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개봉한 영화를 엮어보자. 고종의 자녀들이 일본으로 (강제로) 건너가 고초를 겪고 있을 때(<덕혜옹주>), 일반 여성들은 위안부로 끌려가 끔찍한 수난을 당하고(<귀향>), 항일운동에 가담한 시인은 일본 생체실험의 희생자가 된다(<동주>). 해방이 되었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해 전대미문의 참상을 겪는다(<인천상륙작전>). 그들의 수난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는 ‘대중은 개, 돼지’라고 말하는 신문사 논설 주간과 대통령 후보와 재벌 회장이 이해관계로 똘똘 뭉쳐서 온갖 비리를 자행한다(<내부자들>). 또는 좀비가 창궐해 국민들이 수없이 죽어나가거나(<부산행> <서울역>), 평범한 가장이 부실공사로 무너진 터널에 갇혀 사투를 벌인다(<터널>). 이때 공권력은 좀비를 물리치기는 커녕 엉뚱하게도 그 괴물들을 피하려고 악전고투하는 국민들에게 물대포를 쏘며 결국 죽음으로 몰아가거나, 애초에 국민의 생명을 지켜낼 능력이 없다. 말하자면, 과거도 현재도 ‘헬조선’이다.
어떤 영화의 기묘한 마케팅
헬조선의 관객에게 영화는 무엇일까? 영화를 보러 가면 당장의 살인적인 무더위와 무시무시한 전기요금 누진제, 더 나아가 99% 앞에 놓인 삶의 불안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 한국 관객을 둘러싼 열악한 현실은 영화를 점점 더 ‘킬링타임용 상품’으로 소비하게 만드는 것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영화 흥행 전략의 키워드는 시각을 자극하는 스펙터클과 감정을 건드리는 신파로 집약된다. 정신없이 펼쳐지는 현란한 화면을 감상하다가 가련하고 딱한 처지의 인물들이 짜내는 신파에 눈물을 흘리다보면 두어 시간이 금방 지나가버린다. 여기에 스타 캐스팅과 코미디를 적절하게 버무리면 흥행은 따놓은 당상이다. 이미 흥행에 성공한 영화들이 증명했듯이, 이야기의 인과관계나 사건의 개연성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또 몇개의 대기업이 독점하고 있는 배급 시장에서는 한편의 영화가 1천개가 넘는 상영관에서 개봉하는 게 가능하다. 영화 마케팅 담당자들은 “여기에 홍보까지 받쳐주면 천만 관객 영화를 만들어내는 건 어렵지 않다”고 장담한다. 영화산업을 좌지우지하는 대기업들이 권력의 눈치를 보는 환경이 조성된다면 집권 세력의 입맛에 맞는 영화가 제작되고, 흥행에 성공할 수 있다.
<인천상륙작전>은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공영방송인 KBS에서 투자를 하고 대대적인 홍보까지 했다. 투자사 가운데는 CJ도 있다. 그 영향인지는 알 수 없지만 8월12일, 이재현 CJ 회장은 광복 71주년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의 배경인 한국전쟁은 <태극기 휘날리며>(2004)의 흥행 성공 이후 스펙터클과 신파를 버무린 블록버스터에 적합한 소재로 자리매김했다. 모두 반공영화로 분류할 수 있지만 두편의 차이는 시대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가장 큰 차이는 주인공의 설정이다.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진태와 진석 형제의 참전 동기는 애국심이나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이 아니다. 진석은 얼떨결에 전쟁터로 끌려가고, 진태는 오로지 동생을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 가계를 일으키게 하려고 목숨 걸고 싸운다. 강제규가 이전 시대 반공영화의 도식을 답습하지 않은 이유는 시대착오라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10여년 뒤에 제작된 <인천상륙작전>은 1970년대의 반공영화가 때깔을 화려하게 바꾸고 부활한 것 같다. 여기에 애국심을 강조(강요?)하는 이른바 ‘국뽕영화’의 요소가 더 강화되었다. 독재 정권에서 그랬던 것처럼 애국심을 곧 정권에 대한 지지로 왜곡하지 않는다면 애국심의 강조가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박명림의 저서 <한국 1950: 전쟁과 평화>를 보면,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가 구상한 기습작전이 아니다. 미군은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 이미 전쟁이 발발할 시에는 한반도의 상당한 지점까지 후퇴했다가 인천에서 다시 상륙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미군은 상륙작전을 오래전부터 준비했고, 북한은 그것을 거의 알고 있었으나 정확한 날짜를 알지 못해 방어에 실패했다.
그러므로 <인천상륙작전>에서, 맥아더가 모두의 반대 속에 심지어 성공 확률 5천분의 1의 상륙작전을 계획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이 영화는 작전의 성공 뒤에 국군의 헌신적인 희생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맥아더를 영웅으로 부각하기 위해 한국전쟁에 관한 연구 성과를 완전히 무시한다. 참모총장이 “정치적인 야심 때문에 한국전쟁의 승리를 원하는 것 아니냐”고 질문하자, 맥아더는 “참호에 혼자 남은 한국의 소년병을 만났을 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나라를 지켜주기로 결심했다”라고 대답한다. 이 장면은 마치 불쌍한 어린 양을 마주한 예수의 일화처럼 보인다. 맥아더를 연기한 리암 니슨의 클로즈업으로 시작한 이 영화는 맥아더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변호하면서 영웅 만들기에 매진한다.
<명량>(2014)에서, 이순신은 강철처럼 단단한 장군으로 귀환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고문의 후유증과 병마에 시달리는 노인의 면모를 드러냈다. 그런데 왜 2016년에 미국의 장군 맥아더는 이순신 장군조차 해내지 못한 완전무결한 영웅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야 하는가? 맥아더가 북한의 침략에서 남한을 구해준 것처럼, 사드가 북한의 미사일 공격에서 남한을 방어해줄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것일까?
<인천상륙작전>은 제작기간이 촉박했는지, 감독의 역량이 부족했는지, 비슷한 장르의 영화에서 가져온 설정과 장면이 너무 많다. 스펙터클과 신파 장면은 대부분 어디서 본 것 같다. 특히 마지막 장면의 연출은 이재한의 이전 영화 <포화 속으로>(2010), 김학순의 <연평해전>(2015)과 거의 동일하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은연중에 보수의 욕망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국군 장학수는 북한군 림계진(이 경우처럼, 이상하 게도 한국영화에 등장하는 북한 사람은 동일하지만 남북한에서 다르게 표기되는 성을 갖고 있다)에게, “뿌리는 썩고 있는데 열매가 열리겠는가?”라는 말에 선동당했으며, “공산주의자들이 다 같이 잘 살자고 주장하는 평등은 이상적인 구호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 말이 왜 선동이며, 평등은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현재 한국 사회는 뿌리부터 썩어가면서 흙수저가 유행어가 될 정도로 불평등이 점점 심화되고 있는 게 가장 큰 문제 아닌가? 그러므로 이 장면에서 “99%의 민중은 개, 돼지와 같다. 어차피 다 평등할 수는 없기 때문에 신분제를 공고화해야 한다”는 나향욱 전 정책기획관의 말이 떠올랐다. 아마도 1%가 가장 싫어하는 말은 평등이며, 가장 혐오하는 세상은 평등한 세상일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천달중이 같은 국군인 오대수를 끝까지 도련님으로 모시며 봉건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인간적인 도리를 다하는 미덕처럼 그려진다. 오대수 역할은 국회의원 김무성의 아들 고윤이 맡았는데, 어처구니없게도 ‘뉴스엔’은 ‘<인천상륙작전>, 진짜 도련님 고윤을 아시나요?’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초호화 카메오로 뉴스거리가 된 출연자 가운데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배우 심은하와 국회의원 지상욱의 두딸도 있다. 여기에 더해 이 영화의 마케팅에 누가 일조 했는지 되돌아볼 만하다.
헬조선의 연원을 찾아서
헬조선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전쟁과 분단을 거쳐 일제강점기에 이른다. 바로 <덕혜옹주>에서 다루는 시대이다. 덕혜옹주는 고종의 막내딸로 태어난 실존 인물이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베스트셀러 소설에 적합하게 각색되었고, 소설은 다시 흥행영화의 도식에 맞추어 각색되었다. 흥행 코드인 스펙터클과 신파를 최대한 부각하고 여기에 투자에 도움이 되는 국뽕까지 버무려넣는 방향으로 각색되면서, 몇 가지 널리 알려진 사실을 제외하면 영화의 덕혜옹주는 실존 인물 덕혜옹주와 많이 다른 인물이 되어버렸다. 원작에도 없는 설정을 몇 가지 들어보면 덕혜와 영친왕이 김장한 등의 도움으로 일본을 탈출하려고 시도하는 장면, 덕혜와 궁녀 복순이 헤어지는 장면, 덕혜가 일본에서 핍박 받는 한국인 노동자들에게 연설하는 장면, 해방이 되자 덕혜가 딸 정혜를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하다가 입국금지를 당하는 장면 등이 있다. 이 장면들은 현란한 스펙터클과 스릴을 만들어내고 눈물을 흘리게 하고 애국심을 자아내면서 흥행을 견인했다.
이러한 각색에서 덕혜옹주는 시대의 희생자이자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애국자로 다시 태어났다. 옹주의 신분으로 거의 평생을 가련하게 살아가야 했던 여성의 삶은 이렇게 소비된다. 팩션영화는 이미 하나의 장르처럼 자리잡았지만, 실존 인물과 그 삶을 이렇게 완전히 왜곡해도 괜찮은 것일까? 그녀를 미화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없는 것일까?
허진호는 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1998)에서, 주인공 정원이 불치병에 걸려 죽어가는 이야기를 그렸다. 그러나 이 영화는 눈물 없이 끝까지 담담하게 정원의 마지막을 지켜본다. 정원이 자식의 병을 알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비디오 사용법을 알려주는 장면이나 좋아하는 여성과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장면에서조차 어디에도 신파는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신인감독 허진호의 새로움이었고 호평의 원동력이었다.
그런데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올해 한반도를 둘러싸고 미국과 중국, 일본과 러시아가 각축전을 벌이는 조짐을 두고 구한말과 비슷하다는 말이 많이 나돈다.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 <덕혜옹주>는 마치 제시간에 도착한 영화 같지만 역사의 사실에는 무관심하다. 다시 말해 이 영화도, <인천상륙작전>도 팩션의 미명 아래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도련님과 하인의 봉건적 관계를 긍정하고, 덕혜옹주와 왕실을 미화하는 영화들, 스펙터클과 신파와 국뽕으로 치장한 영화들이 다만 오락거리로 소비되고, 현실의 문턱을 넘어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문턱을 넘으면 그들이 바라는 대로 건국절이 진짜 역사가 될 수도 있다.
P.S. 두편의 ‘국뽕영화’를 다루다보니 그 대척점에는 천만 관객 영화가 된 <부산행>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영화조차 신파를 완전히 피해가지는 못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마지막이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임신부와 어린 소녀가 이중, 삼중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중무장한 군인들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은 전쟁영화의 한 장면 같다. 여기서 좀비로부터 안전하게 남은 유일한 지역이 왜 부산인지에 대한 해답을 얻었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 지역은 인민군에게 점령되지 않은 유일한 곳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던 시기에 낙동강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해석해보니 <부산행>은 한국전쟁을 좀비영화로 끌고 온 결과물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인민군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남쪽으로 후퇴했던 것처럼, 좀비의 습격을 피해 국민들은 필사적으로 부산으로 향한다.
연상호가 임신부와 어린 소녀만 남겨놓을 때, 가부장(제) 없는 새로운 세상을 전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 앞에는 중무장한 군인들이 버티고 있으며, 여차하면 좀비로 취급해 총을 발사할 것만 같다. 그들의 운명은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오락가락한다. 마치 우리가 처한 곤경을 은유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