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리 나스랄라 감독은 이집트의 사회파 감독으로 명성을 쌓았다. 어떤 이들은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고 상류층의 비틀린 욕망을 고발하는 그를 두고 ‘중동의 켄로치’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유스리 나스랄라는 근본적으로 삶을 포착하고 가감 없이 드러내는 이야기꾼이다. 그가 자아내는 건 이야기이지 메시지가 아니다. 다만 그렇기에 어떤 리얼리즘 영화보다 강렬하고 솔직한 방식으로 현실을 반영한다. 6회 아랍영화제의 마스터 클래스를 위해 한국을 방문한 유스리 나스랄라 감독은 예상보다 훨씬 길어진 관객과의 만남에도 불구하고 아직 못다 한 말들에 아쉬워했다. 여기 짧으나마 거장의 넘쳐나는 마음을 담아 전한다.
-지금 막 마스터클래스를 마치고 나왔다. 예정보다 긴 시간을 진행했는데.
=관객의 열띤 눈빛을 보고 있자니 자꾸 말이 많아진다. (웃음) 클레어 드니 감독이 한국의 시네필 관객이 최고라고 조언해줬는데 오늘 그걸 충분히 느꼈다. 박찬욱, 봉준호,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기 때문에 꼭 와보고 싶었다. 한국, 이집트 모두 비슷한 시기 독재정권을 겪었고 역동적인 변화를 거쳐왔다. 한국은 성공적으로 민주주의를 꽃피우고 중산층이 자리를 잡고 있지만 이집트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영화뿐 아니라 사회적 측면에서 영감을 많이 받고 있다.
-2012년 <씨네21>과 인터뷰에서 “영화는 상영을 통해 정치적 입장을 대변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번 마스터클래스를 들으니 자신의 영화가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걸 경계하는 것 같다.
=정치적인 요소가 영화를 침범하는 걸 경계한다. 제3세계에서 영화를 만들다보면 의도와 관계없이 정치적 목적이 있는 것처럼 읽힐 때가 있다. 그저 영화를 만들었을 뿐이지만 마치 자국의 현실을 고발하려는 다큐멘터리처럼 해석되는 게 아닐까 걱정스럽다. 나는 저널리스트가 아니다.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을 따름이고 드라마의 기본에 충실하다. 다만 그 배경이 이집트이기에 다른 나라에서 보면 이색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강조하고 싶은 건 드라마와 캐릭터가 항상 우선이라는 점이다. 내가 보고 느낀 자국민들의 보편타당한 감성을 그려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대한 시선과 해석이 진하게 녹아 있다는 점이 당신의 영화를 특별하게 만든다.
=나도 사회의 일부이니 당연한 거다. 기본적으로 무엇을 찍고 싶다는 욕구로부터 출발한다. 선악의 판단과 상관없이 흥미를 유발시키는 인물이 있다. 문제적 인물의 시선을 따라가다보면 이야기들이 피어나기 마련이다. 이야기란 결국 사회적 맥락의 산물이고 그런 점에서 사회적으로 읽히는 게 당연할 수도 있다. 가령 1993년에 연출한 <메르세데스>는 내 삼촌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다. 삼촌은 유복한 편이다. 카이로에서 메르세데스 벤츠를 모는 사람들은 특권층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종종 자신들이 사회의 주인인 것처럼 착각한다. 하루는 삼촌에게 왜 이렇게 운전을 난폭하게 하는지 물었더니 심드렁하게 “운전은 기사가 한다”고 하시는 거다. 그 대답이 신선했다. 당시는 카이로도 급속하게 개발되던 시기였다. 사회와 개인의 충돌, 변화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머물려는 사람들, 뒤처지는 사람과 앞서가는 사람들이 섞이고 충돌했다. 그런 불꽃들이 나로 하여금 카메라를 잡도록 끌어당긴다.
-데뷔작 <여름 도둑질>(1988)은 물론 최근작 <냇물과 들판, 사랑스런 얼굴들>(2016)까지 코미디, 드라마 등 여러 방향에서 이야기를 전개시키지만 결국엔 로맨스 혹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로 연결되는 것 같다.
=드라마를 사랑한다. 결국엔 드라마다.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는 <천일야화>다. 끊이지 않는 이야기의 연결들이 나를 흥분시킨다. 서로 다른 듯 보이지만 결국엔 이야기로 이어져 있고, 사람마다 각자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영화가 특별한 건 꼭 하나의 형식만을 고수하지 않아도 좋다는 점이다. 매번 예측 불가능한 지점들까지 최대한 담아내고자 애쓴다. 기차 레일처럼 정해진 길로 가는 대신 어디로 이어질지 모를 상황, 열린 문들을 하나씩 열어가는 게 즐겁다. 덧붙여 멜로드라마틱한 부분이 없으면 심심하다. (웃음) 멜로드라마는 모든 사람들이 편하게 이해할 수 있는 동시에 전복적인 시도가 가능하다. 이집트의 경우 70년 이전엔 영화산업이 매우 발전했지만 이슬람 근본주의가 자리잡은 이후 여성은 장식품이 되었고 많은 영화에서 여성에 대해 침묵해왔다. 하지만 여성만큼 시네마틱한 존재도 없다. 그래서 멜로드라마의 뉘앙스를 빌려 여성들을 카메라에 담아왔다. 어머니, 딸, 연인 등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상관없다. 장식이 아닌 인간으로 서 있는 그들은 언제나 나를 매혹시킨다.
-<냇물과 들판, 사랑스런 얼굴들>의 초·중반은 결혼에 얽힌 통속극처럼 보이는데 본인의 영화 중 ‘가장 정치적인 영화’라고 자평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쾌락에 대한 영화다. 먹고 사랑하고 섹스하는 기본적인 욕구를 보여준다. 왜 개인의 욕구를 보여주지 못하고 억압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인 셈이다. 결국 정치란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추구하는 행동들인데 정치가 목적이 되어버릴 때가 있다. 계속 삶의 기쁨과 욕망에 대한 영화를 만드는 행위 자체가 가장 정치적이라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세트보다 야외촬영을 선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일상을 담아낸 리얼리즘을 추구한다고 볼 수 있나.
=스스로 리얼리즘을 의식하고 접근하진 않는다. 리얼리즘의 흔적이 있다면 목적이 아니라 도출된 결과에 가깝다. 물론 <메르세데스> 같은 경우엔 100% 거리에서 촬영했다. 반면 <셰에라자드, 이야기를 들려다오>(2009)는 100% 스튜디오에서 찍었는데 오히려 <셰에라자드, 이야기를 들려다오>쪽이 현실적으로 보인다는 관객도 있다. 결국 리얼리티란 극중 인물이 실제로 처한 상황이 아니라 감독인 내가 느끼고 해석하는 현실의 반영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커팅을 거의 하지 않는다. 화면 안에서 인물, 정확히는 몸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쪽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숏을 최대한 길게 지속시키는 과정은 철저히 계산된 동선을 따르나. 아니면 현장의 즉흥성도 흔쾌히 받아들이나.
=둘 다 사용한다. 대부분 시나리오를 직접 쓰기 때문에 이야기 단계에서부터 카메라의 동선을 고려해 매우 디테일한 콘티를 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흥적인 순간들은 언제나 영화에 스며들어온다. 의도치 않았지만 원래 찍고자 했던 구상보다 훨씬 좋은 화면들 말이다. 배우가 나를 놀라게 하거나 카메라에 예상치 못한 감흥들이 담기는 마법 같은 순간이 찾아오면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해외 관객은 이집트의 상황이나 의식들을 영화를 통해 알게 되는 만큼, 정치적으로 읽지 않으려해도 저절로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다. 반대로 이집트 관객은 당신의 영화를 실제로 어떻게 이해하고 관람하는지가 궁금하다.
=매우 좋은 질문이다. 영화는 현실의 한 조각이다. 이집트의 삶, 생활을 담은 만큼 해외영화계에서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기본적으론 내 영화가 정치적인 요소에 침략당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집트에서 이야기를 온전히 보여주는 영화를 만들기는 쉽지 않다. 개인성을 드러내기 어려운 환경인 만큼 관능적이고 직접적인 표현이 어렵다. 엄격해진 검열하에서 감독들은 각자의 생존 방식을 찾고 있고, 여러 알레고리와 상징들로 우회하는 것도 그중 하나다. 다만 정치를 주제로 삼는 것과 영화 속 하나의 제스처로 보는 건 다르다. 나는 어디까지나 이집트인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싶고, 이집트 관객도 그렇게 즐기고 있을 거라 믿는다. 나머지는 다 부차적인 효과에 불과하다. 왜 내가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겠다. 나는 노는 걸 좋아한다. 영화는 내게 최상의 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