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년간 박찬욱, 박찬경 감독의 ‘파킹찬스’(PARKing CHANce) 작품들은 영상 예술 창작에서 영역을 구분하는 것이 점점 더 의미가 없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예술가로서 앞장서서 영화 창작의 고정관념을 무너뜨린 결과물을 내놓았고, 극영화에서 거의 다루지 않은 무속신앙 같은 소재를 선택하기도 했다. 함께 협업해온 곳도 통신사에서 잡지사, 아웃도어 브랜드에서 서울시까지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그들의 작품은 단편영화에서 뮤직비디오까지 다양한 형태로 탄생했고, 이들을 볼 수 있는 플랫폼 역시 극장이 아닌 곳으로 뻗어나갔다. 파킹찬스가 <격세지감>에 이르기까지 걸어온 길을 되짚어봤다.
<파란만장> (2010)
역사적으로 기술 발전은 예비 창작자들에게 진입장벽을 파격적으로 낮춰주는 계기가 되었다. 영화도 예외는 아니다. 720P HD급 고화질 영상을 찍고 바로 편집까지 할 수 있는 스마트폰이 보급화되면서, 누구나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취지로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작품만을 모아 상영하는 영화제가 기획되기도 했다. 이런 획기적인 영화제에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감독과 그 동생이 참여한 것은 그 자체로 커다란 이슈였다. 뿐만 아니라 파킹찬스의 첫 작품 <파란만장>은 아이폰4로 촬영했다는 점 외에도, 한국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요소로 가득했다. 오프닝에 등장하는 어어부 프로젝트는 뮤직비디오의 느낌을 내면서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의 시작을 알린다. 줄거리는 의미 있는 반전을 담고 있다. 태풍이 다가오는 어느 밤 혼자 물가에서 낚시를 하던 오광록이 소복을 입은 귀신 이정현을 낚은 후 육탄전을 벌이는 중반부가 지나고 나면, 지금까지 본 이야기가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딸마저 데리고 가려는 망자를 위해 굿판을 벌이는 상황에서 기인했음이 밝혀진다. <파란만장>은 그동안 극영화에서 거의 다루지 않은 무속신앙을 독창적인 이미지로 구현해냈고, 무속신앙은 이후 파킹찬스의 <고진감래>에서 서울의 풍경 중 일부로, 박찬경 감독의 <만신>(2014)의 주된 소재로도 등장한다.
<오달슬로우> (2011)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씨네21> 디지털 매거진 창간 당시 <씨네21>은 새로운 형태의 잡지 소비가 가능한 시대가 도래했음을 인상적으로 알리는 프로젝트를 준비했다. 바로 애플리케이션 이용 매뉴얼 및 콘텐츠 홍보를 위한 뮤직비디오 제작. 그리고 <파란만장>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 단편부문 황금곰상을 막 수상한 파킹찬스가 이 홍보 영상의 연출을 맡았다. 노래 제목은 주연 및 랩을 맡은 배우 오달수가 “세상에서 가장 느린 래퍼”라는 의미를 담아 ‘오달슬로우’라고 명명됐고, 가사는 파킹찬스가 직접 썼으며, 오달수의 랩 멘토링은 에픽하이의 타블로가 담당했다. 기자 및 주요 필진 특유의 캐릭터를 반영한 깜짝 출연이나 애플리케이션 홍보 목적에 부합하게끔 귀에 쏙쏙 들어오는 가사가 인상적이다. 문석 전 편집장, <영웅본색>을 패러디한 주성철 현 편집장, <박쥐>의 김옥빈을 연상시키는 의상을 입은 김혜리 편집위원, 그리고 파일럿 복장을 하고 특유의 문체를 반영한 대사를 하는 진중권 교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청출어람> (2012)
코오롱스포츠 40주년 필름 프로젝트의 첫 번째 작품이다. <파란만장>의 제작과정이 olleh의 TV광고로 활용된 적은 있지만 <청출어람>은 아예 브랜드 홍보를 위해 기획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파킹찬스의 또 다른 시도였다. 흥미로운 것은, 스포츠 아웃도어 브랜드의 TV 온에어 광고로까지 활용된 작품이 오히려 상업영화에서 거의 다루지 않았던 판소리를 소재로 하고 송강호의 상대역으로 연기 경험이 없는 신예 전효정을 과감하게 캐스팅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줄거리는 이러하다. 대회에서 1등을 놓치고 시무룩한 소녀와 그의 스승은 어느 겨울날 득음을 위해 산에 오르고, 소녀가 내는 소리는 점점 놀라운 경지에 이르게 된다. 한국의 자연 풍광을 아름답게 담아낸 촬영은 두 사람의 작품에서 그간 보기 힘든 모습이었고, 재치 있게 튀어나오는 특유의 유머는 이전의 판소리영화와는 다른 매력을 만들어낸다. 명장을 연기하기 위해 데뷔 이래 처음으로 백발 분장을 한 송강호의 모습이 당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V> (2013)
미셸 공드리, 데이비드 핀처 등 원래 뮤직비디오 연출로 명성을 쌓다 영화감독이 된 경우는 적지 않다. 역으로 파킹찬스는 영화로 먼저 유명해진 후 뮤직비디오에 도전했다. <파란만장>의 오프닝에 등장하는 어어부 프로젝트의 영상이나 <씨네21>의 <오달슬로우>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이정현의 <V>는 그들의 첫 뮤직비디오 작업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V>가 이정현의 <줄래>의 흥미로운 후속작으로도 읽힌다는 점이다. <줄래>의 이정현이 예쁜 바비 인형을 연상케 했다면, <V>는 이를 호러버전으로 각색했고 여성의 주도권도 커졌다. 일명 ‘유령신부’ 같은 모습을 한 이정현이, 교통사고를 당한 후 우연히 기괴한 저택으로 들어가게 된 진구를 차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구애한다는 내용이다. 단체 줄넘기를 하는 다리 없는 귀신,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입이 두개 있는 귀신 등 유머러스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이미지도 인상적이다.
<고진감래> (2014)
이것이 진정 서울시 홍보 영상이 맞나 의구심이 들 정도다. 평범한 집의 홈비디오부터 오래된 뒷골목을 찍은 구도도 맞지 않는 영상들이 이어진다. <고진감래>는 국내외 1만1852명이 서울의 어떤 모습을 촬영한 UCC 중 141개의 영상을 선별한 후 편집해 만들었다. 그러다보니 화질도 불균질하고, 남산타워나 광화문처럼 서울을 대표하는 화려한 랜드마크보다는 동네 구석구석의 오래된 간판을 보여주며, 촬영을 방해받는 모습도 고스란히 담길 만큼 각각의 영상은 투박하다. 하지만 이들을 편집한 <고진감래>는 “어두운 부분이 있어야 밝은 부분도 도드라진다”는 의도를 탁월하게 전달하는 작품으로 완성됐다. 영화가 조명하는 서울의 ‘밝은 부분’은 바로 ‘사람’이다. 출산이나 대학 합격 순간, 시민들이 나누는 환희는 어떤 홍보 영상보다도 서울시에서 진짜 벌어지고 있는 감동을 보여준다. 영화는 편집의 예술이라는 새삼스러운 말을 다시 곱씹게 하는, 아주 흥미로운 집단 창작의 사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