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올린 예산안에는 가족영화 제작지원 사업이란 항목 자체가 아예 없었습니다.”
2015년 영화진흥위원회(위원장 김세훈, 이하 영진위) 예산 작성 책임자급인사였던 한 영진위 고위 관계자의 증언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2015년 시작된 ‘가족영화 제작지원 사업’은 총사업비 규모가 연간 50억원에 달한다. 영진위가 부산국제영화제에 연간 8억원 정도 지원하고 독립다큐멘터리 전체 제작지원 예산이 1억5천만원인 점을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액수다. 그런데 이 사업의 실무 조직인 영진위 내부에선 예산이 확정될 때까지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정부 예산은 4월에 부처별로 자체 예산안을 짠 뒤 5~6월에 기획재정부(이하 기재부)가 국가재정운용계획을 확정한다. 이후 7~8월에 다시 부처간 조정 과정을 거쳐 10월에 정부안을 확정해 국회에 보낸다. 이런 관례에 비춰본다면 가족영화 제작지원 사업은 영진위가 예산을 기안한 2014년 4월 이후 누군가가 중간에 ‘끼워넣은’ 셈이다. 영진위관계자는 “(가족영화 제작지원 사업은)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와 기재부가 결정한 예산”이었다며 “문체부와 기재부에 동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누군가가 이미 2014년께 우파 영화, 이른바 ‘건전 애국영화’ 지원 기획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같은 대담한 기획은 누가 했을까. 해답은 <한겨레21>과 <씨네21>이 함께 입수한 검찰의 ‘박근혜 사전 구속영장청구서’(이하 청구서)에 나와 있다.
청구서를 보면, 2014년 4월 당시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은 신동철 소통비서관에게 “좌파에 대한 지원은 많은데 우파에 대한 지원은 너무 없다. 중앙정부라도 나서서 지원하라”고 지시한다. 이 지시를 받아 2014년 4월부터 5월 하순까지 ‘국민소통, 행정자치, 사회안전, 경제금융, 교육, 문화체육, 보건복지, 고용노동’ 청와대 비서관들이 참여하는 ‘민간단체 보조금 태스크포스(TF)’가 꾸려진다. TF는 좌파에 지원되는 이른바 ‘문제 예산’을 솎아내 배제하는 ‘부처별 관심 예산’(총 130건)을 추린다. TF 활동은 ‘문제단체 조치 내역 및 관리방안’이란 제목의 보고서로 정리돼 김기춘 비서실장에게 직접 보고됐다. 실행 책임은 박준우 정무수석이 맡았다가, 2014년 6월 후임자인 조윤선 수석에게 인계됐다.
복수의 영진위 관계자들은 우파 영화를 만들라는 윗선의 지시는 이명박 정부 때부터 있어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영화 제작은 ‘산업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 투자자 없이 ‘신념’만으로 만들어질 순 없다. 우파 영화들이 활성화되지 못한 배경이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변호인>(감독 양우석·출연 송강호, 2013) 이후 산업 논리를 ‘직접 예산 지원’으로 돌파하려 했다. 가족영화 제작지원은 ‘메인 투자사’를 구하지 못해 고사되는 우파 영화에 박근혜 정부가 내린 동아줄이었다. 영진위의 직접 지원금을 주요 투자금 삼아 한국벤처투자에서 운영하는 문화·영화 분야 모태펀드로부터 부분 지원을 따내는 경로가 만들어진 셈이다.
이를 위해 청와대는 모태펀드 운용에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임원을 교체하는 추가 조처도 취한다. 그 결과 신상한 SH필름 대표가 2014년 10월께 한국벤처투자 입사를 통보받는다. 신씨가 저작권을 갖고 영화화를 추진하던 <통영의 딸>은 이후 제작자와 제목을 바꿔(<사선에서>, 제작 디씨드) 2016년 가족영화 제작지원 사업작으로 선정됐다. 이 영화는 이후 모태펀드를 통해 추가로 35억원을 지원받았다.
2015년과 2016년에 걸쳐 총 6편의 영화가 가족영화 제작지원을 받았지만, 아직 단 한편도 개봉하지 못했다. 통상적으로 투자에서 영화 제작까지 1년 정도를 잡는다면 어떤 영화들은 개봉 자체가 불투명하다고 영화인들은 입을 모은다. 이들 영화에 쓰인 총예산 규모는 49억4천만원이다. 이중 도대체 얼마를 ‘배고픈 우파’들이 ‘인 마이 포켓’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