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스페셜] 영화계 내 성폭력 일곱 번째 대담: 남성감독 - 박찬욱·백승화·이권·한지승
2016-12-21
글 : 장영엽
사진 : 오계옥

“남성 영화인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지난 여섯 차례의 ‘영화계 내 성폭력’ 대담에서 나온 여성 영화인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이에 따라 일곱 번째 대담은 남성감독들의 이야기로 채웠다. 충무로의 선배감독이자 제작사 모호필름 대표이기도 한 박찬욱 감독, 전 한국영화감독조합 부대표인 한지승 감독,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연출부로 활동했으며 <내 연애의 기억>과 <꽃미남 연쇄 테러사건>을 연출한 이권 감독, <걷기왕>의 백승화 감독이 그들이다. 영화계의 주요 단체에서, 혹은 상업·독립영화 현장에서 각기 다른 행보를 걷고 있는 이 네 남성감독은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어조로 영화계 내 자성과 변화의 필요성, 더 많은 영화인들의 동참을 촉구했다. 남성감독들을 시작으로 <씨네21>은 앞으로 남성 영화인들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 또한 꾸준히 마련할 예정이다.

한지승

전 한국영화감독조합 부대표. 현재 조합 내에서 정책 업무를 맡고 있으며 지난 2010년 표준연출계약서를 탄생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올해 11월 감독조합이 성폭력 방지 특별기구를 만들겠다는 입장을 발표함에 따라 성폭력 문제와 관련된 정책 또한 지속적으로 연구할 예정이다. 영화 <싸움>(2007), <파파>(2012), <신촌좀비만화>(2014), 드라마 <연애시대>(2006) 등을 연출했다.

백승화

다큐멘터리 <반드시 크게 들을 것>(2012), <반드시 크게 들을 것2: WILD DAYS>(0212) 등을 만들었다. 올해 첫 장편 극영화 <걷기왕>을 선보였는데, 한국영화계에서 성희롱 예방 교육을 실시한 최초의 영화로 화제를 모았다.

박찬욱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2000), <복수는 나의 것>(2002), <올드보이>(2003), <친절한 금자씨>(2005), <박쥐>(2009) 등을 연출했고 할리우드로 진출해 영화 <스토커>(2013)를 만들었다. 최근작으로는 올해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아가씨>가 있다. 제작사 모호필름 대표로, <설국열차>(2013), <미쓰 홍당무>(2008) 등을 제작했다.

이권

영화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1999) 연출부, <고양이를 부탁해>(2001), <서프라이즈>(2002)의 스토리보드를 맡았다. <꽃미남 연쇄 테러사건>(2007)으로 데뷔해 영화 <내 연애의 기억>(2013), 드라마 <닥치고 꽃미남밴드>(2012), 웹드라마 <우리 옆집에 엑소가 산다>(2015) 등을 연출했다. <미씽: 사라진 여자>를 연출한 이언희 감독의 남편이다.

-오늘은 ‘영화계 내 성폭력’ 문제에 대한 일곱 번째 대담 자리이자 처음으로 남성감독들이 참석한 자리다. 그동안 여성 영화인들이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던 건 이 사안에 대한 남성 영화인들의 입장을 듣고 싶다는 거였다.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왔나.

=박찬욱_ <아가씨>의 감독으로서 못 본 척할 수 없는 사안이라고 생각했다. <아가씨>는 관람등급으로 보나 소재로 보나 제작비 규모로 보나 흥행이 우려되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페미니즘 이슈가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던 당시 분위기와 맞물려 이 영화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은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페미니즘 이슈의 덕을 본 사람으로서 영화계 내 성폭력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한지승_ 굉장히 예민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 자리가 사실 부담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 영화감독조합(이하 감독조합) 정책 업무를 맡고 있는 입장에서, 영화계 내 성폭력 문제는 더 많은 영화인들의 의견이 반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동참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좋은 결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이 자리에 나왔다. 고민을 하면 할수록 사안이 무거우면서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이권_ 내가 이 문제에 대해 전보다 깊이 생각하게 된 데에는 아내인 이언희 감독의 영향이 컸다. 아내가 현장에서 경험했던 얘기들을 듣다보니 남성 영화인으로 무심히 지나쳤던 부분에 대해 다시 돌아보게 되더라.

=백승화_ 평소 젠더와 성평등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던 차에 <씨네21>의 제안을 받았다. <걷기왕>을 만들면서 젠더 이슈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기도 했고. 주변의 여성 작업자나 페미니스트들과는 이야기를 많이 나눴던 것 같은데 남성감독님들과는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논할 기회가 드물었다. 어떤 얘기들을 할지 기대가 되기도 하고, 묻고 싶은 것들도 있어 이 자리에 나오게 됐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했다

-평소 영화계 내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인지하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한지승_ 이 점에서 나는 반성을 굉장히 많이 한 케이스다. <씨네21> 이전 대담에서 여성 영화인들이 말했던 구체적인 성폭력 사례를 실제로 접하지는 못했지만 비슷한 얘기들을 그동안 꽤 들어왔다. 그런데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특정 사안에 주목했을 뿐 피해자 입장에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누군가가 성폭력을 행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 사람 왜 그랬대’ 정도로 생각했을 뿐 ‘상대방이 상처를 받았겠구나’라는 식으로 생각을 못해본 거다. 그래서 대담 기사의 피해 사례들을 읽고 반성을 많이 했다. 또 이만큼 무지했기 때문에 나도 부지불식간에 누군가에게 비슷한 행동을 하진 않았는지 돌아보게 됐다.

박찬욱_ 나는 이런 사례를 보거나 들은 일이 많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 <씨네21> 기사에서 폭로한 사례들을 보고 충격을 많이 받았다. 기사가 실릴 때마다 읽었는데, 기사를 읽은 날은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상처를 받고 현장을 떠나거나 아예 겁을 먹고 영화 일 시작하는 것 자체를 포기한다는 이야기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 잠을 못 이루었다. 그동안 이전에 비하면 한국영화계가 꽤 많이 깨끗해졌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90년대 후반부터였나. 성평등을 포함해 다양한 의미에서 영화계에 자정작용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게 영화인들이 룸살롱 가는 문화였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그런 문화가 관행처럼 여겨지곤 했다. 하루빨리 이런 문화가 없어졌으면 하는 마음에 처음 영화사를 차릴 때 이름을 ‘NRS’라 지으려 했다. ‘노 룸살롱’의 약자다. (좌중 웃음) 뭇 영화들의 흥행 부진에 따라 충무로로 몰려들었던 자금이 빠져나가면서 룸살롱 문화도 자연스럽게 사라졌고, 그래서 예전보다는 훨씬 나아졌다고 믿으며 영화계 외부 사람들에게도 자랑하곤 했는데 지금도 이 정도였다는 점이 충격이다. 누가 어떻게 그렇게 모를 수가 있었냐고 비난해도 달게 받아야 할 것 같다. 가끔 성폭력과 관련된 사례를 들을 때에도 어느 분야에나 있을 수 있는 일탈의 문제라 여겼을 뿐 영화계의 구조적인 성차별과 권력관계에서 비롯된 횡포일 수 있겠다는 데까지 의식이 나아가지 못했다.

백승화_ 나 역시 이런 얘기들을 들을 때마다 특정인의 범죄라고 생각하며 넘긴 적이 많았다. 요즘에는 이런 성폭력 문제들이 이슈가 됐을 때 거기에서 끝내면 안 된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성폭력, 성희롱 문제에 있어서 남성들이 보다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 데에는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낮다는 점도 영향을 주는 것 같다. 현실적으로 크게 와닿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을 때 몇몇 사람들의 일탈 행위로 여기고 마는 게 아닐까.

이권_ 감독이기 때문에 성폭력 문제가 레이더망에 잘 안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드라마 <닥치고 꽃미남밴드>를 연출했을 당시 조명팀 스탭이 보조출연자에게 적절치 못한 행동을 했다가 문제를 일으켜 촬영 도중 현장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뒤늦게 들었다. 감독은 현장에서 챙길 게 많다보니 문제가 생겨도 바로 얘기가 전달되지 않는 경우도 생기더라.

박찬욱_ 만약 내 현장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전제하에 말하자면, 감독은 할 일이 많아서 얘기가 들어오지 않을 수 있다 해도 제작자였을 때 조차 마땅히 들었어야 할 얘기가 들어오지 않았다는 건 내가 리더로서 그만큼 믿음을 못 줬다고 볼 수밖에 없다. 자괴감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차차 얘기를 더 해봐야겠지만 성폭력 피해자가 생겼을 때 감독이 됐든 프로듀서가 됐든 제작사 사장이 됐든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그러려면 큰 용기가 필요하고 2차 가해의 두려움도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어쨌거나 누군가는 얘기를 해야 문제가 공론화되고 해결되지 않겠나. 물론 그런 분위기가 조성되려면 제작사 대표나 현장 프로듀서, 감독 등 책임자들이 믿음을 주어야겠지.

한지승_ 아마 남성감독들에게 이야기가 바로 전달되지 않는 건 우리가 관습적으로 이 문제를 가볍게 생각해왔던 시기와 과정이 있기 때문일 수 있다. 지난 대담에서 여성감독님들이 성폭력에 대한 많은 사례들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건 피해자 입장에서 문제를 보려고 하고 관심을 가지려 했던 노력이 있었다고 본다. 남성감독들은 일을 핑계로, 혹은 그런 문제를 남녀가 함께 있으면 일어날 수 있는 일의 하나로 치부해왔던 게으름이 분명히 있었다고 생각한다.

백승화_ 직접적으로 사건을 경험하거나 목격한다 해도 스탭들의 입장에서는 쉽게 말할 수 없는 처지일 거다. 사례를 들어보면 가해자는 감독, 주연배우 등 헤드 스탭들이 많고 피해자는 후배 배우, 보조출연자 등이 많더라. 만약 현장에서 성폭력이 발생했는데 영화는 찍어야 하는 상황이고, 가해자가 주연배우라면 그를 어떻게 처벌해야 할 것인가?

박찬욱_ 맞다. 내가 들은 몇 안 되는 얘기 중 하나가 타 현장에서 남자 주연배우가 여자 분장 스탭에게 성희롱을 일삼다가 어느 날에는 스탭의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라이터가 있냐며 뒤지더라는 거다. 그런데 이 문제가 공론화된다 하더라도 주연배우를 어떻게 해야 할지는 정말 난감한 문제다. 현실적으로 퇴출시키기 어려운 상황이라도 최소한 엄중한 경고를 주고 사과를 강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백승화_ 신속한 해결이 되지 않는 상황이 여성 동료들에겐 누적되어왔을 거고, 당연히 참아야 하는 일로 받아들이게 됐을 수 있다. 나는 이런 문제가 발생했을 때 박찬욱 감독님의 말씀처럼 제작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가 현장에서의 권력관계와도 연결되기 때문에 제작자 정도의 위치는 되어야 피해자도 얘기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않겠나.

한지승_ 여성 영화인들의 대담 기사를 보며 인상적이었던 것은 전에는 성희롱인지, 성추행인지, 이걸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해도 될지 몰랐던 시기가 있었다면 지금은 적어도 이것이 문제라는 인식을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와 어디에 제기하면 될지에 대한 현실적인 해결방안을 토의해야 한다고 본다.

박찬욱_ 지난 1084호 대담에서 조세영 감독이 ‘목격자 매뉴얼’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옳은 얘기라고 생각한다. 남자 스탭들에게도 위계질서가 있다. 성폭력을 목격했을 때 고참 헤드 스탭에게 연출부가 과연 얘기할 수 있겠냐는 거다. 가해하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한 거고, 가해를 목격했을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이 있어야 한다. 성폭력 예방교육 프로그램에 이런 지침까지 포함되어 있어야 할 것 같다. 여성들도 매 상황 문제를 제기해야 할 사안인지 아닌지 고민되는 것처럼 남성들도 무엇이 문제인지 인식하지 못한 채 부주의한 농담을 해왔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부분에 대한 교육을 해야 한다.

이권_ 남성감독으로서 그럴 때 있지 않나. 동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배우 몸에 손을 대야 할 때가 있다. 어깨의 위치를 잡아준다든지. 그런 상황이 무척 조심스럽다.

박찬욱_ <스토커> 첫 촬영날이었나, 니콜 키드먼이 잠자는 장면을 찍을 때 침대에 눈을 감고 누워서 몸을 마음대로 만지라고 하더라. 팔이나 다리를 자유롭게 움직여서 당신이 원하는 그림을 만들라는 거였다. 이런 배려를 뒤집어 생각해보면 남성감독이 여배우에게 신체적 접촉을 하는게 조심스러운 문화에서 비롯된 거잖나. 확실히 조심해야 하는 문제다.

투자자가 성폭력 교육 의무화해야

-감독조합은 지난 11월 입장문을 발표했다. 영화계 내 성폭력을 방지하기 위한 특별기구를 만들고, 성폭력 예방교육 및 성평등 교육프로그램을 실시하겠다는 내용이었는데 이에 대한 논의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한지승_ 영화계 내 성폭력 문제가 제기된 뒤 조합 내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우선 감독들이 성폭력에 대한 문제를 인식하고 이 문제를 학습할 수 있는 기회를 촬영 전에 갖도록 하자고 논의하는 중이다. 교육의 필요성을 인지하게 된 건 감독들 사이에서 성폭력 문제에 대한 학습이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자성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성폭력 문제를 교육하고 학습하고, 나아가 사회적 인식으로 발전할 수 있게끔 틀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년 조합 총회 때 여성민우회와 함께 성폭력 예방교육을 받기로 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또 성폭력 피해자가 법적인 차원에서 처벌을 원할 때에는 조합원 자격을 박탈하는 방법도 강구하고 있다. 처벌 수위에 있어서 단계별, 수위별로 나누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고. 예상보다 활발한 논의가 조합에서 이뤄지고 있다. 그런데 논의를 하다보니 기준점을 정하는 것이 어렵더라.

박찬욱_ 교육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어떤 말을 조심해야 하는지 잘 몰랐던 시기가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당신 오늘 굉장히 멋지다’는 말도 선의에서 꺼낸 말임에도 상대방에게는 불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거다.

-백승화 감독의 경우 <걷기왕> 촬영을 시작하기 전 스탭들에게 성폭력 예방교육을 실시했는데, 어떤 경험이었나.

백승화_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걷기왕>의 공동 작가이자 스크립터로 참여했던 남순아 작가와 공유했던 생각이 있었다. 나는 위압적인 현장 분위기에 대해 부정적인 마음을 갖고 있었고, 남순아 작가는 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성희롱이나 성폭력 문제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는데, 이 문제에 대한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러던 도중 남순아 작가가 영화산업노조 홈페이지에서 성희롱 예방교육 프로그램을 발견하고 실시하게 됐다. 처음에 놀랐던 건 이런 프로그램이 법제화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여성민우회 분들이 와서 두세 시간 정도 교육을 했는데, 그걸 들었다고 해서 성폭력 문제에 대한 스탭들의 인식이 크게 바뀌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우리가 이 교육을 실시했던 이유는 법적 효력을 바랐다기보다는 태도의 문제에 대한 것이었다. 성폭력 문제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현장이며, 문제가 발생했을 때 피해자들에게 처벌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를 제공할 수 있다는 태도를 취하길 원했다. 재미있는 점은 이 문제가 이슈가 되고 난 뒤 다른 영화, 드라마 현장에서도 성폭력 예방교육을 실시했다는 점이다. 한편으로 어떤 분들은 자신이 속한 현장에서 이번에 이런 교육을 실시하려 하자 반응이 좋지 않다는 얘기도 전했다. 예를 들어 남성 헤드 스탭들이 계약서상에는 이런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 없는데 어떤 필요에 의해 교육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식의 거부감도 있다고 들었다.

박찬욱_ 잠재적 가해자 취급을 받는 게 싫다는 거겠지.

이권_ 그런데 법적으로는 이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거잖나.

백승화_ 지금까지 교육을 받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그런 점들을 생각하면 성폭력 예방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남성 영화인들이 이 문제에 대해 나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방관하는 지점도 있다고 생각한다.

한지승_ 이 교육이 좀더 효과적으로 실시되려면 영화계 각 분야에서 세미나 형식이건 총 회의건 의견을 취합해서 각자의 역할을 정해야 할 것 같다. 영화 프로젝트의 진행 과정에서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부서가 어디인가. 프로듀서인가 제작자인가. 스탭들과 계약할 때 어떤 식으로 약속을 받을 건가, 혹은 교육과정에 있어 구체적으로 촬영이 끝날 때까지 별 사고 없이 끝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할 것인가. 이에 대한 논의가 각 분야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찬욱_ 가장 쉬운 방법은 투자사가 교육을 의무화하는 것이다. 영화계가 표준근로계약을 지키게 된 이유도 투자사의 결심이 주요했다고 본다. 지금의 분위기에 힘입어 투자사들에게 그들이 투자·배급하는 모든 한국영화에 성폭력 예방교육을 의무화하도록 강제하라고 우리가 압박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다.

이권_ 영화계 문제에서 좀더 논의를 확장해보자면, 한국 사회의 교육 과정에서도 마초 문화가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나만 해도 남고를 나왔는데, 남자들이 여자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학습이 안 돼있다는 생각을 한다. 요즘은 모르겠지만 내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일부 남자들이 군대 가기 전에 돈을 주고 동정을 떼는 문화가 있었고, 그런 이야기들을 아무렇지 않게 남자들 사이에서 꺼내는 문화가 있었다. 군대에서도 남자들끼리 있지 않나. 그런 과정을 거치며 사회에 나가다보니 여자들과 대화하는 것 자체를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마초적인 문화가 자연스럽게 성차별로 이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예전에 준비하다가 엎어진 영화가 있다. 조감독 면접을 봤는데 여성 지원자가 왔다. 경력도 괜찮고 알아봤더니 일도 잘한다더라. 제작자와 통화하며 그 친구가 괜찮겠다는 얘기를 하는데, 여자냐고 되묻는 거다. 그 제작자도 평소 굉장히 젠틀한 사람인데, 여성 조감독은 불편하다고 말해 놀랐던 기억이 있다. 현장에서 편하게 대하기가 불편하다는 게 이유였다.

박찬욱_ 맞다. 여성 스탭들과 어떻게 협업하고 대화할지 모르니 남자 스탭만 편한 거다. 뭉쳐다니며 술 마시는 자리에서 사업 얘기를 하고. 그런 문화에서 여성들이 배제되기 쉽다. 그런데 사실 이런 얘기를 하면서도 내심 걱정되는 게 있다. 여성 영화인들이 용기 있게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가뜩이나 여성을 불편해하는 (권력 가진) 남성 영화인들이 여성을 발탁하는 일을 더 기피하지는 않을까 하는 점이다. 쉽게 모든 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 투쟁은 길게 보고 독하게 가야 한다.

한지승_ 교육 문제와 더불어 덧붙이자면 최근 감독조합의 고민은 성폭력과 관련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걸 수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거나 법적 처벌 기능이 조합 내부에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데 있다. 당분간은 교육과 학습에 집중하겠지만 감독조합뿐만 아니라 성폭력 피해자들이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할 수 있고 이 문제에 대해 엄격하게 조사할 수 있는 영화계 내 공식기구가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찬욱_ 동의한다. 감독이 가해자일 경우 피해자가 감독조합에 와서 얘기하려고 할지가 상당히 의심스럽다.

한지승_ 그렇다. 감독이 구조적으로 권력관계의 상위에 있는 사람인만큼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

박찬욱_ 이런 경우도 있다. <비밀은 없다> 시사를 마친 뒤 뒤풀이 자리에서 공효진 배우와 얘기를 나눴다. 어쩌다보니 여성감독 영화만 연달아 몇편을 했는데, 감독이 여성일 경우에는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하더라. 촬영, 조명 등 헤드급 남자 스탭들이 감독의 지시를 듣지 않거나 무시하는 경우를 많이 봐왔다는 거다. 심지어는 조감독까지- 물론 남자 조감독- 감독을 얕본다는 얘기였다. 기막힐 노릇이다. 이렇게 감독이 피해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한지승_ 영화계 내 권력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있어서는 권력을 가진 이들의 인식 변화가 필요한 것 같다.

박찬욱_ 사실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에 성폭력 및 성차별 문제를 전담하는 기구가 설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에 대한 설문이라든지 통계자료가 있어야 성폭력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대책 마련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루빨리 데이터를 확보하고 거기에 기초해서 영화계에 경보를 울리고 단체나 개인을 설득해야 한다.

백승화_ 성폭력 문제나 성차별에 대한 통계가 어디에서건 한번도 집계되지 않았다는 점이 솔직히 의아했다.

한지승_ 이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현실적 결과물이 빠른 시일 내에 나왔으면 좋겠다. 영진위가 되었건 공정특위가 되었건, 처벌 기능을 가진 공식기구 이전에 적어도 피해자를 도울 수 있는 상담기구라도 빨리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 기구를 통해 성폭력 문제에 대한 데이터를 모으고, 어느 정도 밑그림이 그려지면 공식기구를 통해 영화산업 내 정화작용을 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남성성과 권력이라는 견고함

-이권 감독은 성폭력, 성차별 문제에 대해 생각해본 계기로 이언희 감독의 영향을 말했는데, 특별히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

이권_ 어떤 작품을 만들며 기술 스탭들과 현장에서 트러블이 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관계자에게 찾아가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니 “오빠, 좀 도와달라”는 식으로 사정을 해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더라. (일동 경악) 이언희 감독이 기술 스탭들에 비해 나이나 연차가 어렸다. 그래서 ‘오빠’라고 부르며 도움을 청해보라고 했다는 얘기를 듣고 많이 놀랐다. 어떻게 보면 아까 말했던 마초 문화의 연장선상에 있는 상황 같다. “형, 한번만 봐줘” 딱 이런 뉘앙스잖나.

한지승_ 좀더 나아가면 분명히 여성감독들이 경험하게 되는 비슷한 상황의 문제들이 있으리라고 본다. 예를 들어 제작자나 촬영감독 등 자신의 의도를 관철해야 되는 대상들이 있잖나. 그런 상황에서 여성감독들이 감내해야 할 부당함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본다. 한편으로는 “야, 술이나 먹고 풀어” 하는 식의 접근 방향이 사실 성적으로 부당한 권유 혹은 요구일 가능성이 있다는 거다. 아까 얘기했던 마초 문화의 연장선상에서 여성이 현장을 장악해야 할 때 상남자처럼 보여야 하는 고단함이 있을 거다. 현장에서 남성들은 잘 알지 못하지만 여성들이 굉장히 크게 느낄 수 있는 부당함이 있을 거다. 누군가는 이것이 영화 현장의 특수성이고 작업의 과정이라고 얘기할 수 있지만 과연 우리가 그냥 그렇게만 넘길 문제이겠냐는 것이다. 현장의 여성 영화인들에게 필요한 배려를 고민해봐야 한다.

백승화_ 조금 다른 얘기일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영화 현장에서는 남성성을 자꾸 인정받아야 하는 거 같다. 이건 비단 여성 스탭들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남성성을 가지지 못한 남성 스탭들도 현장에서 굉장히 일하기 힘든 부분이 많다. 이를테면 현장에서 무거운 걸 잘 들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어떤 문제를 털털하게 넘겨버리지 못할 때.

박찬욱_ 그럴 때 예민하다, 약하다는 말을 한다. 아니, 저렇게 아무 불평도 하지 않고 남자들과 잘 어울리면서 꿋꿋하게 일하는 다른 여성 스탭들도 많은데 왜 예민하게 반응하냐는 거다. 사실 그 사람들이 의연하게 행동하기까지 얼마나 많이 참고 버텼기에 그런 단단한 갑옷을 두르게 되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거다. 내가 영화과를 가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학생 시절 막연하게 영화계가 굉장히 남성적인 곳일 것 같은데, 나 같은 사람이 과연 감독을 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영화과에 가기를 포기했다. 현장 가서도 영화 한두편을 작업할 때까지는 굉장히 힘들었다. 80년대 말이었나, 우리 연출부 여성 스크립터가 동시녹음 붐마이크 남성 스탭에게 자꾸 무시를 당하고 핀잔을 들었다. 그건 분명히 성차별적인 행동이었는데, 그 스탭이 나보다 한참 고참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던 적이 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주먹다짐 직전까지 간 적도 있다. 당시에는 정말 두려웠다. 영화계에 갓 들어온 신참이 고참 선배에게 대든다는 게 두려웠던 거다.

이권_ 어쩌면 이건 젠더 이슈와는 좀 다른 문제인 것 같은데, 어떤 프로젝트를 준비하다가 하차한 경험이 있다. 반년 정도 일했는데 이 상황에서 권력관계의 ‘갑’은 배우였다. 배우와 내가 생각하는 이야기의 톤이 달랐는데, 배우가 워낙 ‘갑’이다보니 시나리오를 바꾸고 싶어 하더라.

박찬욱_ 그런 상황을 겪으며 이언희 감독의 입장을 더 이해할 수 있게 된 게 아닐까.

이권_ 젠더 문제를 확장해보면 결국 권력관계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감독이든 제작자든 프로듀서든 서로 파트너십을 가지고 존중하는 게 아니라 결국은 ‘여기서 누가 가장 힘센 놈이냐’를 따지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골목대장 문화’라고 할까. 이 구역의 갑은 나이고, 동생이니 알아서 기어야 하는 문화. 비단 영화계의 문제만은 아니겠지만 나는 이 점을 항상 어렵게 느낀다. 내가 그런 사람이 못되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백승화_ 항상 느끼지만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남녀 평등을 얘기할 때 ‘기울어진 운동장’(공정한 경쟁을 할 수 없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얘기를 많이 한다. 이를테면 영화 촬영 현장에서도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확실히 알아야 진정한 평등을 논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한지승_ 성평등이라는 말이 주는 오해와 왜곡된 인식이 문제인 것 같다. 현장에서는 격의가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시작되는 일련의 성적 문제들이 있지 않나. 또 그래야만 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피해자의 어떤 상황들이 있다. 결국 문제의 해결책은 성별이 다르다는 걸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닌가 싶다. 다름을 정확히 인식하고 거기에서부터 차별을 없애는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나 싶다.

섬세한, 상냥한, 얌전한… 차별적 표현 지양해야

-현장에서의 문화뿐만 아니라 영화 제작에서도 성차별 문제는 존재하는 것 같다.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의 투자가 어렵다든지, 여성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담은 영화의 기획이 어렵다는 문제가 있을 것이다.

백승화_ <걷기왕>을 만들 때 어떤 분이 남자가 주인공이면 투자나 캐스팅이 훨씬 수월했을 거라는 말을 하더라. 그때 왜 남성이 주인공인 영화가 잘되고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는 흥행하기 어려운지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다. 아마 지금의 대중에게 익숙한 서사가 남성 서사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영화뿐만 아니라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까지 남성들이 중심적으로 진행하는 서사를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 관객도 익숙하게 느끼는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제작사와 투자사는 남성의 이야기를 대중적이라고 이해하게 되는 것 같고.

한지승_ 90년대 중반에 데뷔할 때 원로 제작자들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극장에 오는 1차 관객은 20대 초반의 오피스 레이디”라고. 관객이 남자배우를 선호하니 그 공식을 따르라는 거였다. 이 공식이 아직까지도 관행으로 남아 있는 것 같은데, 사실 관객의 스펙트럼이 넓어진 지금 시점에서 이런 관행 역시 하나의 산업적 고정관념이 아닐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이권_ 거꾸로 가는 느낌도 좀 있다. 얼마 전에 90년대 소형자동차 티코 광고를 봤는데 커리어우먼의 주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는 데 깜짝 놀랐다.

박찬욱_ 미국도 한국과 다르지 않다. 강한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인 영화의 투자가 잘 안되고, 연기 잘하고 인기 있는 여성 스타들은 좋은 시나리오가 없다고 아우성이다. 할리우드에서 <아가씨>가 개봉하고 난 뒤 강한 여성 캐릭터가 나오는 시나리오는 나에게 많이 오는 것 같다. 그런데 검토해보면 좋은 시나리오가 그렇게 많지 않다. 강한 여성주인공 영화는 투자가 잘 안 된다고 생각해서 뛰어난 작가들이 그런 각본을 쓰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의심해본다. 그런 영화가 흥행이 잘 안 되면 투자가 안 된다고 생각하니 작가들이 여성 이야기를 잘 쓰지 않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이권_ <여고괴담> 시리즈를 오랫동안 준비하다가 잘 안 됐다. 그때 내가 정말로 만들어보고 싶었던 여성 캐릭터는 영화 <레지던트 이블>의 밀라 요보비치 같은 인물이었다. 양궁부 학생이 퇴마를 하는 이야기를 다뤄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들었던 이야기가 ‘여고괴담은 멜로여야 한다’는 거였다. 여자아이들의 이야기는 이래야 한다는 공식이 있으니 다르게 풀기가 쉽지 않았다.

백승화_ <걷기왕>의 시나리오를 보고 누군가는 ‘여고생의 이야기인데 그들만의 예민한 감정을 다룬 에피소드가 좀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얘기를 했다. 시나리오를 함께 쓴 남순아 작가가 여자이다보니 얘기를 들어봤는데 사실 여고생들이 꼭 예민한 것만은 아니라더라. 기존에 알려진 것과 다른 여성들의 서사가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런 부분들을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시선도 있었다.

박찬욱_ 말이 나온 김에 여성을 묘사하는 형용사도 굉장히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백 감독이 언급한 ‘예민한’이라는 형용사만 해도 남자에게 적용할 때와 여자에게 적용할 때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품게 된다. 그러니 형용사를 고를 때 그야말로 ‘예민’해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부정적 뉘앙스로 사용하는 건 말할 나위도 없고, 심지어 긍정적인 뜻을 담았다고 해도 여자에게만 차별적으로 사용하는 형용사를 지양해야 한다. 섬세한, 상냥한, 얌전한, 순결한, 청순한, 발랄한, 정숙한, 상큼한, 참한, 나긋나긋한, 조신한… 따위 그런 형용사를 한쪽 성에 고정해서 쓰는걸 멀리해야 할 거다. 반드시 필요한 때는 써야겠지만 꼭 이 맥락에서 이 표현을 써야 하는지 생각해보고 분별 있게 구사해야 한다. 이 부분은 언론에서도 마찬가지로 주의해야 할 점인 것 같다.

한지승_ 최근 성폭력 이슈는 정말 다양한 고민거리들로 확산되는 이야기인 것 같다. 새해에는 보다 실질적인 제도와 정책들로 이어질 수 있도록 힘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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