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스페셜] ‘에세이영화’라는 어떤 영화사적 흐름에 대하여
2017-04-13
글 : 장영엽 (편집장)
장 뤽 고다르의 <영화사(들)>.

수년 전부터 영미권 영화매체와 평단에서 ‘에세이영화’(Essay Film)라는 용어가 적잖이 언급되기 시작했다. 이건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개념은 아니다. 오슨 웰스와 크리스 마르케, 장 뤽 고다르와 아녜스 바르다…. 20세기 영화사에서 주목할 만한 족적을 남긴 수많은 시네아스트들이 이러한 영화 만들기의 방식을 구축하거나 도전한 바 있다. 하지만 가장 진보적이고 대담한 영화 만들기의 방식 중 하나였던 에세이영화가 지금 이 시점에서 각광받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최근 에세이영화가 주목받는 이유와 더불어 20세기 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주목할 만한 에세이영화의 흐름을 되짚어봤다.

에세이영화. 영화 만들기의 방식을 지칭하는 수많은 용어 중에서 에세이영화만큼이나 모호하고 언뜻 보아서는 그 뜻을 짐작하기 어려운 대상도 드물 것이다. 누군가는 산문의 형식을 취한 영화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문학적인 영화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에세이’라는 단어를 되새기며 텍스트가 충만한 어떤 작품을 짐작해볼 수도 있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에세이영화는 지금 언급한 모든 것들이 될 수 있으며 동시에 그 어떤 것에도 해당되지 않을 수 있는 영화 만들기의 방식이다. 문학평론가 올더스 헉슬리는 문학 장르에서의 에세이를 두고 “거의 모든 것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말하는 문학적 장치”라고 말한 적 있는데, 이 말을 에세이영화에 적용하면 “거의 모든 것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영화적 장치”라고 할 수 있을 듯싶다.

지가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

사유를 중요시한다는 특징

문학적 의미에서의 에세이가 일기와 편지, 감상문과 평론 등 광범위한 산문 양식을 포괄하듯, 에세이영화는 직접 촬영한 실사영상과 각종 자료화면, 극영화의 푸티지 등 다양한 시청각적 장치를 활용한다. 또 에세이영화는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때로는 픽션과 논픽션을 구분하는 세간의 기준에 질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어떤 형식이나 장르에 얽매이지 않는 에세이영화의 이러한 특성은 때때로 영화가 다른 예술과 구별된다는 기존의 통념에 반기를 든다는 점에서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사유와도 통하는 점이 있다. 랑시에르는 영화의 본질을 카메라의 기계적 특성으로부터 찾았던 1920년대 프랑스 아방가르드 영화 담론, 또는 창조적 예술 행위로서의 편집을 뜻하는 몽타주가 영화의 본질이라 믿었던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과 지가 베르토프 등의 관점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는 문학과 사회, 정치 등 우리의 삶과 예술을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대상이 영화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때로는 충돌하고 대립하는 과정에서 영화가 나름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영화와 여타 예술을 엄격하게 구별하고 위계를 세우기보다 예술들 사이의 상호작용으로부터 오는 조화와 대립의 가능성을 인정하려는 랑시에르의 태도가 영화사 안에서 에세이영화가 시도하고자 했던 해체와 위반, 혼종과 확장의 노력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이미지의 운명>에서 “다른 예술들의 일련의 전유”를 유려하게 보여준 작품으로 꼽은 영화 역시 에세이영화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장 뤽 고다르의 <영화사(들)>가 아니었던가.

에세이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한편의 영화에서 장르와 형식을 넘나들며 다양한 시도를 하는 모든 영화들을 에세이영화로 간주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다큐멘터리에 극영화에 등장할 법한 인물과 허구의 서사가 개입한다고 해서, 또는 극영화에 다큐멘터리적인 필치를 가미한다고 해서 에세이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장르에서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것은 ‘사유’다. 많은 비평가들은 에세이영화라는 단어의 기원이 16세기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의 작품 <수상록>(Essais)의 원제로부터 비롯되었을 거라 짐작한다.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 문명과 자연, 젠더와 정치, 종교와 법 등 인생의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해 탐구하고 성찰하는 이 작품의 핵심은 사실 자기 자신에 대한 주체적 판단의 중요성을 인지하는 것이다. <수상록>이 시사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에세이영화를 만드는 작가들의 가장 큰 특징은 예술가로서의 성찰과 사유의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주관성과 객관성을 넘나드는 내러티브의 방식,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역동적인 시점의 변화,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실험적 영상의 복합적인 활용은 모두 필름 에세이스트들 자신과 관객을 위한 사유와 성찰의 수단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핸즈워스 송스>

사유를 중요시하는 에세이영화의 특징은 사회성과 정치성을 적극적으로 띤 일련의 에세이영화들과 사회적 리얼리즘 영화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일례로 장 뤽 고다르의 <제인에게 보내는 편지>(1972)는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시기, 베트남을 방문한 제인 폰다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으로부터 모티브를 얻은 영화다. 당시 <카이에 맑스-레닌주의자>의 편집장 장 피에르 고랭과 어울리며 급진적 영화단체 지가 베르토프 집단을 결성한 고다르는 제인 폰다를 조명한 몇장의 사진, 그리고 그녀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는 자신과 고랭의 보이스오버만으로 영화를 완성했다. 병사들 앞에서는 슬픈 표정을 짓다가 다른 사진에서는 미소 띤 모습이 포착된 제인 폰다의 사뭇 다른 태도를 보여주며 고다르는 그녀의 위선이 부르주아와 자본주의의 이중성을 대변하고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이 작품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 에세이영화라는 장르 안에서 작가의 정치성은 명확하지만 선전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구현된다. 한편 블랙오디오필름 컬렉티브의 <핸즈워스 송스>(1986)는 지난 1985년 런던과 핸즈워스에서 일어난 일련의 폭동 뒤에는 “다른 이야기들의 유령”이 숨어 있다고 제안하는 영화다. 이처럼 에세이영화의 자장 안에서 가장 중요한 건 명확하고 뚜렷한 목적성을 지닌 특정한 메시지가 아니라 창작자가 사유를 전개하기 위해 채택한 방식과 사유가 전개되는 흐름을 관찰하는 데 있다. 에세이영화를 얘기할 때 ‘자기 성찰적’이라는 표현이 유독 자주 등장하는 것은 창작자의 사유를 중시하는 이 장르의 특징과 연관이 있다.

<오톨리스 Ⅲ>

더 많은 수의 필름 에세이스트들이 출연하리니

최근 에세이영화가 다시금 세계 영화사의 흐름 속에서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이 세계에 대한 정치적, 예술적, 민족적, 철학적 사유에 대한 갈증과 자아 성찰에 대한 열망과 맞닿아 있다고 많은 비평가들은 말한다. 영화평론가 출신의 에세이영화 감독 케빈 B. 리는 영국영화협회(BFI)에 기고한 글에서 에세이영화의 필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에세이영화의 중요한 점 중 하나는 스크린 밖의 우리가 어디에 위치해야 할 것인지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 있다. 에세이영화는 영화와 사회의 관계를 성찰하며 물질적인 세계로 우리의 관심을 돌려놓는다. 우리는 더이상 스크린에만 눈을 붙일 수 없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에세이영화를 통해) 리얼리티와 다시 결합하게 된다.” 그의 말대로 에세이영화는 영화를 통해 세계와 자아의 관계를 고찰하고 재정립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일례로 아티스트 그룹 오톨리스의 2009년작 <오톨리스 III>는 샤티야지트 레이의 미완성 SF영화 시나리오 <에일리언>(1967)을 허구적으로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저작권이 존재하는 디지털 가상환경에 거주하며 자신이 영화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수단을 모색하는 영화 속 인물들은 잊혀진 과거의 상상력과 동시대의 기술적 사안들에 대한 다양한 논점을 제공한다. 이미지를 통해 동시대 사회를 고찰하는 방식에 대해 지속적으로 탐구해온 독일의 거장 하룬 파로키의 작품 역시 그의 말대로 “스크린 너머로 이미지의 의미망을 확장하는” 과정의 일환이다. 직업소개소와 쇼핑몰 사업, 공장과 전쟁 포로 수용소(아우슈비츠), 성인잡지 표지 촬영장 등을 조명하는 그의 에세이영화는 현실적인 공간과 이미지들로부터 우리가 평소 깨닫지 못했던 사유를 이끌어낸다.

하룬 파로키의 <세계 이미지와 전쟁의 비명>.

디지털 기술의 발전에 따라 대중이 이미지와 짧은 영상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는 점도 에세이영화가 각광받게 된 또 다른 이유라고 할 만하다. 각종 SNS에 기능적으로 내재된 시청각 프로그램을 통해 21세기의 대중은 개인의 일상적인 감정을 그 어느 때보다 빈번하게,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한때 영상 작가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일련의 시청각적 요소들이 만인이 소유하고 나눌 수 있는 대중적 표현과 소통의 수단이 된 것이다. 비평가들은 다가오는 세대에게 영상 에세이를 작업한다는 건 더더욱 직관적인 삶의 방식이 될 거라고 말한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이 만든 영상을 자유롭게 공유하고 또 재가공할 수 있는 시대의 등장은 영상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다양한 예술적 시도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모색하는 더 많은 수의 필름 에세이스트들이 출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누구나 편집 애플리케이션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고, 유튜브와 트위터,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이 시대, 성찰과 사유의 영상 예술인 에세이영화는 어디로 나아가게 될까. 이 매력적인 하이브리드 장르 예술의 한계가 사뭇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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