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버거의 말대로라면 죽은 이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이제 정치적인 행위가 되었다. 어쩌면 모두 참된 애도를 잊었는지도 모른다. 그 ‘죽은 이’에 존 버거 같은 작가는 포함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핑계 삼아 이제 그의 말에 대놓고 순순히 귀를 기울여도 좋을 때다.
달리는 차 안에서 그의 부고를 들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알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속도감이라고 생각했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애도의 글이 올라오고 있어! 너도나도 존 버거를 알았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고” 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누군가 죽으면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다고 고야는 말했다. 차가워진 실루엣을 통해서. 하지만 요즘 세상에서 은밀히 영혼의 부재를 느낄 기회를 얻기는 쉽지 않다. 세계 어느 곳이든, 어떤 소식이든 빛의 속도로 전달되니까. 물론 누구든 어디서든 애도할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본다. 애도의 방법을 제대로 배운 적이 있었던가.
집으로 돌아온 나는 서가를 살핀다. 책꽂이 한켠에 그의 코너가 조촐하게 마련돼 있다. 그래도 여기저기 흩어진 그의 책을 모으기 시작한다. 나의 첫 존 버거였던 <A가 X에게>를 맨 왼쪽으로 꽂는다. 그가 발표한 순서보다 내가 읽은 순서가 더 중요하다. 신인 작가 입장에서 ‘잘 쓴 소설’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읽고 났을 때 당장 노트북을 켜게 만드는, 그러니까 너무 뭔가 쓰고 싶게 만드는 소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얼마간 아무것도 쓸 수 없게 만드는 소설이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의 경우는 후자였던 것 같다. 그건 단지 뛰어난 예술작품이 주는 열패감이기보다는 소설보다 견고한 한 인간이 던지는 생에 대한 의문이 주는 먹먹함 같은 것이다.
<제7의 인간> 표지에는 이민 노동자의 벗은 상반신 사진이 있다. 자세히 보면 가슴에는 휘갈겨 쓴 아라비아 숫자가 보인다. 푸줏간의 고기 같다. 울컥한다. 내가, 감히 내가 이런 일을 겪지 않고 어떻게 모멸감을 논할 것인가. 그럴 수 있는 것일까. 이 감정은 그의 머리말과 궤를 같이한다.
‘이 책은 꿈/ 악몽에 관한 책이다. 우리가 무슨 권리로 남들의 삶의 체험을 꿈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들의 현실이 너무나도 가혹해서 악몽이란 이름도 너무 약한 것은 아닌가, 그들의 희망이 너무도 높아서 꿈이라는 이름도 너무 약한 것은 아닌가.’
<제7의 인간>은 정영두의 안무로 서울에서 공연된 적도 있다. 사진과 글과 시의 조합이, 이렇게 또 다른 나라의 또 다른 영역의 작가에게 영향을 미친 것이다. 편의상 소설로 분류하기는 하지만 장 모르의 사진과 아틸라 요제프의 동명의 시가 없다면 이 콘텐츠는 이토록 강렬한 인상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진과 글이 싸우듯 화해하듯 각자의 길을 걷는 그 팽팽한 느낌.
내가 아는 존 버거는 단지 자신의 작품을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더 나아지는 삶을 위해 글을 썼고,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순수하게 작품을 위한 테크닉이 되었다. 그는 사안을 먼 풍경으로 놓지 않는다. 그의 소설은 어떤 방식이 됐든 가장 발을 튼튼하게 땅에 붙이고 있다. <G>의 G, <킹>의 킹처럼 화자의 내면으로 들어가 그 내밀한 감정을 따라가게 하는가 하면, <우리 시대의 화가>나 lt;A가 X에게>에서처럼 존 버거 자신, 혹은 자신과도 같은 관찰자를 두어 독자로부터 가장 가까이서 등장인물을 지켜보게 하는 것이다. <그들의 노동에 함께 하였느니라>는 또 어떤가. 저자 스스로 알프스 산자락으로 걸어들어가 농부의 삶을 살지 않았는가. <결혼을 향하여>의 경우 책의 저작권에 따른 수입을 한국에이즈퇴치연맹에 기부한 사실도 있다. 그 반면 그의 소설은 한결같이 아름답다. 작정한 듯이 말이다.
그림이 가득한 <스모크>를 읽으며 담배를 입에 문 그를 상상해본다. <백내장>을 펼치며 ‘어, 지독한 노인네야. 이런 경험까지 쓰다니’ 툴툴대며 책을 쓰다듬어본다. <아내의 빈방>에서 작품보다 그의 일상을 질투하기도 한다.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포기한 작은 행복인가.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진정한 <행운아>이다.
존 버거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10살배기로 돌아가, 17살의 맹랑한 어머니의 손을 잡고 정향이 박힌 사과를 먹으며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처럼 리스본에 머무르고 있을까. 혹은 슈투트가르트의 아파트에서 이민 노동자들과 수다를 떨고 있을지도, 자신이 만든 가상의 공간 생 발레리에서 개와 뒹군다 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어쩌면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 존 버거식 유머를 활용한다면 촛불 때문이 아니라 길거리 음식 때문에!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분명 그의 책 속에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존 버거 추천 소설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망자들은 죽으면 지상에 머물 곳을 선택할 수 있단다. 지상에 머물기로 하는 경우엔 언제나. 이렇게 시작되는 소설은 존 버거의 어떤 소설보다 잔잔하고 아름답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소설 곳곳에는 유머가 배어 있다. 특히 어머니와의 추억을 곱씹는 ‘1장 리스본’은 존 버거 문학의 원천을 엿볼 수 있는 여러 구절과 인물에 관한 탁월한 묘사가 눈길을 끈다.
이 한줄_ 네가 찾아낸 것만 쓰렴. 어머니가 말했다. 제가 뭘 찾아낸 건지 전 끝끝내 모를 거예요. 내가 말했다. 그래, 끝내 모를 거야. 글을 쓰려면 용기가 필요해요. 내가 말했다. 용기는 생겨날 거다. 네가 찾아낸 것을 쓰고, 그걸 우리에게 알려주는 호의를 베풀렴.
<킹>
존 버거의 소설을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권한다. 다른 소설과 달리 의도 없음을 의도하듯 머리말이 없는 데다가 동물의 시선으로 단 하루라는 시간이 주어져 쉽게 읽을 수 있다. 물론 내용은 여느 소설과 마찬가지로 급진적이다.
이 한줄_ 독은 게으르다. 독은 자신이 공격하는 대상이 스스로를 파괴하게끔 밀어붙인다. 그 작동 방식은 절망과 비슷하다.
<A가 X에게>
아마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소설이 아닐까 싶다. 이야고와 00의 애절한 사랑 편지로 이뤄진 소설은 내용과 형식 어디에서도 파찰음이 나지 않는다. “양심의 명령에 따르는 책임감과 감각적인 세계에 대한 배려를 동시에 보여주는 데 있어 존 버거만큼 성공한 작가는 없다”는 수전 손택의 말을 인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한줄_ 사람들은 비밀을 아주 작은 거라고 생각하잖아. 그죠? 소중한 보석이나 날카로운 돌이나 칼처럼, 작아서 숨길 수 있는 무엇이라고 말이에요. 하지만 아주 큰 비밀들도 있어요. 너무 크기 때문에 직접 팔로 그 크기를 재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겐 숨겨진 채 남아 있는 그런 비밀들. 그런 비밀들은 바로 약속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