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우의 재치, 하정우의 능청, 하정우의 여유, 하정우의 입담, 하정우의 끈기, 하정우의 의리… 이 모든 것이 한데 섞여 <터널>의 이정수는 탄생했다. 하정우는 제 고유의 모습을 캐릭터에 조화롭게 이식하는 배우다. 근작인 <아가씨>(2016)의 백작과 <암살>(2015)의 하와이 피스톨처럼 장르영화의 선명한 캐릭터에도 틈틈이 제 특징을 심어놓는다. <터널>은 그러한 하정우의 자기 이식이 심화된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정우의 말로 요약하면 <터널>은 “보편적인 직업을 가진 보통 사람이 어느 보통날 갑자기 터널 붕괴 사고를 당하는” 이야기다. 극중 이정수는 자동차 세일즈맨이자 어린 딸과 아내를 둔 가장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채 10분도 되지 않아 터널이 무너지고, 그때부터 정수는 고립된 공간에서 혼자 생존기를 펼쳐나간다. 어쩌면, 보이지 않는 테러범의 위협 전화를 받고 혼자 고군분투해야 했던 <더 테러 라이브>(2013)와 비슷할 수도 있는 캐릭터다. “<아가씨> 준비할 때 <터널>의 시나리오를 받았다. 처음엔 <더 테러 라이브>와 비슷한 패턴이겠네 했다. 그런데 딱 시나리오 10페이지 넘어가니까 <터널>과 <더 테러 라이브>는 전혀 다른 영화더라.”
<터널>은, 터널 바깥의 시선으로 보면 이정수 구출기고 터널 안쪽 시선으로 보면 이정수 생존기다. 정수의 생존기는 처절하기보다 인간적이다. 그는 재난의 한가운데 놓여 있지만 재난의 무게를 여유롭게 들쳐 업는다. “이 인물이 마냥 힘들어하고 마냥 고통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안에서 적응하고 대처하는 모습들이 많이 살기를 바랐다.” 구조를 기다리며 상황에 빠르게 ‘적응’해가는 이정수의 모습에서 어렵지 않게 <캐스트 어웨이>(2000)를, 무인도에 갇힌 톰 행크스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정우의 참고 목록에 당연히 포함된 작품이었다. “혼자서 연기해야 하는 장면이 많았기 때문에 비슷한 영화들에서 그 배우들은 어떻게 핸디캡을 돌파했는지 점검했다. <캐스트 어웨이>, <127시간>(2010), <베리드>(2010) 그리고 <올 이즈 로스트>(2013) 같은 영화들 말이다.”
영화에서 긴장을 조성하는 역할도, 긴장을 이완 시키는 역할도 하정우가 도맡는다. 좁고 캄캄한 터널 내부에서 진행되는 생존기지만 천연덕스럽게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하고, 소통할 수 없는 것들과 소통하는 하정우의 느긋한 연기가 영화에 여유를 불어넣는다. 하지만 현장에선 절대적으로 긴장해야 했다. 좁은 차 안에서의 촬영이라 운신의 폭이 좁았고 클로즈업 장면도 많았다. “예측 불허의 상황에 반응하는, 작은 것에도 반응하는 태도로 즉흥연기를 했다. 터널의 붕괴가 진행 중이기 때문에 세트에 들어갔을 때도 늘 긴장하면서, 경계심과 공포심을 가지고 연기를 했다. 계획되지 않은 것을 다 받아칠 준비를 하면서.” 4∼5대의 카메라가 동시에 돌아갔고, 심지어는 20분 가까이 연기를 이어간 적도 있었다고 한다. “즉흥연기를 하는 데서 오는 짜릿함”을 제대로 경험한 현장이었다. 더불어 <터널>은 좋은 사람들을 곁에 두고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을 오래 이어가기로 유명한 하정우에게 김성훈 감독이라는 “좋은 영화적 동지”를 선물한 영화다. <암살>의 최동훈, <아가씨>의 박찬욱 등 최근 새로운 감독과의 작업이 많았던 하정우는 “결국 작품이 끝나고 남는 건 흥행 스코어가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이 남으면 두 번째 기회, 세 번째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요즘은 폭염을 이겨내며 김용화 감독의 <신과 함께>를 촬영 중이다. 1부, 2부 두편을 연이어 찍느라 촬영은 내년 1월에나 끝날 것 같다고 한다. 내년에도 세편의 영화를 찍게 될 것 같다니, 그의 스케줄은 2017년까지 차 있는 셈이다. 쉬지 않고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가는 이 배우의 열정이 한여름의 열기만큼 뜨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