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스페셜] 반문화로 문화를 잠식하다
2017-04-10
글 : 김완 (<한겨레> 탐사팀 기자)
사진 : 최성열
박근혜 구속영장청구서 통해 본 영화계 블랙리스트 전말-“정부에 반대하는 모든 작품에 대한 지원 배제”

“‘문화융성’ 시대를 국민 여러분과 함께 열어가겠습니다.” 2013년 2월 25일, 박근혜 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문화는 경제, 창조, 행복 과 함께 취임사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였다. 그로부터 정확히 4년1개월 뒤, 박근혜는 소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관련 범행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한겨레21>과 <씨네21>이 함께 입수한 박근혜 구속영장청구서를 보면 문화계 관련 범죄 행위 적시는 총 26쪽에 달한다. 뇌물 혐의(60쪽) 다음으로 많다.

박영수 특검과 검찰의 수사는 한마디로 ‘문화융성은 없었다’로 요약된다. 헌법상에 보장된 ‘문화적 권리’와 문화기본법의 의무를 박근혜가 어겼다고 적시됐다. 박근혜 시대의 문화 행정은 문화적 가치 체계의 파괴였고, 정치적 입장에 따라 어떤 이들을 비국민으로 분류했다는 판단이다. 문화적 차별의 공고화 속에 문화의 가치로 호명됐던 ‘다양성, 자율성, 창조성’은 컨트롤 타워의 통제와 배제로 상실됐다. 피의자 박근혜가 그 모든 포괄적 범법 혐의의 정점이다. 수사 당국이 밝혀낸 ‘블랙리스트’에는 3천여 단체 8천여명의 개인이 포함돼 있다.

박근혜 구속영장청구서에 적시된 ‘문화계 블랙리스트’ 관련 범법 행위들을 보면, 2013년 초부터 2015년까지 청와대 업무 전체가 ‘블랙리스트’와 관련된 것이었나 싶을 정도다. 체육, 예술, 영화, 출판에 이르기까지 문화계 전반에 촘촘한 배제의 그물이 펼쳐졌다. 그 시작은 ‘정유라 이슈’, 체육계 단속이었다. 2013년 4월, 상주에서 열린 전국승마대회에서 최순실의 딸 정유라가 준우승에 그친 것이 발단이었다. 최순실은 정호성 대통령비서실 제1부속비서관에게 ‘박원오를 통해 승마계의 문제점을 파악하라’고 지시한다. 이후 청와대는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에 ‘대통령 관심사항이니 박원오를 만나 필요한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한다.

청와대의 지시는 승마협회 감사로 이어졌다. 느닷없는 감사 지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지 못했던 문체부 담당자들은 양비론적 감사 결과를 내놓았다. 감사 결과 보고 직후 담당자였던 노태강 체육국장과 진재수 과장은 바로 좌천됐다. 박근혜가 직접 “참 나쁜 사람이라고 하더라, 인사조치하라”고 지시했다. 최순실 국정 농단 전반에서 드러났지만, 최순실은 정유라 문제에 관한 자비가 없었다. 비선실세의 완력이 문체부 전체에 처음 전달된 게 노태강, 진재수에 대한 인사조치가 단행된 2013년 8월이었다.

검찰에 따르면 최순실은 평소 ‘진보 성향의 인물을 기피하였고, 현 정권과 코드가 맞는 성향이 인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했으며, CJ그룹 등에서 제작되는 콘텐츠들이 좌파적으로 편향되어 있다’고 생각해왔다. 최순실의 이 생각은 이후 김기춘 등을 통해 그대로 정부 정책이 됐다. 정부 체계로 보면 문체부 위에 청와대 정무수석실 그 위에 김기춘이었다. 김기춘은 2013년 8월 21일, 임명된 지 채 보름밖에 안 된 시점에 벌써 “종북세력이 문화계를 15년간 장악했다. CJ와 현대백화점 등 재벌들도 줄을 서고 있다. 사정을 서둘러야 한다”고 말한다. 김기춘의 말은 당시 대통령이 강조하던 ‘비정상의 정상화’의 핵심 과제였다.

이후 청와대 경제수석은 CJ 이미경 부회장을 직접 쫓아냈다. 문체부는 ‘좌파 지원 실태 조사’에 나섰다. 김기춘은 “중간 과정까지 보고하라”고 실무자들을 닦달했다. 이 과정에 대해 영화진흥위원회 한 직원은 “정부에 반대하는 모든 작품에 대한 지원 배제였다”고 말했다. 김기춘은 반복적으로 대통령의 ‘국가 개조 의지’를 설파했다. 청와대 비서관들은 ‘TF’를 만들어 ‘배고픈 우파’들을 위한 지원책 마련에 나섰다. 박근혜 정부의 문화융성은 불편한 이들을 좌파로 규정해 그 몫을 ‘위법’적으로 뺏고, 배고픈 이들로 지목된 우파에 ‘탈법’적으로 몫을 몰아주는 악순환이었다.

이 악순환이 ‘창조문화융성’이란 국정 기조로 오래 뒤틀려 전시됐다. 검찰수사 결과를 보면 합법적 ‘정책의 탈’을 쓰고 모태펀드에까지 개입할 정도로 전방위적이었다. 사건 검열과 투자 배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모태펀드를 운영하는 (주)한국벤처투자에까지 낙하산을 뿌렸다. 최초로 모태펀드 정부 개입 문제를 제기했던 김종대 정의당 의원은 이에 대해 “단순히 표현의 다양성과 자율을 훼손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며 “벤처 생태계 자체를 왜곡시켰을 가능성을 수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모태펀드의 총규모는 2016년 10월 말을 기준으로 2조4212억원이며 민간자금이 결합된 자펀드는 14조5672억원에 이른다.

왜 이런 무모한 일이 기획, 실행된 것일까. 그 답은 어쩌면 박근혜가 내려가고 떠오른 세월호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김종대 의원은 ‘블랙리스트’ 작성이 집중된 시기를 주목해야 한다며 “세월호 사건 이후 시민들로부터 사실상 식물정권 판정을 받은 박근혜 정권이 더이상 물리적으로 질서를 통제할 수 없게 되자 사상과 문화를 장악해 지배력을 행사하려 했던 것”이라고 진단했다. 반문화로 문화를 잠식하는 전근대적 회귀가 박근혜 시대엔 ‘애국주의’로 불렸다.

박근혜 구속영장청구서 등을 통해 확인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타임 테이블

*실수비: 대통령비서실 비서실장 주재 수석 비서관 회의 / *대수비: 대통령 주재 수석 비서관 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