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대중문화의 심장. 오타쿠 담론의 아버지. 만화 원작자이자 비평가인 오쓰카 에이지(大塚英志)가 한국을 찾았다. 계간 <문화/과학> 주최로 열린 한·중·일 심포지엄 ‘동아시아 권역의 디지털 부족과 청년문화’와 ‘사회적 재난 이후 동아시아 청년문화의 새로운 흐름’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1980년대 잡지 편집자로서 오타쿠 담론을 처음 세상에 내놓은 장본인인 그는, <오타쿠의 정신사>와 <이야기 소비론> 등 수십여 권의 저서를 펴내면서 대중문화 담론을 주도해왔다.
한국에서 오쓰카 에이지는 1999년부터 한국판 월간 <뉴타입>에 연재된 소설 <사이코>로 처음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본에선 30권 넘는 사상서와 비평서, 이론서가 출판되었으나 이런 것들이 한국에는 전혀 소개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만화 작법과 스토리 작법을 논한 실용서만 여러 권 국내에 번역, 출간되었다. 이는 오쓰카 에이지가 소비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우익으로 치닫는 일본 사회와 천황제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몇 안되는 지식인이지만 오타쿠 코드로만 언급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심포지엄에서 그는 대중문화가 아니라 청년문화와 사회적 재난에 대해 얘기했다.
현재 그는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교수로 재직하면서 각국 어린이와 젊은이를 대상으로 만화와 이야기 작법을 강의 중이다. 그에게 ‘이야기’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는 열쇠다. 대중문화 연구자 김일림이 한국을 찾은 오쓰카 에이지와 대담을 나누었다. 방대한 주제를 대중문화 프레임으로 압축하는 그의 힘은 구술로 한층 힘차게 전해졌다. 한정된 지면으로 인해 대담의 일부만 게재한다.
-한국과 처음 작품으로 관계를 맺은 것은 소설 <사이코>가 애니메이션 잡지 월간 <뉴타입>에 연재되면서인 듯하다. 한국과는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가.
=해외 판권은 출판사에 맡기고 있기 때문에 어떤 작품이 어느 나라에서 출판되는지는 솔직히 기억하지 못한다. 한국과의 관계라기보다 개인적으로 인연을 맺고 있는 소수의 지인이 있다.
-만화를 직접 그리기도 하고, 만화 원작자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또 잡지 편집자이자 교사였으며 현재는 교수, 비평가이다. 본인의 정체성을 뭐라고 보나.
=나는 계속 만화 원작자라고 자칭해왔다. 나는 만화 원작자 외에 자칭해서 내 신분을 밝힌 적이 없다. 만화 원작자 안에 비평적인 것이 포함되어 있다. 나는 그걸 구별하지 않는다.
제1세대 오타쿠 문화는 일종의 문화적 파시즘
-흔히 일본의 학생운동 세대는 일본 대중문화를 주도한 주체로 언급된다. 1980년대 일본 대중문화 현장에 그들은 어떠한 방식으로 종사하고 있었나.
=학생운동에서 패배한 사람들이 서브컬처 업계와 광고업계로 들어가서, 정치운동에서 해체할수 없었던 위계질서(Hierarchie)를 문화 영역에서 새롭게 구축했다. 서브컬처를 치켜세움으로써 기존의 권위를 부수자는 문화대혁명을 수행했다. 문화대혁명기의 홍위병 역할을 성공적으로 담당한 것이 당시의 오타쿠 제1 세대다. 이것이 오타쿠에 대한 바른 역사적인 평가이다.
-홍위병은 부정적인 의미다.
=그렇다. 부정적인 의미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타쿠 문화는 일종의 문화적 파시즘이었다.
-1990년대의 한국 사회는 전공투 세대가 추구한 민주주의 가치에 동질감을 느꼈고, 그로 인해 반일감정을 극복하고 일본 대중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런데 <건담>의 캐릭터 디자인을 한 야스히코 요시카즈는 전후 민주주의 작가로 알려져 있음에도 만화 <무지갯빛 트로츠키>에서 국수주의적인 내용을 담는다. 그런 작가들이 많이 보인다.
=모두 전향했기 때문에 그건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모두 보수주의자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1980년대 일본 사회에서 오타쿠는 확실히 마이너리티였다. 그러나 지금은 더이상 마이너리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나.
=맞다. 오타쿠 문화는 일본의 야후 뉴스를 보면 알 수 있다. 애니메이션 성우의 결혼이 야후 뉴스의 톱을 장식한다. 애니메이션 성우가 결혼한다고 해서 세계가 변하진 않는다. 그래도 크게 보도된다. 아키하바라 문화가 마치 일본 문화를 대표하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고. 그래서 지난번 아베 수상이 슈퍼마리오 퍼포먼스를 한 거나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가 코스프레를 한 거, 이상하지 않은가. 지금 일본이 벌이고 있는 쿨재팬은 무척 바보 같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즈마 히로키나 미야다이 신지 등 쿨재팬 담론을 주도하는 이들과 대담집을 여럿 냈다.
=그건 출판사의 기획이었다. 이따금 참여했을 뿐이다. 다들 대담집은 두세권씩 내고 있다.
-저서 <감정화하는 사회>에서 수용자의 윤리성을 강조했다. 일본 오타쿠 문화에서 수용자의 윤리성은 어떻게 변해왔다고 보나.
=우선 수용자는 ‘유저’라고 불림으로써 보다 쾌적한 환경을 권리로서 추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창작자나 발신자는 낮은 수준에 맞춰서 모든 것을 다시 만들어야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발신에 대해 전혀 책임지지 않게 되었다. 애초 책임이라는 개념을 가지지 않는 인간이 발신권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을 제한하거나 혹은 리터러시(쓰고 정보를 다루는 능력)로서 키워가는 틀이 제공되지 않고 있다.
-<오타쿠의 정신사>에서 오타쿠의 정의를 ‘현실과 허구를 동등한 통사에 의해 성립했다고 믿는 사람들’로 규정한 바 있다. 그런데 최근에는 상상력이 현실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타쿠의 정신사>에서 나는 90년대 후반 옴진리교 사건을 오타쿠 문화에 바탕한 테러리즘이라는 문맥으로 썼다. 그건 미야자키 쓰토무(일본의 아동 연쇄살인범)와 옴진리교에 대한 논거다. 오타쿠의 정의는 아무래도 좋다. 애초 오타쿠란 무엇인가를 학술적으로 논하는 것부터가 터무니없다. 오타쿠라는 말은 예컨대 중국어로 집 ‘택’(宅)을 쓰지 않나. 그 자체가 엄청난 오역이다. 원래는 ‘당신’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 팬들이 서로 만났을 때 상대 이름을 알기 전부터 부르는 명칭이었다. 그런 가상의 커뮤니케이션을 한때 ‘오타쿠’라고 부른 것이다.
-오타쿠 정의가 변하지만, 본인을 오타쿠라 생각한 적은 없나.
=나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부르고 싶으면 부르면 된다. 그런 논의 자체가 바보 같다. 그건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혁명이 있었고, 우리는 홍위병이었다. 이런 역사적 평가는 원래 내 아래 세대가 했어야 했다. 80년대에 일본의 문화적 수준이 한번에 붕괴해 지금 일본 문화 전체의 수준이 낮아졌다. 그리고 그렇게 수준을 낮아지게 한 것이 전공투 세대다. 중국의 문화혁명이 과도한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결부됨으로써 부정적으로 치달은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는 자본주의 시스템과 권위의 붕괴라는 것이 결부되어 80년대에 문화의 해체가 진행된 것이다. 학자들은 서브컬처를 연구하게 되었고. 문학은 바보같이 <나루토>처럼 되어갔다. 다른 한편으로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예술이라고 말한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은 ‘표현’이고, 우리는 이미 제대로 잘 표현하고 있다. 만화를 가져옴으로써 기존 문학의 권위를 손상시키면 안 된다. 우리는 이미 자존심을 걸고 우리의 표현을 하고 있다. 예술이네 어쩌네 하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일본 만화는 전통에서 기원하지 않았다.
-데즈카 오사무가 구축한 기법, 즉 만화 한컷을 영화 한 콤마로 인식하는 방식을 ‘일본 만화’ 기법으로 부르고, 그 방식을 통해 동아시아가 하나의 역사를 구축할 수 있을 거라는 발언을 했다. 그건 어떤 의미인가.
=‘일본 만화’라는 표현을 굳이 하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시하에 완성된 형식성을 일컫는다. 에마키가 기원이라든가 그런 전통 기원이 아니다. 나는 일본 만화가 전통에서 기원했다는 설을 확실히 부정하는 입장이다. 디즈니의 미키마우스식 그림 방법이 구성주의적으로 수용됨으로써 데즈카식 만화가 생겨난 것이다.
조만간 한국 예술의전당에서 ‘알폰소 무하 전시회’(12월3일~2017년 3월 5일)가 열린다. 원래 나와 알폰소 무하 재단이 일본의 소녀만화와 알폰소 무하를 대비시키자는 시도를 했는데, 그것의 스핀오프 같은 기획을 한국에서도 하게 된 것이다. 일본 소녀만화의 기원은 알폰소 무하에 있지 우키요에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전시회다. 즉, 일본의 만화 표현은 전통이 아니라 근대, 모더니즘이라는 것이다.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에 걸친 15년 동안에 전후 일본 애니메이션과 만화, 특수촬영 기술의 체계화가 거의 완성되었다. 이런 기호가 일본 근대형 형식성이다. 같은 의미에서 한국형의 형식성이 있을 것이고, 중국형의 형식성이 있을 것이다. 요컨대 어떤 부분은 보편적인 부분이 있고, 어떤 부분은 각 지역의 근대적 역사에 의해 형성되는 특이성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일본 만화를 특권적으로 다루는 것도 아니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문화적인 차이를 인식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걸 굳이 일본 만화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런 형식성을 넘어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는 점이다. 내가 사용하는 ‘일본’이라는 표현을 오해하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일본 만화의 형식성과 언어를 가지고 동아시아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표현은 그럼에도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내가 사용하는 ‘일본’이라는 표현을 오해하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동아시아에서 일본 만화가 수용된 것은 일본 만화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과거에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식민지 안에 있던 기반이 일본 만화 수용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전제다. 결국 동아시아에서 일본 만화 시장이 생겼고, 그 영향으로 일본 만화 수용자들이 생긴 것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지역마다 여러 형식이 있고, 그리고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은 중국의 여러 만화 형식, 중국에도 근대 이후의 만화사가 있고, 중국의 독특한 연환(連環) 형식이 있고, 중국의 여러 회화 기술이 있고, 그것을 통합한 것이 일본 만화의 형식성과 결부되어 다음 무대로 가는 것이다. 중국은 그것을 신만화라고 부른다. 한국에서도 여러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런 식으로 동아시아의 형식성이 생겨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대동아공영권이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공공성으로서의 만화 형식성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하나의 문화가 국경을 넘는다는 것
-중국과 함께 만화를 매개로 동아시아 역사를 구축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알고 있다.
=중국 연구자들과 동아시아 만화사를 구성하려는 프로젝트를 계속하고 있다. 최종적으로 동아시아 만화사를 만들고 싶다. 아시아가 근대화되어가는 과정에서 디즈니라는 커다란 파도를 중국이나 일본 모두 만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 양식을 변화시켰는가 하는 점을 살피고 있다. 동시에 일본이 식민지 지배를 하는 과정에서 양식성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역사적 자료에 근거해서 조사 중이다. 만화 애니메이션 연구는 꽤 중립적인 연구가 가능하다. 난징대학살 같은 주제는 아무래도 각 나라의 입장이나 이데올로기 문제가 있기 때문에 학술적 연구가 잘 안 된다. 하지만 만화 애니메이션에 관해서는 이런 문제가 별로 안 생긴다. 만화를 통해 동아시아에서 역사의식을 공유하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최종적으로는 아시아의 역사 공유다. 만화는 어려운 문제의 실마리가 된다. 이것이 베이징의 연구자들과 하고 있는 프로젝트다.
-같은 역사의식을 공유하는 것이 가능할까.
=적어도 만화 표현에서는 가능하다. 중국에도 중화사상이 있고, 일본에도 그런 게 있지만 만화에서는 그런 걸 상대화할 수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역사 자료이다. 자료를 하나하나 파헤쳐서 엄격하게 비판하면 역사는 저절로 보인다. 거기서 역사관도 보인다. 자료를 공유해가면 같은 역사관을 공유할 수 있다. 적어도 베이징 그룹과 우리 사이엔 그런 의식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재야에서 30년 활동해온 내가 국립기관인 일본국제문화연구센터에 있는 이유도 그곳을 이용하면 동아시아 네트워크를 만들기가 쉽기 때문이다.
-자료에 입각한 만화 연구로 동아시아 역사를 발견한 사례가 있는가.
=만화라고 했지만, 만화만의 단독 역사는 없다. 애니메이션 독자의 역사도 없다. 시각 미디어라는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문학 같은 것은 모두 큰 총체로서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예컨대 중국의 연구자가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에 와서 1년간 이룩한 성과가 있다. 루쉰이 우치야마쇼텐이라는 상하이에 있던 서점을 경유해서 일본에서 구입한 책의 리스트가 중국어로 번역되어 메모로 남아 있었다. 그것이 어떤 책이었는지를 조사했다. 그 결과 알게 된 것은 일본 만화가들의 책을 리얼타임으로 읽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루쉰이 일본을 경유해서 아방가르드 예술에 관한 이론서를 대량으로 읽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처음 밝혀졌다. 루쉰과 아방가르드는 지금까지 결부된 적이 없었다. 이 사실로 상하이가 문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상하이에서 왜 처음 동아시아의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졌는가 하는 점이 부각된 것이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에서의 영화 환경과 애니메이션 환경, 일본에서 상하이로 건너간 영화인들 문제까지 포함하여 하나의 커다란 상하이에 있어서의 영상, 문학, 정치 등이 드러난다. 정치도 침략하는 일본과 항일운동하는 중국인들, 중국인들 사이에도 공산당과 국민당이 있지 않나. 그런 것들이 뒤섞인 역사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때 사용하는 자료가 만화책만은 아니다. 신문자료나 당시의 중국 애니메이션 잡지에 씌어진 인터뷰 등이다.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철저히 조사함으로써 상하이의 의미가 보이는 것이다.
요즘 미디어믹스 방식이 유행인데, 일본 제국은 식민지 지배 방식으로서도 이러한 방식을 사용했다. 만화 자료에 입각해 이른바 대동아공영권 구축이 드러난다. 이것이 역사 연구다. 참여형 미디어믹스는 요즘 말하듯 그렇게 낙천적인 것이 아니라 강제적인 방식의 파시즘이었다. 따라서 단순히 일본 만화가 세계에 전해졌으니까 일본 만화는 훌륭한 거라고 일본인들은 어리석게 말하지만, 하나의 문화가 국경을 넘는 것은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다. 온갖 알력과 디스커뮤니케이션이 생긴다. 이런 맥락에서 사실 만화 표현의 근본적인 방법론상에서도 큰 문화적인 알력이 일어나고 있다. 이런 사실을 실제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는 이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알게 되는 것이다.
-지브리 스튜디오 이후의 일본 애니메이션계를 어떻게 보나.
=지브리 사람들은 아마 자기들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으리라고 생각했을테지만 안노 히데아키가 <신 고질라>를 만들었고, 신카이 마코토가 있다. 신카이 마코토의 방법은 지브리의 방법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주목해야 한다. 지브리나 신카이 모두 전시하에 만들어진 <모모타로 바다의 신병>(桃太郎 海の神兵)이 확립한 방법을 계승하고 있지만, 지브리가 계승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레이어를 겹쳐가면서 화면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내면의 소리, 대사 혹은 시어를 겹쳐가는 중층성과 화면을 배경인물로 중층화하는 것이다. 즉,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은 애니메이션을 값싸게 제작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레이아웃 몽타주의 기법이었다. 그것을 신카이 마코토는 보여준 것이다. <신 고질라>에서 안노 히데아키가 보여준 것은 전쟁 중 문화영화라고 일컬어진 다큐멘터리영화에 의한 리얼리즘의 재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신카이와 안노는 전시하에 확립된 일본의 영상기법을 방법론으로서 재구축해간다. 그들은 파시즘을 추종하는게 아니다. 지브리는 이미 끝났다. 그들은 자신들이 문을 닫음으로써 일본에서 하나의 역사가 끝났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