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주 감독의 <연애담>은 개봉(11월17일) 전부터 이미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의 영화였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시작된 영화에 대한 관심은 급기야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이르러 <연애담> 티켓을 구하기 위해 새벽 5시부터 줄을 섰다는 열성 팬들까지 낳을 정도였으니까. <연애담>은 두 여성 윤주(이상희)와 지수(류선영)가 서로에게 빠져들고, 보듬고, 또 그 사랑 때문에 아파하는 일련의 연애 서사다. 어찌보면 너무도 흔한 연애담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더 응원하고 싶어지는 건 아마도 페미니즘 이슈가 뜨거운 2016년 한국에서 만나게 된 이 레즈비언 멜로물에 대한 반색이 아닐까 싶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연구과정 8기 졸업작품 <연애담>으로 장편 데뷔한 이현주 감독을 만나 영화 안팎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전주국제영화제 때부터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이어 한국영화아카데미 작품을 상영하는 기획전 ‘KAFA FILM 2016: 넥스트 제너레이션’ 서울 상영 5회차 모두 이미 매진이다.
=다음 작품을 어떻게 해야 하나 싶다. (웃음) <연애담>은 작은 규모의 소소한 영화다. 몇몇 관객이 ‘이런 영화가 있었지’라고 기억해주면 좋겠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큰 관심을 받을 줄이야. 한편으로는 영화에 대한 기대치가 한껏 올라간 상태로 영화를 볼 관객이 혹여나 영화를 보고 실망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영화 같기만 한 영화도 있지만 <연애담>은 누구나 겪었을 법한, 자신의 과거의 한때나 내 친구의 이야기 같아서 좋아해주시는 것 같다.
-레즈비언 커플이 등장하는 단편 <바캉스>(2014)에 이어 <연애담> 역시 두 여성간의 사랑 이야기다.
=처음에는 <바캉스>처럼 조금은 코믹하고 유쾌한 두 여자의 이야기를 해볼까도 생각했다. 그러면서 자꾸 이것저것을 가져와 붙이게 됐는데 뭔가 껍데기만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장편 데뷔작이고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내가 만들고자 하는 영화를 적극 지지해주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만드는 게 맞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일부러 소동을 집어넣어 코믹하게 갈 것 없이 두 여자의 사랑 이야기로, 너무도 흔하고 지질한 연애담으로 가자고 마음먹었다. 잘 바꾼 것 같다.
-미대에서 졸업 전시를 준비하며 친구 집에 얹혀사는 윤주와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꾸려가는 지수가 사랑에 빠진다. 특별한 사건 없이 이들의 감정이 움텄다 사그라드는 과정의 영화다.
=연애 혹은 사랑의 감정이라는 건 대체로 다들 그게 뭔지 이미 다 알지 않나. 어떻게 하면 관객이 지루해하지 않으면서 이 영화를 끝까지 보게 하느냐가 과제였다. ‘이쯤 되면 이 인물이 상대에게 화를 내야 하는데, 이쯤 되면 뭘 해야 하는데’라며 일일이 설명해주고 싶은 욕심도 물론 있었다. 그런데 그건 누구나 다 아는 감정이고 상황이라 생략했다. 대신 두 여자의 사랑만큼은 그동안 한국영화에서 많이 본 적이 없으니까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세세히 그렸다. 둘이 어떻게 만나서, 어떻게 서로에게 끌리게 됐으며, 어떻게 아파하는지. 이런 구성이 내겐 일종의 모험이었다.
-주인공들의 연애는 어느 순간 여성간의 연애라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조심하고 거짓말하며 맞아도 아닌 척해야 할 때가 있다.
=레즈비언 커플은 비가시화된 존재 같다. 어디에나 있는데 어디에도 없다. 영화에서 여자들간의 사랑을 그리는 방식이 여전히 ‘사실은 그랬어’라는 반전처럼 쓰이거나 성적인 눈요기로 그려진다. 개봉까지 하는 영화 편수도 많지 않다보니 <연애담>이 나왔을 때 반가움이 큰 것 같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2013), <캐롤>(2015)을 통해 먼 나라 이야기였던 여성간의 사랑에서 현재와는 다른 시대상과 판타지적 세계를 그린 <아가씨>)2016)를 거친 뒤다. <연애담>은 내 주변에서도 볼 법한 지금의 현실에 보다 가까이 온 영화라고 생각해주시는 것도 같다. 관객 중에는 “좋은 영화를 만들어줘 고맙다”고 말씀하는 분도 있다. <연애담>은 되게 부족한 영화인데 왜 ‘이’ 영화가 아니라 ‘좋은 영화’라고 할까 생각해본다. 아무도 선뜻 말하려 하지 않은 이야기를 해줘서 고맙다는 의미가 아닐까. <연애담> 이후에도 여성간의 사랑을 그리는 영화를 계속 만나길 바라면서 말이다.
-친구 집에 월세를 내고 살던 윤주는 연애를 시작하면서 지수의 자취방에서 사랑을 나눈다. 지수가 아버지의 집으로 가게 된 후 윤주와 지수가 모텔에 잠시 머물게 되면서는 이들의 관계에도 변화가 생긴다. 연애와 주거, 직업적 불안정성이 높아진 20, 30대 여성들의 사랑을 보는 듯도 하다.
=연애에 대한 묘사 못지않게 지금 여기 사는 20, 30대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싶었다. 나 역시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혼자 살면서 의식주를 해결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 윤주와 지수가 어느 공간에 있느냐에 따라 이들의 상태를 설명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여러 공간을 거쳐 윤주가 모든 걸 정리하고 자신만의 공간을 찾게 된다. 윤주는 지수와의 연애로 자신의 마음과 상황을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연애담>은 윤주의 성장담이다.
-음악을 거의 쓰지 않은 것도 그렇고 인물의 감정을 더 많이 보여주기보다는 의도적으로 누르거나 생략해버린다. 영화의 담담한 정서를 만드는 데 일조할 뿐 아니라 그래서 오히려 두 사람의 감정과 표정에 집중하게 만든다.
=감정을 설명하는 게 사랑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따라가지 못할 것 같았다. 배우로서는 굉장히 힘들었을 거다. 손진용 촬영감독이 오죽하면 ‘이 영화는 시나리오 1, 배우 9의 영화’라고 했을까. (웃음) 사건을 좇거나 감정을 폭발하는 것 하나 없이 감정을 꾹꾹 눌러야 했으니. 특히 성격상 지수보다는 속으로 감정을 담아두는 윤주가 더 그랬을 테니, 이상희 배우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거다.
-두 여성간의 조화를 고려한 캐스팅이 관건이었겠다. 이상희 배우는 <바캉스>때 한번 호흡을 맞췄고 류선영 배우는 주연으로 참여하는 첫 장편영화다.
=두 배우는 성격도 연기 톤도 전혀 다르다. 상희씨는 다른 일을 하다가 연기가 하고 싶어서 배우가 됐고 섬세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 탁월하다. 선영씨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연기를 배웠고 연극적인 힘이 있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을 한 화면에 담을 때면 서로 감정이 터지는 지점이 미묘하게 달랐다. 상희씨는 정확한 디렉션을 선호하고 계획을 세우며 쭉 해나간다면, 선영씨는 함께 만들어가는 걸 좋아한다. 선영씨와 지수가 많이 닮아 영화에 최대한 녹이려 했다. 말하지 않고 가만히만 있어도 영화가 되는 상희씨의 표정을 내가 정말 좋아한다. 특히 장편 연출이 처음인 내게 장편영화 경험이 있고 안정적인 연기를 하는 이상희 배우는 든든한 동반자였다.
-다음 영화에서도 계속 연애 이야기를 쓸 건가.
=내가 아는 모든 연애 얘기와 상상력을 <연애담>에 다 쏟아부었다. (웃음) 다시 한다면 이제 막 사랑으로 내가 누군지 조금 알게 된 인물이 나온 <연애담>과 달리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려야만 얻을 수 있는 사랑, 그런 강렬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쉬운 사랑 이야기는 마음이 잘 안 간다. 윤주가 설렜다가 좌절했다가 하는 전 과정이 내가 이 영화를 만든 과정과 똑같다. 이 영화가 장편으로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정말 설렜고 막상 만들면서는 완성되지 못할 것 같았으나 이렇게 개봉까지 하게 됐다. 내겐 첫사랑과도 같은 영화다. 그래서인지 <연애담>이 누군가에게도 과거의 자신을 떠올려보게 하는 영화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