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감이 감도는 결연한 눈, 굳게 다문 입술에 검은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고집스레 산을 걷는 중년의 여인. 조민수가 연기한 정옥은 생때같은 아들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다. 그녀는 시나리오를 보고 단박에 정옥이 세월호 유족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래서 더 하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위로를 줄 수 있는 영화라면 환영이었다.” 늘 캐릭터의 전사와 배경을 상상해 연기하는 그녀지만, 이번 영화에선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도 없었다. “정옥의 전사는 이미 누구나가 많이 봤지 않나. 매일 아침 눈뜨면서 TV에서 본 뒤집힌 배의 모습과 유족의 모습들…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정옥이 된 그녀는 한여름에 지리산에서 뛰고, 넘어지고, 구르느라 풀독이 오르고 땀띠가 났지만 개의치 않았고, 연기를 할 때마다 무척이나 울었다. “정옥의 아픈 마음을 품고 있는 게 힘들더라. 자꾸 눈물이 흘러 자제해야 했다. (웃음)”
그녀가 <미행>에서 가장 마음에 든 점은 “공권력이 약자와 약자끼리 싸움을 붙이는” 현 사회를 적확하게 반영한 지점이었다. 정옥을 쫓아온 재원(서준영)은 말단 경찰로, 그 역시 위기에 처해 있지만 상부의 지시로 지리산까지 그녀를 쫓아온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장면 중 하나는, 유족들 뒤에서 뒷짐지고 눈물을 떨구던 의경의 모습이다. 그 역시 가엾더라. <미행>은 재원이라는 캐릭터로 그런 구도를 잘 살려냈다.” 서사에 깊이 공감한 그녀는 영화의 제목도 제안했다. “자식을 잃었는데 이제는 아픔도 지겹다고, 소리내지 말라고 강요하는 게 현실이다. <미행>에서는 그들이 산속으로 숨어들어간다. 나는 영화의 제목이 ‘품’이었으면 했다. 영화가, 산이 그들을 따듯하게 안아주는 품이었으면 했기 때문이다.” 제목은 반영되지 않았으나 시나리오상엔 그녀의 아이디어가 다수 반영됐다. “정옥이 재원을 두고 떠날 때, 물병을 두고 가자고 제안했다. 정옥이라면 그럴 거다. 약자가 약자를 죽이는 결말은 되지 않았으면 했다.” 그녀는 그런 마음으로 직접 뜬 세월호 팔찌를 지인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어른이 잘못해서 아이가 다치거나 권력이 잘못한 일에 약자가 다칠 때, 상황을 직시하고 그들을 보호해줄 수 있어야 한다. 이 팔찌를 차고 있을 때만큼은 그 마음을 되새기길 바라는 마음이다.”
<관능의 법칙>(2013) 이후 영화 차기작으로 중단편인 <미행>을 선택한 그녀는 “장편과 단편, 상업영화와 예술영화를 가리지 않으려 한다”고 말한다. “각자 색이 다르니까. 완성도가 우선이고, 내가 그 안에서 잘 사용되어질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녀는 지난 1년 반 동안 매니지먼트 없이 활동하며 “기성의 느낌에서 벗어나 신인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도와주는 스탭 한명과 함께 다녔다. 배우들의 밴 사이에 경차를 주차하는데 이상하게도 너무나 유쾌하더라. 배우로서 내게 이런 포장과 대접이 당연시돼왔던 것은 아닐까 반성했다.” 그 과정에서 <미행>도 하게 됐다. “특별하고 고마운 기회였다. 시나리오도 좋고, 이송희일 감독과 김일권 시네마달 대표에 대한 신뢰도 있었다. 하지만 수익이 나긴 어려운 영화라 집에 가면 계산기를 두드릴 것 같아서 만난 그 자리에서 하겠다고 했다. (웃음)” 그녀는 아직 “성장통”을 겪고 있다. “가장 경계하는 건 나와의 약속을 어기는 거다. 이렇게 말해놓고 뒤에서 ‘갑질’하면 나쁜 사람이잖나. (웃음) 비겁하지 않은 멋진 어른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평행봉 위에서 균형을 잡듯 끊임없이 자세를 점검해보는 그녀는 지금도 멋진 배우, 그리고 멋진 어른임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