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0여년 동안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걸걸하고 거친, 그러나 자신이 해야 할 일에 관해서는 강인한 ‘남자’에 관한 영화들을 양산해왔다. 이스트우드가 창조한 주인공들은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낸 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고, 임무를 수행한 뒤 조용히 사라진다. 과묵하고 신비로운 이 인물들은 금욕적이고 정의와 책임감을 구현한 존재들이다. 요컨대 그들은 ‘인간’을 넘어선 ‘신화’다.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이하 <설리>)은 이러한 전형의 주인공을 제시한다.
<설리>는 2009년 1월15일 양 날개를 잃고도 뉴욕 허드슨강에 안전하게 비상착수한 US 항공기 1549편의 실화에 기초한 이야기다. 당시 비행기를 몰았던 기장 체슬리 설렌버거(톰 행크스)는 장인적인 직관과 연륜, 담대함으로 155명의 승객을 모두 생환시켜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했다. 리먼 브러더스 사태로 인한 경제위기, 테러와의 전쟁으로 미국이 시름에 빠져 있던 시절에 일어난 일이다. 영웅의 탄생 또는 귀환을 바라는 미국인들의 염원 앞에 그보다 완벽한 기적은 없었다. 그러나 할리우드의 또 다른 장인이자 전설인 이스트우드에 의해 각색된 기적은 극적인 인간승리 드라마를 격렬하고 황량한, 트라우마와 악몽에 관한 정치적 서사로 변모시킨다.
난세(亂世)의 영웅, 설리는 누구인가?
<설리>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마지막 영화가 될 일은 없을 테지만,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 영화는 그의 커리어에 대한 요약이라고 할 수 있다. <설리>는 <추악한 사냥꾼>(1990)처럼 영화 만들기의 윤리학에 대한 것이자, <아버지의 깃발>(2006)처럼 미디어의 허구적 영웅 신화를 꼬집는 이야기고, <체인질링>(2008)처럼 시민과 정부의 남용된 권위를 비판하며, <용서받지 못한 자>(1992)처럼 문명화된 세계에서 고립되어가는 영웅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설리>는 미국의 신화를 한땀한땀 찢어놓았던 전작 <아메리칸 스나이퍼>(2014)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웅 신화를 해체하는 성찰적인 현대 서부극으로서 <아메리칸 스나이퍼>와 달리 <설리>는 진정으로 인간적인 영웅의 이야기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설리>에서 추구하는 것은 영웅주의의 본질이다. 주인공 설리는 이스트우드의 영화에서 익숙하게 보아온 영웅성을 품은 인물이다. <포레스트 검프>(1994)와 <스파이 브릿지>(2015)의 영웅주의를 형상화했던 톰 행크스가 설리를 연기한다. 항공기 사고사(史)에서 위대한 기적 중 하나를 재창조한 영화로 받아들여지면서 박스오피스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설리>는 그러나 한 시간 반 동안 설리의 용기와 비행능력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초점은 다른 곳에 있다. 의심의 여지없는 이 영웅 스토리에서 갈등은 어디 존재하는가? 순수하고 빛나는 영웅으로 미디어에 의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설리의 이야기를 서사화하는 데 있어 이스트우드는 휘황하게 포장된 미디어의 영웅 신화를 산산이 부수고 그 비극적 본성을 화제 삼는다. <설리>의 내러티브는 명과 암을 오가지만 상당 분량은 국가운수안전위원회의 조사를 받으면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는 설리의 내면에 맞춰져 있다.
<설리>의 오프닝 시퀀스는 이같은 이야기의 성격을 명확하게 신호한다. 영화는 문제가 생긴 비행기를 비상착륙하는 순간 설리의 헤드셋에서 들리는 음성의 보이스 오버 사운드로 열린다. 이어서 우리가 처음으로 보게 되는 것은 검붉은 화염을 뿌리며 뉴욕의 도심 한복판으로 추락하는 항공기다. 명백하게 9·11의 비전을 연상시키는 오프닝 시퀀스로 인해 <설리>는 무엇이 오늘날 미국의 재앙을 야기했는가에 대한 정치적인 이야기가 된다. 이스트우드는 자신의 끈질긴 테마 중 하나인, 흔들리는 ‘주체성’에 관한 이야기로 영화를 끌고 간다. <설리>는 시종 설리가 영웅으로 추대되는 성공적인 비상착수 장면보다 오프닝 시퀀스로부터 반복되는 악몽의 비전을 우위에 둔다. 이스트우드는 인간적 연약함을 드러내는 설리의 내면을 파고듦으로써 설리가 한 영웅적 행동이 그가 상상하고, 느끼고, 알고 있는 것과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암시한다. 피해갈 수 있었던 궤멸에 대한 악몽과 같은 상상을 한 후 설리는 호텔 화장실에 서 있다. 김이 서린 거울을 닦으며 그는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질문은 설리가 TV 카메라 앞에 섰을 때, TV에 나온 자신을 바라볼 때, 공동체의 영웅으로 추대되었다가 연방정부로부터 의혹에 가득 찬 조사를 받을 때 서서히 증폭된다. 조사의 배후에는 연방정부와 보험회사의 이해관계가 개입되어 있다. 만약 실수가 입증된다면, 설리는 즉각적으로 은퇴하고 자신의 집을 잃게 된다. 과연, 설리는 누구인가?
설리의 내면적 갈등과 공적 이미지 사이의 신랄한 대조는 영화 내내 환기된다. 그가 국가운수안전위원회 조사에 의해 제기된 의문을 아내에게 고백하면서 “내가 이 모든 걸 날려버리면 어쩌지?”라고 말할 때 아내는 “뉴스를 봐, 당신은 영웅이야”라고 말한다. 직업과 명예, 집을 날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그를 괴롭히고 공적, 사적으로 분열된 영웅의 딜레마는 해결불가의 상태로 보인다. 영웅주의는 <설리>에서 이스트우드가 고수해온 정치적 신념을 조명하는 결절점이다. 이 영화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설리가 보였던 기민한 행동 또는 그가 가지고 있었던 의심에 대한 극적 강조보다 조사를 받으며 고통당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 측면에서 <설리>의 영웅주의에 대한 조명 방식은 상처받은 남성성의 서사에 대한 이스트우드의 오랜 애호를 이어받고 있다. 이스트우드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뿐 아니라 급작스러운 유명세로 괴로워하는 설리를 반복적으로 묘사한다. 미디어로부터 승인된 우리의 영웅은 기자들의 극성에 몸살을 앓고, <데이비드 레터먼 쇼>에서 광대처럼 헛헛한 웃음을 지어야 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정치학
<설리>는 이스트우드 자신의 정치적 상상력, 시민의 의무에 대한 그의 생각, 다수의 행복을 위해 나눠야 할 책임, 서로 연결된 공동체의 운명에 대한 관념 따위에 토대를 둔 영화다. 조각난 기억과 환각으로 채워진 기나긴 설정 이후 이스트우드는 비로소 비행기에 발생한 문제와 불시착의 과정, 경탄스러운 구조과정을 묘사하기 시작한다. 구조 장면에서 이스트우드는 보편적 영웅주의를 강조하기 위해 카메라의 초점을 분산시킨다. ‘골프 비상사태’를 주장하면서 비행기에 탑승한 세명의 승객과 비상착륙 시 매뉴얼을 또박또박 이행하는 여승무원, 위기에 대처하는 승객들, 조종실을 크로스커팅하면서 이스트우드는 “모두 같이 해낸 겁니다”라는 설리의 말을 강조한다. 상호적이고 집단적인 책임이라는 거대한 부담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모든 사람들에 의해 지탱되는 것이다.
<설리>에서 주목해야 할 장면 중 하나는 설리의 비행기가 허드슨강이 아닌 라과디아 또는 테테르보로 공항으로 회항할 수 있었는지를 입증하기 위해 시행하는 국가운수안전위원회의 청문회 시뮬레이션 시퀀스다. 극의 절정부에 해당하는 이 시뮬레이션 장면을 이스트우드는 가상 비행을 실행하는 파일럿의 등 뒤에서 찍었다. 남녀 파일럿 커플의 얼굴은 가려져 있고 카메라를 등진 두 사람은 로봇처럼 단조로운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위원회의 조사와 판단은 설리의 위기대처 방식에 대한 조사위원의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추정된 기준들을 따른다. 무감동한 자동인형처럼 행동하는 조종사들의 시뮬레이션은 설리에 의해 보기 좋게 반박당한다. 그는 자신의 결정을 이끌었던 것은 기계적인 침착함이 아니라 공포와 긴장, 당혹 등 ‘인적 요소’를 경유한 직관이었다고 주장한다. 이 한마디로 설리는 ‘무모했다’는 관료적인 책임전가를 피해간다. 설리는 모든 인간성을 제거한 비행 시뮬레이터들에 의존한 조사의 허망함을 폭로한다.
흥미로운 것은 위기 순간에 엄습하는 공포, 긴장과 마찬가지로 42년간의 체험과 관록에서 나온 ‘직관’ 역시 ‘인적 요소’라는 점이다. 이스트우드는 여기서 문명과 개인의 관계를 다시 한번 화제에 올린다. 알고리즘과 컴퓨터 시뮬레이션이라는 기계적이고 계량화된 기준은 문명화된 세계의 신념이다. 문명이나 과학, 이성, 합리의 기준으로 설명되지 않는 설리의 직관은 짧은 망설임 뒤에 155명의 승객을 회생시키는 결정으로 이어진다. 이스트우드는 무뢰한과의 결투에서 권총을 빼는 ‘타이밍’을 몸에 익히고 있는 총잡이의 능력에 비견할 만한 설리의 직관을 찬미한다.
이스트우드의 퀴퀴하지만 거대한 비전 안에서, 영웅주의는 돈이나 명예, 승인의 욕구와는 무관하다. 철옹성과 같은 이 세계관은 ‘마지막 위대한 웨스턴’이라고 할 수 있는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이스트우드가 연기하는 냉혈한 킬러 윌 머니가 부패한 보안관 리틀 빌 대거트(진 해크먼)에 대항해 전쟁을 벌임으로써 돈벌이에 혈안이 된 기회주의, 개인적 복수와 결별한 이후 줄곧 유지되어온 신념이다. “해야 할 일을 하라”는 주문은 축적된 경험과 연륜 안에서 공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권리가 아닌 의무에 기초한 풀뿌리 정치의 가치를 앞세우면서 이스트우드는 개인의 운명과 이해관계가 공동체의 그것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지도를 그린다.
법의 영역 바깥에서
<설리>는 이스트우드의 고전주의적인 접근이 정치적 신화를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단일한 정치적 원칙을 가지고 있다. 그는 법 바깥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장인적인 능숙함을 지닌 개인의 가치를 역설한다. <평원의 무법자>(1973), <무법자 조시 웰스>(1976), <용서받지 못한 자>, <그랜 토리노>(2008)는 법의 바깥에 놓여 있지만, 문명화된 미국의 풍경 안에서 피 흘리며 정의를 수호하는 주인공들에 초점을 맞춘다. <설리> 역시 강력한 개인주의와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 집산주의의 대결이라는 구도 위에 구축되었다. 설리는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문명과 타락한 제도의 시스템 바깥에서 투쟁해야 하는 영웅이다.
<설리>에서 이스트우드의 탐구욕은 좀더 큰 것, 좀더 본질적인 쪽을 향한다. 허드슨강의 비상착륙과 그 일사불란함으로 감동을 주는 인명구조 과정이 상세하게 묘사되기는 하지만 <설리>의 본론은 비행 그 자체가 아니라 법과 제도, 행정, 관료주의라는 화두다. 이 영화는 털끝만큼의 경험도 없이 펜대만 굴려대는 공허한 관료들에 의해 파괴되어가는 실제 삶의 영웅을 조명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화급한 비상착륙의 순간 설리는 그 자신의 경험과 직관에 따라 첫 번째가 아닌 열다섯 번째 비상 매뉴얼을 실행한다. 이와 관련해 젊은 파일럿 시절부터 공군 조종사로 활약한 시절에 이르기까지 경험과 기질적인 특성을 훑으면서 설리의 내면을 자유분방하게 묘사한다.
법과 제도, 과학, 이성이라는 신화의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아둔함을 폭로하면서 이스트우드는 ‘법의 영역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의 역할을 강조한다.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강인한 미국식 남성성과 불가항력적인 폭력간의 관계를 탈신화화함으로써 이런 신념을 정당화한다. 대중으로부터 받은 압도적인 흠모에도 불구하고 설리는 산술적인 알고리즘과 시뮬레이션, 문명화된 제도의 주문에 결박당한 고독한 인물로 그려진다. 이스트우드는 설리를 둘러싼 모던하고, 물질 중심적이고, 정중해 보이지만 실상은 위선에 찬 세계와는 대조적으로 낡았지만 인간적이고, 공동체의 활기가 남아 있는 세계를 소망한다. 남성적 활기가 흘러넘치는 이러한 세계 안에서 쩨쩨한 관료주의에 비난당하는 모든 사람이 영웅이 될 수 있다(“여기도 저기도 설리가 있다”)고 이스트우드는 이야기한다.
<설리>는 현대 미국을 문맥 위에 재편성한 이스트우드의 스크린전설이다. 그것은 황폐화된 문명세계에 경종을 울리는 영웅담이자 미국이라는 신화적 공동체의 복원을 염원하는 이야기다. 이 영화에서 무엇이 ‘미국의 악몽을 가져왔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이스트우드의 진단은 명확해 보인다. 비상착수와 구조가 무사히 끝난 뒤 설리의 동료는 “뉴욕에 이런 좋은 소식은 오랜만이야. 특히 비행기 관련해서는”이라고 말한다. 사건의 재구성 과정에서 이스트우드는 화염을 뿜으며 창문 바깥으로 곤두박질치는 비행기를 바라보는 마천루의 사람들로 커팅한다. 이 장면은 또 다른 9·11을 상상하는 미국인들의 반응을 보여준다. 그들은 악몽을 보고 있는가?
<설리>는 서부극이 아니고, 체슬리 설렌버거는 신출귀몰한 총잡이가 아니지만 이것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항상 해오던 이야기다. 이스트우드는 오늘날의 미국을 재난 상황으로 인식한다. 경제위기와 테러, 관료주의가 만성화된 황량한 이 공동체를 구원할 영웅들은 고초에 가까운 액션을 수행함으로써 공동체의 위기를 극복하고 구성원들을 단일한 대오로 통합한다. <설리>를 보고 최후에 뇌리에 남은 것은 비상착수를 재구성하는 장면에서 조종석 내부로부터 설리의 의식을 밀고 들어오는 하나의 기억이다. 조종실, 설리의 손가락 아래엔 고도 하강용 버튼이 놓여 있다. 공동체의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지도자에게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그 버튼을 누를 수 있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이스트우드의 결론은 보수주의자의 시각에서 본 미국의 회생이다. 그러니 이스트우드가 도널드 트럼프에게 투표할 것인지는 관심 밖의 일이다. <설리>에서 노인 이스트우드는 마땅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