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잡, 조혼, 명예살인. 아랍 여성을 수식하는 단어는 차별과 구속의 다른 이름이었다. 6회 아랍영화제에서 만난 배우 줄리아 카사르는 우리에게 ‘각인’된 아랍 여성에 대한 시각을 조금 달리해줄 아랍 여성의 현재를 알려준다. 샐마 헤이엑, 조이 살다나같이 ‘레바논계’라고 국제적으로 알려진 배우들과 달리 그녀는 레바논에서 출생하고 이름을 알린 레바논 국민배우. 1985년 연극 무대에서 연기 활동을 시작해 근 30년간 영화와 TV시리즈 등에서 활약해왔다. 개막작 <결혼 대소동>(감독 소피 부트로스)에서 그녀는 시리아인과 결혼하려는 딸을 말리려 애쓰는 중년 여성 테레즈를 연기한다. 상견례에서 벌어지는 한나절의 코믹 소동극 뒤에는 시리아 내전으로 남동생을 잃은 테레즈의 아픔이 있다. 다년간의 연기 경험을 바탕으로 그녀는 딸과 남편, 새로 맞이할 가족과의 복합적인 관계에 놓인 테레즈를 노련하게 연기한다.
-<결혼 대소동>이 아랍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고, 지난 며칠간 서울 아트하우스 모모, 부산 영화의전당 등에서 관객과 만났다.
=지난 5일간 서울과 부산을 오가면서 정말 많은 한국 관객을 만났고, 또 많이 놀랐다. 영화의 내용뿐 아니라 역사적인 의미, 현재의 의미를 묻고, 레바논 여성의 삶에도 관심을 가져주더라. 영화는 현실을 반영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로 인해 익히 아는 스테레오타입의 아랍 사람들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서 각 문화에 더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다. 영화를 찍으면서 감독뿐 아니라 스탭과 가족처럼 지내면서 마법같이 환상적인 작업을 했는데 이렇게 초청까지 받고 보니 우리가 한 고생을 보상받는 것 같은 기분이다.
-유럽영화에서 익히 보아온 시리아, 레바논 내전이나 난민 문제와는 조금 결이 달랐다. 어둡고 무거운 역사지만 영화에서 두 민족간의 ‘갈등’은 코믹 소동극으로 풀어진다. 아랍 내부에서 본 모습보다 좀더 가까운 현재 같다는 생각도 든다.
=레바논은 1975년부터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는 등 어려움을 겪어왔다. 시리아와의 내전으로 지금도 7천여명에 대해선 행방을 모른다. 전쟁이라는 주제가 레바논인들의 일상이자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다. 이런 현실을 그리다보니 영화가 어렵고 무거워지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최근 10년 사이 레바논영화계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국가의 재정지원도 용이해지면서 전쟁, 내전 같은 무거운 주제뿐만 아니라 레바논인들의 평범한 일상을 다루는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우리 영화도 그런 분위기를 담고 있다.
-아랍영화제에서 3회 상영이 모두 매진될 정도로 관심이 높다. 대중적인 영화인데 아랍지역에서는 어떤 반응을 얻었나.
=지난해 두바이국제영화제에서 갈라 시사를 하는데, 기자를 포함해 2천명 정도의 관객이 한자리에서 봤다. 영화가 끝나자 모두가 행복한 표정이더라. 레바논, 시리아,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 등지에서 지금도 이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레바논과 시리아 관계는 굉장히 민감한 소재지만, 영화는 비극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자는 게 아니라 우리의 현재를 거울처럼 비추는 역할을 하고자 한다. 우리가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는지 서로 자연스럽게 비판하는 기능을 한다고 생각한다.
-시리아 사위를 받아들이기 싫어 꼼수를 부리는 중년 여성 테레즈를 연기한다. 다른 사람들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반면 테레즈는 쉽사리 새로운 관계를 용인하지 못한다. 그녀에게 응어리진 과거의 기억으로 이날의 소동극이 시작되는 셈이다.
=테레즈는 상처를 가진 여자다. 남동생을 시리아 폭격으로 잃었고, 그 상처로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현재를 사는 사람이다. 그 기억 때문에 남편이나 딸과의 소통이 단절돼 있다. 그녀가 새로운 가족이 오면서 마음의 혼란을 겪는다. 시리아 남자와 결혼하려는 딸의 결혼을 어떡하든 방해하려고 ‘음모’를 짜는데, 그게 마냥 밉지 않고 이해되고 사랑스럽다. 이 영화의 유머 포인트도 여기서 온다. 테레즈의 이전까지의 삶이 일종의 정신적 코마 상태였다면 가족간의 변화를 통해 이제 새로운 숨을 쉬게 되는 것이다.
-레바논인과 시리아인의 결혼이라는 영화의 소동이 된 모델이 있었나? 특히 절대 ‘시리아인은 안 된다’는 엄마의 입장과 달리 딸은 시리아 남자와 사랑을 나누고 그걸 문제로 여기지 않는다. 모녀간의 세대 차도 엿보인다.
=우리 세대의 여성들은 전쟁의 고통을 알고 있지만 테레즈 딸의 세대만해도 그런 걸 피부로 체감하기는 힘들다. 해외에서 살고 있고, 국제적으로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과거는 잊고 사는 거다. 이 영화에는 그런 갈등이 엄마와 딸 사이에 흐른다. 집에 있는 테레즈는 과거에 사로잡혀 있고,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려는 딸을 용인하지 않는다. 그녀가 가진 상처는 딸뿐만 아니라 남편과도 갈등을 빚게 되는 등 다층적인 문제로 작용한다.
-시나리오를 완성하기 전부터 이미 감독이 “줄리아 카사르를 염두에 두고 썼다”고 하더라. 테레즈라는 중년 여성의 시각, 그녀를 전면에 내세우는 건 상업영화로는 도전이었다.
=젊은 배우가 영화의 주연이 되는 건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두 그렇다. 하지만 삶의 이야기들은 보다 연륜이 있는 이들에게 듣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연극, 영화, TV 모두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TV에서는 메인 캐릭터를 많이 해도 엄마 역할 아니면 평면적인 캐릭터들이 들어온다. 그래서 6~7년 동안 부러 TV에서 들어오는 역할들을 거절하기도 했다. 정말 많이 거절한다. 늘 어딘가에 나와서 내 존재를 증명할 필요는 없다. 한장면이 나와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수동적인 역할보다 복잡다단하고 도전하는 역할을 즐긴다. 얼마 전 연극에서 남장을 하고 남자 독재자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이런 것들이 재밌다. 하나를 해도 퀄리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30년 넘게 연기하는 데 있어서 나의 원칙 같은 것이다.
-이렇게 이 소동극의 중심에 테레즈의 시각이 존재하기까지는 여성감독, 여성 프로듀서, 여성 촬영감독 등 스탭의 상당수가 여성이란 점도 분위기를 형성했을 것 같다.
=레바논은 여성 영화인들이 남성 영화인보다 많다. 촬영감독이나 스탭도 해외로 진출해서 작업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여성 영화인이 많아진 게 15년 정도 된 것 같다. 영화과 학생이 20명이면 7명만 남자일 정도로 여성의 비율이 높다. 이렇게 된 데는 영화가 돈이 안 되는 불안정한 직종이라는 인식도 작용한다. 아들은 돈 되는 비즈니스 계통의 일을 하기를 원하지만, 딸들이 영화를 한다고 해도 집안에서 안 말리는 거다. 같은 맥락에서 음향이나 촬영 등 기술직은 (돈이 되니) 남자가 많다.
-히잡을 쓰고 억압당하는 여성들이라는 아랍 여성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여성들이 점차 늘고 있다. 아랍에서 일하는 여성 영화인들에게 ‘파이터’라는 표현을 쓴다고 하던데.
=2년 전 아랍영화제에 초청됐던 나딘 나우스 감독(<나의 사랑스러운 아빠>) 같은 성공적인 여성감독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자기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롤모델이 생기는 거다. 그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여성들이 일종의 ‘히든 드림’을 발견하게 된다. 나도 학교(Lebanese University Fine Arts Faculty)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이런 성공사례들이 좋은 모범이 되어준다는 것을 많이 깨닫는다.
-1985년 연극 <지브라>로 데뷔했고, 30여년간 활동해왔다.
=원래 춤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내전과 전후 시기를 겪으면서 레바논의 예술 분야가 약화되었고, 공부를 한다는 게 어려운 일이 되었다. 이후에 연극으로 전공을 좁혀 나갔는데, 사실 이것도 내 입장에서 쉬운 길은 아니었다. 보수적인 부모님을 설득시키고, 그 과정에서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가지면서 여기까지 왔다. 지금은 연극, 영화, TV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연기한다. 무용에 대한 꿈은 연극 무대에서 조금씩 풀고 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연기자를 양성하는 것도 지금은 내게 있어서 중요한 일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