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영화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다. 한 세기를 거치며 이 장르에 주목할 만한 족적을 남긴 에세이스트와 그들의 작품을 시대별로 정리해봤다.
1. <카메라를 든 사나이>(Человек с Киноаппаратом) 감독 지가 베르토프, 1929
“나는 오직 나만 볼 수 있는 세계를 당신들에게 보여주는 기계다.” ‘키노-아이’(영화-눈)라는 철학으로 유명한 지가 베르토프의 대표작. 소비에트연방의 다양한 도시에 사는 시민들의 일상을 조명한 무성영화다. 카메라를 든 남자가 도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찍는다. 베르토프는 이때 영화를 촬영하는 남자의 모습과 카메라가 촬영한 필름, 그 필름을 편집하는 모습을 점진적으로 보여주며 한편의 영화가 완성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극영화적인 서사와 기존의 영화에 늘 등장하던 자막을 배제한 이 작품은 관객으로 하여금 새로운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게 했다. 현실 모방이 아니라 현실 변혁을 꿈꿨던 급진적인 감독, 지가 베르토프의 연출관을 알 수 있는 작품.
2. <니스에 관하여>(A Propos de Nice) 감독 장 비고, 1930
<니스에 관하여>를 얘기할 때면 늘 <카메라를 든 사나이>가 함께 언급되는데, 그건 지가 베르토프 감독의 형제이기도 한 보리스 카우프만이 이 영화의 촬영을 맡았기 때문이다. <카메라를 든 사나이>가 소비에트연방 도시의 일상을 조명했다면, <니스에 관하여>는 프랑스 니스의 상류사회를 포착한다. 관광지로 유명한 니스의 명소와 관광객, 상점과 아름다운 여인들은 일견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프랑스 감독 장 비고는 이 화려하고 풍요로운 부르주아 문화 속에 담긴 현실 도피와 빈부 격차의 알레고리를 포착해내려 애쓴다. 격렬하게 춤추는 여인들의 모습으로부터 공허함과 리듬감을 함께 발견할 수 있는, 묘한 영화.
3. <거짓의 F>(A Fake for F) 감독 오슨 웰스, 1973
“그 영화에 대한 모든 건 트릭이다.” 한때 H. G. 웰스의 소설 <우주전쟁>을 라디오 드라마로 만들어 미국인을 패닉으로 몰아넣었던 오슨 웰스는 거짓말의 대가다. 그런 그가 연출한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 <거짓의 F>는 스페인 이비자섬에 사는 희대의 사기꾼 두명의 일상을 조명한다. 피카소나 마티스, 벨라스케스 등 유명 작가의 작품을 완벽하게 모사하는 사기꾼 화가의 작품은 전문가들에 의해 진품으로 취급받는다. 진실과 거짓, 원본과 복제의 관계를 탐구하고 질문을 던지는 이 작품은 “예술은 진실을 이해하기 위한 거짓말”이라 믿었던 웰스의 예술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작품이다. 오슨 웰스가 이 작품을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개인적 에세이라 불렀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4. <태양 없이>(Sans Soleil) 감독 크리스 마르케, 1982
스스로를 ‘에세이스트’라 일컬었던 크리스 마르케의 걸작. 한 여자가 크리스라는 이름의 친구가 보낸 편지를 읽으며 회상에 잠긴다. 전세계를 여행하는 카메라맨으로서의 크리스가 친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편지를 읽는 친구의 개인적인 기억, 1980년대의 일본과 제3세계 국가인 기니비사우라는 배경이 내포하고 있는 죽음과 전쟁의 그림자가 켜켜이 쌓이며 완전히 새로운 정서를 만들어낸다. <태양 없이>는 기억에 천착하는 크리스 마르케의 관심사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한데, 평온한 일상을 단숨에 죽음이 아른거리는 섬뜩한 공포의 시공간으로 치환해버리는 기억의 파급력을 실감할 수 있는 작품.
5. <세계 이미지와 전쟁의 비명>(Images of the World and Inscription of War) 감독 하룬 파로키, 1989
1944년 4월 4일. 미군은 7000m 상공에서 한 공장을 촬영한다. 그 부근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공장의 사진을 촬영한 지 33년이 지난 뒤에야 그 부근에 아우슈비츠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인류 역사에 깊은 생채기를 남긴 역사적인 건물이, 왜 3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이나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한 걸까? <세계 이미지와 전쟁의 비명>은 바로 이 질문에 주목한다. 아우슈비츠의 지리적 위치로부터 시작해 짐작보다 편협한 인간의 시각과 파로키의 변함없는 관심사인 테크놀로지의 역사에 대한 고찰을 씨줄, 날줄로 엮은 다큐멘터리.
6. <로스앤젤레스 자화상>(Los Angeles Plays Itself) 감독 톰 앤더슨, 2003
원제를 직역하면 ’그 자신을 연기하는 LA’ 정도 되려나. 도시를 조명한 에세이영화는 많다. 하지만 도시와 영화의 상관관계를 조명한 작품은 없다시피하다. 할리우드가 위치한 도시. 한해에만 수많은 스타들이 발굴되고 선택받지 못한 누군가는 쓸쓸히 떠나기도 하는 별들의 고향. 톰 앤더슨 감독은 이처럼 수많은 영화적 의미망을 가지고 있는 도시 LA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한다. 이 작품이 흥미로운 점은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 LA의 정체성을 영화산업의 측면에서 고찰한다는 점이다. LA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형성한 과거 영화산업의 역사와 더불어 LA라는 지리적인 풍경이 어떻게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수많은 영화들에 영향을 주었는지, 또 더 나아가 LA에 몸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를 얘기하는 <로스앤젤레스 자화상>은 영상으로 새로 쓴 LA 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