 것은 덤일까.

어떻게 ‘다르게 할지’ 고민이 없다

영화가 기존 작품의 성공 코드를 빌려오는 일은 잘못이 아니다. 기왕에 잘한 것에서 출발해 영화언어를 풍부하게 해온 과정이 영화의 역사임은 말할 것도 없다. 문제는 차용한 장치들이 개별 작품 내부의 세계관 또는 새로 설계한 세상과 긴밀히 관계맺고 있느냐다. 미국에서 당대 사회상을 반영하며 탄생한 좀비를 물 건너 들여오기 위해선 신선도 유지를 위한 가공처리가 필수다. 좀비들의 분장이나 시각적 충격 장치의 변주만으로 가공이 마무리됐다고 하면 곤란하다. 2016년 국내에서 한국어를 사용하는 극중 인물들이 좀비를 대할 때 외국과는 어떻게 다를지를 좀더 집중 연구했어야 <부산행>은 한국 좀비영화로서 의미를 지닐 수 있었다.

충무로가 강박적으로 기존의 성공 코드를 답습하는 증상은 감염병 수준이다. 석우가 열차에서 떨어지는 순간 소리 높여 울려퍼지는 음악의 가락과 음색이 그간 얼마나 자주 반복 재생됐던 것인지는 얘기할 필요도 없겠다. 최근 몇년 사이 한국영화에 등장한 칼부림과 피칠갑의 디테일, 고위 권력자의 지저분함, 억울함에 대한 손쉬운 처방전, 조폭들의 말투에 이르기까지, 충무로에 만병통치약과 같은 답습이 횡행한다. <부산행>은 본질적으로 이같은 한국영화계의 레일을 이탈하지 않은안전한 관광열차다. 변칙 사전 개봉을 감행하고 전국 1700여개의 스크린을 접수한 <부산행>이 최단 기간 관객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는 현상이 달갑지 않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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