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인물들’이라는 영화의 제목처럼, <히든 피겨스>는 이제까지 한번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이 없었던 미 항공우주국(NASA)의 세 흑인 여성 과학자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우주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감과 인종차별이라는 고루한 제도가 공존했던 1960년대, 시대의 혼란으로부터 새로운 변화와 가능성을 감지하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갔던 여성들이 있었다. 그녀들의 실제 삶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제작된 이 영화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히든 피겨스>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와 더불어 뉴욕에서 진행된 주요 제작진과의 기자회견을 전한다.
“연구의 전쟁!” 1950년대 중반, 미국 국가항공자문위원회(NACA, 나사(NASA)의 전신)의 주간 직원 회보를 장식했던 문구다. 이 냉전 시대의 미국에서는 소리 없는 전쟁이 한창이었다. 미국과 소련의 스파이들이 가슴팍엔 총을,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적국을 활보할 때, 양국 최고의 지성들은 연구실에서 복잡한 공식과 씨름하며 이제껏 인류가 한번도 나아간 적 없는 미개척지, 우주로 인간을 쏘아올리기 위해 애썼다. 먼저 허를 찌른 건 소련이었다. 1957년 10월4일, 소련은 83kg가량의 금속 구체, 스푸트니크 위성을 지구의 궤도에 안착시키는 데 성공했다. 미국인들은 96분에 한번씩 소련의 위성이 그들의 머리 위를 지나간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공포에 떨었다. 미국 정부로서는 그냥 두고볼 수만은 없었다. 우주 탐사의 선두를 빼앗겼다는 굴욕감과 두려움은 우주 연구에 대한 미국의 조바심을 재촉했다. 미국 최고의 항공역학자들이 한데 모인 엘리트 기관, 랭글리(나사의 부속기관)는 이 연구의 중심에서 자국의 우주 탐사를 이끌었다.
약자들이 겪은 일, 약자들이 바꾼 일
그런데 빠른 시일 내에 모두가 놀랄 만한 기술적 진보의 결과물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미국의 조바심은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열어젖혔다. 위성을 쏘아올릴 수만 있다면, 미국인을 달에 보낼 수만 있다면, 누구든지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점차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그동안 사회적으로 소외되어왔던 변방의 인물들이 우주 탐사 계획의 중심부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미국의 인종차별법에 고통받던 흑인들과 집안의 천사가 되길 강요받았던 여성들이 바로 그런 존재들이었다. 남다른 두뇌와 뛰어난 수완으로 무장한 이들은 오직 실력과 근성으로 이들을 더 먼 곳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았던 사회적 유리 천장을 깨부수기 시작했다. 영화 <히든 피겨스>는 수많은 차별이 만연했던 1960년대의 미국, 우주 탐사 경쟁과 더불어 촉발된 성과 우선주의를 통해 발견할 수 있었던 새로운 능력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그들 가운데에서도 사회적 약자 중 약자였던 1960년대 흑인 여성 과학자들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몇 가지 의미에서 <히든 피겨스>의 오프닝 시퀀스는 특별하다. 1961년 미국 남부 버지니아주의 햄프턴, 인적 없는 도로에 세명의 흑인 여성이 있다. 함께 차를 타고 출근하던 도중 엔진에 이상이 생겨 차가 멈춰버렸고, 그녀들은 어쩔 수 없이 길 위에 머물게 된다. 그때 저 멀리서 순찰 중이던 백인 경찰의 차가 다가온다. 인종차별이 만연하던 1960년대의 미국 남부를 시대적 배경으로 정한 영화에서, 흑인 여성들과 백인 남성 경찰이 마주하는 장면은 (오랫동안 축적된 영화적 레퍼런스로 인해) 긴장감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녀들이 미 항공우주국 나사의 직원이라는 말을 들은 경찰은 ‘소련 빨갱이’들보다 미국의 우주비행사들을 우주로 빨리 쏘아올려달라는 말과 함께 에스코트를 자청한다. “흑인 여성 세명이 백인 경찰을 추격하고 있는 거라고. 버지니아주 햄프턴 국도에서. 1961년에! 얘들아. 주님이 기적을 일으킨거야!” 백인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메리(저넬 모네이)는 말한다.
이 대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히든 피겨스>는 남성과 여성의 권력관계를 일방향적으로 그리는 영화가 아니며, 그동안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를 다뤘던 수많은 할리우드영화들이 답습해왔던 방식으로 흑백 갈등을 보여주는 작품도 아니다. 개인의 능력에 대한 평가가 때로는 사회적 편견과 차별보다 중요하게 여겨지기도 했던 시대, 그 시대적 분위기를 영리하게 간파하고 자신이 설 자리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 이 영화의 목적이 있는 것 같다. 그 때문인지 <히든 피겨스>는 1960년대 미국 사회의 풍경을 광범위하게 보여주기보다 나사라는 연구 기관에서 흑인 여성 과학자들이 겪게 되는 다양한 에피소드에 보다 주목한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함께 차에 타고 있던 세 여성, 캐서린(타라지 P. 헨슨)과 도로시(옥타비아 스펜서), 메리가 중심인물이다. 어린 시절부터 수학 천재로 불리던 캐서린은 나사의 랭글리 센터에 인간 컴퓨터(각종 수학 공식을 계산하는 이들을 그렇게 불렀다)로 고용되고, 실력을 인정받아 랭글리의 핵심 인원들이 속해 있는 ‘우주 임무 그룹’의 일원이 된다. 흑인 과학자들이 일하는 나사의 서쪽 연구동에서 관리자로 일하는 도로시는 흑인 과학자들의 권리를 사수하기 위해 힘쓰는 동시에 IBM 컴퓨터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고민한다. 메리는 그동안 흑인은커녕 백인 여성들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던 엔지니어의 영역에 도전한다.
희망차고 긍정적으로
캐서린과 도로시, 메리는 실존 인물이다. 영화 <히든 피겨스>는 미국 작가 마고 리 셰털리의 동명 논픽션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다. 마고 리 셰털리는 나사 출신의 아버지를 통해 어린 시절부터 과학자들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나사에서 일했던 여성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당시에 그곳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증언과 아카이브 자료를 통해 그녀들이 놀라운 성취를 거두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나는 점점 더 그들을 기록하는 것 이상을 원하게 되었다. 나는 그들의 성취에 걸맞은 웅대한 서사, 라이트 형제나 우주비행사들, 알렉산더 해밀턴과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누리는 것 같은 미국 역사의 한자리를 그들에게 주고 싶었다. 개별적 역사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아는 이야기의 일부로, 가장자리가 아니라 중심에 선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들이 흑인이라거나 여자라서가 아니라 미국 서사시의 중요한 일부이기 때문이었다.” 논픽션 <히든 피겨스>를 집필한 이유에 대해 셰털리는 이렇게 썼다. 나사의 여성 과학자들, 특히 흑인 여성 과학자들이 속해 있던 서쪽 연구동에서 이뤄낸 성취를 구체적으로 기술하는 데책의 많은 부분을 할애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업적을 조명하려면 그들에게 나름의 신화를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셰털리는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영화 <히든 피겨스>의 감독 데오도르 멜피는 마고 리 셰털리의 논픽션에서 가장 돋보이는 성취를 거둔 세명의 인물을 선별했고 그녀들이 바로 캐서린과 도로시, 메리다. 영화 또한 여성 과학자들에게 웅장한 서사를 부여하길 원했던 셰털리의 접근 방식을 좇는다. <히든 피겨스>에서 보는 이들에게 가장 큰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대목은 이 세 여성이 자신의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취를 이룰 때다. 나사의 내로라하는 천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캐서린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만 하는 대형 칠판에 수학 공식을 순식간에 써내려가는 대목은 황홀하다. IBM 컴퓨터를 남몰래 공부해왔던 도로시가 어리바리한 남성들 사이에서 입력값을 정확하게 뽑아내려가는 장면은 통쾌하다. 엔지니어에 지원하기 위해 백인들만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고등학교의 야간 수업을 청원하며,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판사를 논리로 설득하는 메리의 모습은 카리스마가 넘친다. 이제껏 1960년대의 흑인 여성을 다룬 미국영화의 어떤 태도를 상기해본다면 <히든 피겨스>가 그녀들이 몸담고 있던 환경과 그녀들이 거둔 성취를 조명하는 방식은 짐작보다 훨씬 희망차고 긍정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영화의 접근 방식이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하더라도, <히든 피겨스>는 그동안 백인 남성 중심의 서사를 통해서나 주로 목도할 수 있었던 능력자들의 성장담을 흑인 여성 과학자들의 것으로 확장했다는 점에서 기억해야 할 만한 작품이다. 흑인과 퀴어, 성장영화의 서사를 결합시켜 새로운 감각의 영화로 완성시킨 <문라이트>의 경우처럼, 한동안 영화적으로 소외받아왔던 블랙컬처와 백인들이 주로 소비했던 할리우드의 대중적인 서사를 융합하려는 시도는 최근 블랙 시네마의 중요한 화두이며, <히든 피겨스> 역시 그러한 맥락의 한가운데 놓인 영화인 듯하다.
남성 조력자를 어떻게 그릴 것인가
드라마틱한 필치로 묘사한 흑인 여성 과학자들의 성취와 더불어 <히든 피겨스>에서 인상적인 건 그녀들이 유리 천장을 부수는 데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는 조력자들의 존재다. 케빈 코스트너가 연기하는 ‘우주 임무 그룹’의 리더 엘 해리슨은 자신의 입지를 위협받을까 두려워 일 잘하는 여성 수학자(캐서린)를 견제하는 수석 과학자(스태퍼드역·짐 파슨스)의 불안감 따위에 신경쓸 마음의 여유가 없다. 캐서린의 연인 제임스는 일터에서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캐서린을 위로해주고 지지해주는 든든한 동반자다. <히든 피겨스>는 완벽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여성의 앞길을 방해하지도 않는 남성 조력자들의 존재감이 그녀들의 성취에 어떻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암시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 작품은 1960년대 괄목할 만한 성취를 거둔 커리어 우먼들의 성공담을 빌미로, 지금 시대에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여성과 인종에 대한 차별과 편견에의 도전을 은밀하게 유도하는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다양성 이슈가 그 어느 때보다 화두인 요즘, <히든 피겨스>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