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로부터]
[노덕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예술, 예술가
2016-08-17
글 : 노덕 (영화감독)
일러스트레이션 : 이은주 (일러스트레이터)

또다시 한 시즌을 끝낸 <쇼미더머니>를 보며 블랙넛이 생각났다. 지난해 시즌 화제의 캐릭터였던 그는 바지를 내린 등장도 파격적이었지만 특유의 익살맞은 가사, 특히 처음 보는 종류의 펀치라인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었다. 시즌4의 주인공이라고 할 정도로 드라마도 탄탄했는데, 탈락과 합격을 번복한 심사위원들 바로 눈앞에서 디스랩을 한 순간은 전 시즌을 통틀어 개인적으로 꼽는 가장 힙합적인 명장면이기도 하다. 빛나는 재능에 유머감각을 겸비한 캐릭터는 충분히 인기몰이를 할 만했다. 하지만 그가 일베 회원이라는 주장과 과거에 발표했던 곡들의 성희롱적 요소가 논란이 되어 비난이 일기 시작하더니 끝내 논란을 불식시키지 못한 채 그대로 프로그램은 막을 내렸다.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낸 예술가에게 실망스러운 인격을 발견했을 때 그의 작품을 어떻게 향유해야 할지 혼란스러워지곤 한다. 작품은 그것을 창작한 예술가와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일까. 훌륭한 작품은 쉽게 접할 수 없기에 예술가의 인격이 감상에 방해요소가 되는 건 안타까운 일이라 나의 경우 순전히 이기적인 이유로 철저히 분리하려 노력하는 편이지만, 이 노력 자체가 이미 감상에 영향을 받고 있음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아쉽게도 노출이 용이해진 시대라 사적인 정보가 점점 공용되는 마당에 예술가의 인격이 작품 평가에 영향을 미친다면 창작자는 또 다른 예술 활동의 일환으로 인성을 ‘연마’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또 우린 알고 있다. 훌륭한 작품이란 가식적이지 않은 솔직한 자기고백을 바탕으로 나온다는 것을. 물론 그것이 저질스러운 인격의 변명이 되진 않겠지만 애초 월급쟁이가 아닌 도박 같은 인생을 선택했다는 것 자체가 글러먹은 비상식의 증명 아니겠는가.

<아가씨>와 <곡성> 말고도 올해 칸국제영화제의 화제는 또 하나 있었다. 수잔 서랜던이 <카페 소사이어티>로 초청받은 우디 앨런을 공개 디스한 사건이다. 우디 앨런의 아동 성추행 의혹에 대해 “옳지 못한 일”이라며 “나는 그에 대해 좋은 얘기를 해줄 게 없다”고 잘라 말한 것. 충분히 근거 있는 비난이었다. 몇년 전 우디 앨런이 7살 때부터 자신을 성추행해왔다는 양녀 딜런 패로의 폭로가 있었어도 그에 대한 해명, 나아가 대가를 치렀다는 기사는 본 적이 없다. 여태껏 자신의 욕망을 행동에 옮기는 그의 지나친 솔직함은 <브로드웨이를 쏴라>(1993)처럼 종종 다른 형태로 나타났다. 풋내기 감독이 제작자 앞에서 “난 예술가다”라고 외치며 시작하는 이 영화는 결국 마지막에 사랑하는 이 앞에서 “난 예술가가 아니다”라고 고백하며 끝나, 스스로의 재능에 회의하는 나 같은 영화감독에게 깊은 공감의 카타르시스를 주었다. 하지만 딜런 패로의 폭로가 사실이라면, 그것은 예술가의 솔직한 자기고백을 넘어선 ‘범죄’의 영역이다. 예술에 대한 찬사로 가득한 아름다운 영화 <피아니스트>(2002)의 로만 폴란스키는 또 어떤가. 미성년자 강간 혐의로 수배를 받고 도피 행각까지 벌였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그들의 작품을 어떻게 평가하고 향유해야 하는 것인지, 실로 곤혹스러운 일이다. 그들의 범죄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간의 존엄성까지 포기했나 싶을 만큼 막장인 예술가는 도처에 있다. 그래서 요즘은 위대한 작품들이 성취해낸 것에 비해 그것을 창작한 자들의 진실을 발견하게 되면, 예술가란 그저 예술을 만들어내기 위해 도구화된 존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위대한 예술 뒤의 예술가는 비천한 존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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