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스페셜] <옥자>는 내 첫 번째 사랑영화
2017-04-12
글 : 김혜리
사진 : 오계옥
오는 6월, 여섯 번째 신작 <옥자> 공개하는 감독 봉준호

영화는 집단예술이고 그래서 때로 예기치 못한 괴력을 발휘한다. 그럼에도 누군가 한 사람의 개성과 취향이, 해일처럼 영화를 한쪽으로 다짜고짜 밀어갈 때 우리는 그가 감독이건 각본가이건 배우이건 해당 영화의 작가라고 여긴다. 봉준호 영화의 한복판에는 징그러운, 그리고 동시대 한국 사회를 징그러워하는 한 내성적인 감독의 초상이 버티고 있다. <플란다스의 개>(2000), <살인의 추억>(2003), <괴물>(2006), <마더>(2009)는 한국적 난장판의 풍경에 직면해 그 내부에서 영화적인 질서를 지어낸다. 이 과정에 장르가 끌려 들어온다. 그러나 봉준호에게는 본인이 감각하는 역사와 사회를 미국발 장르에 맞춰 재단할 의향이 없기에 흥미로운 게임이 시작된다. 이 고집스런 구체성과 지역성은 정밀한 영화적 언어를 경유해 그의 영화를 시네마의 세계 지도에서 흥미로운 보편적 텍스트로 만든다. 역사적 변증법을 SF로 옮겨놓은 <설국열차>(2013)를 포함해 그의 영화는 지극히 동시대적이다. 봉준호 영화의 서사는 현실적 실패이자 영화적 성공인 지점에 아슬아슬하게 착지한다. <플란다스의 개>의 1990년대 말 복도식 아파트 단지부터 <설국열차>의 디스토피아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화는 점점 더 연표에서 벗어나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박찬욱, 최동훈, 김지운의 영화처럼 신화나 장르의 영토로 넘어가지 못한다. 아니, 애초에 넘어갈 의사가 없다. 요컨대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움직이는 동력은 절대적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보다 상대적이고 구체적인 추함에 대한 매혹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보상은 해방감이 아니라 구속의 신랄한 확인이다.

내가 앞에서 ‘징그럽다’고 쓴 까닭은, 봉준호 영화를 관통하는 점액질의 육체성에도 있다. 그의 영화는 언제나 가진 것이 몸뿐인 약자의 분투를 그린다. 살아 있는 인간을 연료 삼아 달리는 <설국열차>, 체내에 품었던 타인인 자식에게 고착된 모성의 그늘을 파고드는 <마더>, 괴물의 배를 갈라 딸의 죽음과 의붓아들의 생존을 확인하는 <괴물>, 피해자 여성의 몸에 삽입된 복숭아씨와 소녀의 시체에서 떼낸 반창고 자국으로 남은 <살인의 추억>, 개 짖는 소리를 신호로 각자의 세계가 충돌하는 <플란다스의 개>. 봉준호 영화의 내러티브는 다분히 목표를 지향하는 고전적 서사지만 그 영화적 귀결에는 관념 대신 끈적한 전율이 기다린다. <설국열차>의 결말에 대해 나의 취재수첩에 남아 있는 봉준호 감독의 표현은 다음과 같다. “커티스는 이상적 지도자로 삼았던 길리엄과 증오해온 윌포드가 동일체임을 아는 순간 균열을 일으킵니다. 커티스를 회유하는 윌포드는 그 갈라진 틈에, 길리엄이 자르라고 커티스에게 당부했던 바로 그 혓바닥을 꽂는 겁니다.” 예술가 전기 작가라면, 포커페이스에 가까운 단조로운 억양으로 ‘외설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는 이 감독에게 집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여섯 번째 장편은 6월 말 넷플릭스와 (제한된 기간 동안) 극장에서 개봉할 돼지와 소녀의 사랑 이야기 <옥자>다. 모자 관계를 원초적으로 재해석한 <마더>에 이어 깊숙이 베어낸 사랑의 단상을 예감케 한다. 비 내리는 만우절에 만난 봉준호 감독과의 대화는 거짓말과 집착, 그리고 그것들을 끌어안는 영화를 향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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