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입학했더니 나와 고향이 같은 여자애가 있었다. 우리는 인사를 했다. “안녕? 난 정원이라고 해.” “안녕? 난 혜영이라고 해.” 옆에서 보고 있던 서울 출신 동기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너네 왜 인사해?” 그럼 서울 애들은 통성명도 안 하고 야자 트냐? 우리 고향에선 안 그런다. “아니, 그게 아니고, 너네 아는 사이 아니야? 전주에 여학교 한개잖아.” 하….
나는 설명을 시작했다. “전주에는 여고가 8개, 남녀공학이 2개야. 여학생이 갈 수 있는 학교가 총 10개인 셈이지. 학교가 하도 많아서 나도 몇갠지 몰랐는데(으쓱), 하루는 교장이 3학년 전체를 강당에 모아놓고 우리 성적표 수백장을 던지면서 그러더라고, 이번 모의고사 결과 여고 8개 남녀공학 2개 중에서 우리 학교 이과가 9등 문과가 10등이다! 그리고 난 당연히 10등인 문과였지(다시 한번 으쓱).” 아이, 숨차.
서울 아이는 사과했다. “미안, 난 시골은 다 학교가 한개인 줄 알고.” 이 자식이! 나는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전주는 전라북도의 도청 소재지이자 콩나물국밥과 비빔밥이 유명한 맛의 고장으로서 인구가 50만명에 달하며… (2015년 기준으로는 65만2천명).” 그때는 정말 몰랐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1년에도 몇번씩 같은 사설을 읊게 되리라고는….
나는 시골 사람이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보낸 세월이 십수년,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함께 우리 고향에 놀러간 친구가(혹자는 ‘고향’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 자체가 이미 시골 사람이라고 한다) 시내에 있는 버스 정거장을 보더니(또한 혹자는 ‘시내’라는 단어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시골이라고도 한다) 몹시 기뻐하며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이다. “꺄하하하! 저거 언제부터 저랬어?” 그래, 우리 고향 시내 버스 정거장은 몽땅 기와 지붕이다…. 근데 인사동 스타벅스에 기와 붙어 있으면 전통의 컨템포러리고 전주 시내에 기와 붙어 있으면 촌티냐.
이쯤에서 나는 고뇌했다. 서울살이 20년, 도대체 얼마나 더 오래 서울에서 살아야 시골 사람이 아닐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인구 50만명의 어엿한 도청 소재지 출신으로서 도대체 언제까지 시골 사람 취급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진정한 시골 사람의 도(道)에 모두의 이정표가 있다면 그것은 이장님, 시골 권력의 정점. 농활 가서도 우리는 모두 이장님에게 인사를 드리지, 그 분이 일감을 배분하거든. 이장님이 며느릿감으로 점찍은 (남자친구 있는) 혜영이가 사과 봉지를 씌우며 과수원을 노니는 사이 밭고랑을 기어다니며 김매는 고난도 노동을 부여받은 (남자친구 없는) 나는 그렇게 슬픈 마음으로 이장님의 추억을 되새겼던 것이다.
<이장과 군수>의 춘삼(차승원)은 모든 시골 사람이 원하는 꿈의 이장이다. 왜냐고? 젊거든, 시골에선 그냥 젊으면 돼. 시골에 가본 젊은이라면 누구나 느껴봤을 것이다, 먹잇감을 발견하고 술렁이는 시골 마을의 음산한 기운을. 여기 일꾼이 왔다! <마파도>의 재철(이정진)은 그게 과부만 모여 사는 섬의 음란한 기운이라 여겼겠지만 넌 그냥 몸 좋은 일꾼.
나도 할머니 셋이 모여 사는 시골집에 취재 나갔다가 “때마침, 아주 우연히, 절대 의도한 건 아닌” 순간에 도착한 농산물 배송용 아이스팩 박스 수십개를 나른 다음 깻잎 따고 비닐하우스 햇빛 가리개 옮겨 다시 치는 부림을 당한 끝에 다음날 허리가 나가 드러누웠는데… 당시 이 젊은이 나이 38살, 시골 가면 나도 새파란 청춘.
여기에 시골 젊은이로서 지켜야 할 한 가지 도가 더 있으니, 잘 먹어야 한다. 춘삼이 군수 후보 대규(유해진)보다 한 가지 나은 점이 있다면 파김치를 먹을 줄 안다는 거다. 그렇다면 나는 시골 생활에 최적화된 인재로군, 못 먹는 게 없잖아? 물론 여기서 ‘먹는 거’에는 술도 포함된다. 얼마 전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막걸리 전문가가 말하기를, 막걸리는 일하다가 먹는 술 또는 일하고 나서 먹는 술이라고 한다. 그래, 농활 가서 논매고 밭매면서 가장 행복했던 건 난생처음 마셔본 낮막걸리였지. 그 후 한 대학생은 낮술의 수렁에 빠져 학업을 전폐하였으니….
이 두 가지 도에서 알 수 있듯 시골 생활에서 중요한 건 무엇보다 체력과 그 체력을 활용한 기술이다. <남쪽으로 튀어>의 해갑(김윤석)이 지붕에 올라 쇠파이프 휘두르는 자태를 보라, 대학에서 파이프를 처음 잡아본 도시 출신 학생운동가들은 결코 이를 수 없는 경지다. 그 늠름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친구 고향에 놀러갔다가 읍내에서 만난 시골 총각들과 시비가 붙었다는 친구의 회고담이 떠올랐다. “바로 사과했어.” “연약한 새끼.” “… 애들이 장비 들고 오더라고.” 그래, 진정한 남자라면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하는 법. 예전에 선배들도 그랬어, 시위 중의 으뜸은 농민 시위라고. 가끔 죽창도 나온다더라.
그러고보면 나는 시골 사람이 맞는 것도 같다. 화가 나면 일단 장비를 찾아… 어릴 적에 애용했던 건 교실 바닥 닦는 대걸레. 그리고 무슨 막일을 시켜도 먹을 걸 주면 꼬리를 흔들지(아이스팩 나르고 밭에서 갓 딴 호박이랑 가지 받아와서 된장찌개 끓여 먹었음, 아이 시골스러워). 하지만 내가 진짜 시골 사람인 건 그 호박에 들어간 시간과 노동이 보이기 때문이다.
먹는 건 10분인데 어찌하여 차리는 건 1시간인가. 평생의 의문을 풀지 못해 음식을 제법 잘하는 데도 불구하고(물론 여기엔 논란의 여지가 많다. 내가 만든 묵은지 생선조림을 먹은 친구가 그랬지. 어차피 생선조림에서 이렇게 맛있는 묵은지 맛만 날 거라면 비싼 생물 말고 통조림을 쓰는게 어때) 그냥 사먹는 내가 굳이 좋아하지도 않는 호박, 가지 된장찌개를 끓인 건 아까워서였다. 1개 800원짜리 풋호박이 1개 800원짜리 물건이 아닌 걸 아니까. 세상 그 어떤 작물도 저절로 자라지 않는다. 그러니까, 무언가 이루고 싶다면 우리는 기약 없는 수고를 쏟을 수밖에, 결과를 의심하면서도 찬바람 속에 서서 그럴 수밖에, 다른 수가 없다.
술과 노래만 있으면
기나긴 시골의 밤을 위해 준비하면 좋을 두세 가지 장비
마음 맞는 막걸리
<워낭소리>의 시골 어르신들에 의하면 막걸리를 마신 소는 벌떡벌떡 잘도 일어나서 일도 잘한다고 한다. 그건 사람도 마찬가지여서, 도저히 더는 못하겠다며 잡초 대신 나를 한번 뽑아보라며 밭두렁에 엎어진 나도 막걸리만 주면 벌떡벌떡 잘도 일어나서 일하러 달려가니까, 하루가 매우 긴 시골에서의 나날을 위해 마음 맞는 막걸리는 필수겠다. 막걸리보다 1.5배쯤 독하고 진한, 집에서 담근 농주라면 더욱 좋겠고.
마음 맞는 고기
막걸리에는 김치고, 김치에는 수육이고, 수육에는 막걸리니, 참으로 아름다운 삼위일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김봉두 선생님을 맞이하여 벌어진 <선생 김봉두>의 마을 잔치에 돼지고기 수육이 없었다면 상다리가 휘어진들 그 무슨 보람이 있단 말입니까. 해가 지면 끝나고 해가 뜨면 시작되는 시골의 밤은 길고도 길어, 막걸리만으로 부족하다면 고기가 그 길을 도울 것이다.
마음 맞는 노래
음주가 준비되었다면 다음은 가무, 시골집의 필수품은 노래방 기계다. 업그레이드도 필요 없다, 어차피 부르는 노래만 부르거든. 3년간 농활을 다닌 15년 뒤 농촌 취재를 시작했지만 노래방 기계의 마이크를 잡으면 그때나 지금이나 <소양강 처녀>, 나의 20년 농촌 사운드트랙. 차라리 밤이 낮이었으면 좋을 <나의 결혼원정기>의 노총각들도 노래방 기계를 벗 삼아 긴긴 밤을 지새우니, 술과 노래가 있는 시골의 밤은 쓸쓸하고도 찬란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