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 있는지 몰라서 그런 게 아니라 너무 잘 알아서 아무 말도 못하는 거예요.” 성범죄 피해자들이 공통적으로 토로하는 어려움 중 하나는 사안을 주변에 알렸을 때 돌아오는 주변의 방어적인 반응들이다. 피해자에게 일부라도 책임이 있다는 시선이나 사건을 조용히 덮고 넘어가고자 하는 집단의 분위기는 피해자를 두번 울린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상황에서 피해자들이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있는지에 대한 조언은 그래서 필요하다. 하지만 한편으론 피해자를 위한 가이드는 피해자에게 행동의 책임마저 미루는 건 아닌가 싶어 걱정스럽다. 피해를 입은 당사자가 사건 해결을 위한 방안까지 미리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건 ‘내 몸은 알아서 내가 지켜야 한다’는 냉혹한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어쩌면 이마저 우리 주변에 은연중에 깔려 있는 무책임한 시선의 일부인지도 모르겠다. 특히 영화계는 계약이 프로젝트별로 이뤄지는 등 직업적 특수성 때문에 성폭력상담소 등에서도 다루기 어려워 공식적인 신고 창구가 절실한 상태다. 하여 <씨네21>에서는 ‘피해자를 위한 가이드’가 아니라 ‘주변인들을 위한 행동 지침 가이드’를 통해 프레임을 바꿔보려 한다.
지인의 성폭력 가해 혹은 피해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이 다섯 가지를 명심하라
1.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다
가해자를 위한 변명을 하고 싶어 하는 주변인들이 “평소에는 참 좋은 사람” 혹은 “피해자의 평소 행실이 문제”라는 말로 논점을 흐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김홍미리 여성주의 연구활동가는 이에 대해 “성폭력 사건의 무서운 점은 주변 사람들이 가해자를 대하는 방식 때문에 2차 폭력이 일어난다는 점”이라며 “성범죄가 합의 가능한 사고가 아니라 처벌이 필요한 사건”이라는 인식 변화가 필요하고 지적했다.
2. 상황을 제대로 인식시키는 것이 먼저다
가해자가 쓴 사과문이 변명이나 자기 합리화의 창구로 활용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 경우 사과문 자체가 2차 피해를 유발하기도 한다. 사과의 대상을 정확히 하고 일반 대중이 아닌 피해자를 향한 사과가 이뤄질 필요가 있다. 당신이 가해자의 지인이라면, 사과문에 필요한 것은 육하원칙에 따른 사과 그 자체라는 점을 상기시켜줄 필요가 있다. 본인 스스로의 잘못을 숙고할 시간으로 삼도록 상황을 인식시켜야 한다. 용서를 전제로 한 사과는 사과가 아니다.
3. 가해자의 말만으로 중재에 나서지 않는다
당신이 지인의 가해 사실을 알았을 때, 다수의 성범죄에선 가해자쪽이 권력을 가진 경우가 많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행위를 정당화하고 싶은 가해자는 우정, 의리, 애정 등의 여타 관계로 주변을 포섭하려 하기 마련이다. 사적으로 들어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사건의 판단 근거로 삼아선 곤란하다. 당신이 주로 듣는 정보는 가해자의 입장에서 제공된 제한된 정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4. 피해자가 고립되지 않게 한다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 다수가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 중 하나는, 피해를 공론화한 이후 일터를 잃고 수입이 끊기는 일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피해자가 용기를 내지 못하는 건 주변과 여론으로부터 고립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이때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수 있다. 전문기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곁에서 응원이 필요하다. 성폭력상담소 등 관련기관에는 주변인이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알려주는 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다.
5. 남의 일이 아니다
성범죄가 사적인 일이라는 걱정에 목격자로 나서는 일을 어렵다거나 부담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성학자 권김현영은 “눈앞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나에게도 좋은 일이라는 의식이 필요하다. 본인이 영웅적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 못해도 좋다. 관심을 가지고 알려고 행동한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영화계 내 성폭력을 해결하는 첫걸음은 ‘찍는 페미’(여성영화인 페이스북 그룹)나 <걷기왕>의 성희롱 예방교육처럼 직접 나서는 태도다. 영화계 내 피해 시설을 신고하는 공식적인 창구도 조속히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