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살 용순은 운동장을 달리고 또 달린다. 군 대항 육상 대회에 나갈 학교 대표 선수를 모집한다는 교내 포스터를 본 용순은 덜컥 육상부에 들어가 달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용순은 육상 대회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저 답답하기에 뛸 뿐이다. 용순은 체육 선생과 연애 중이지만 그에게 새로운 사람이 생긴 것 같아 답답하고 불안하고 화가 난다. 아버지가 자신과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재혼하겠다며 새로운 사람을 집으로 들인 것도 불만이다. 용순이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상황의 연속이다. 하지만 용순은 끝장을 볼 생각이다. 자신이 끝까지 지켜내고 싶은 것들에 용을 쓰며 매달리는 용순을 보고 있으면 답답하고 애처롭다. <용순>으로 장편 데뷔를 한 신준 감독을 만났다. 단편에서 장편으로 발전시킨 작품인 만큼 감독에게도 <용순>은 끝까지 매달려보고 싶은 그 무엇이었던 모양이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대명컬처웨이브상을 수상했다.
-단편 <용순, 열 여덟 번째 여름>(2014)에서 장편까지 왔다. 어떻게 시작된 기획인가.
=단편을 준비하기 전 중고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학원에서 수학, 과학을 가르치는 강사 일을 했다. 규모가 작은 학원이라 강사들끼리 수업 후 청소까지 다 마치고 퇴근했는데 아이들이 안 가고 강사들을 기다리더라. 그렇게 함께 지하철역까지 가곤 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받아야 할 정을 학원에서 채우는 것 같기도 하고 정 붙일 곳이 없어 보이기도 하고. 그런 학생들을 보면서 단편 작업을 시작하게 된 것 같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졸업작품으로 이 단편을 완성했다. 이걸 본 <용순>의 김지혜 프로듀서가 장편화를 제안해줬다. 당찬 포부를 안고 한번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장편으로 가닥을 잡으면서 좀더 신경 쓴 부분이나 추가된 내용은 뭔가.
=교실에서도 보면 늘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는 아이들이 있지 않나. 선생님과 친구들의 관심 밖에 있는 그런 아이들이 자꾸 내 눈길을 끈다. 용순도 그렇다. 용순은 막무가내인 아이다. 하지만 관객이 그런 용순만을 봐주길 바랐다. 용순이 맺고 있는 관계에 집중하려 했다.
-영화는 시작부터 학교라는 공간에서의 사제간 연애를 전제한다. 그 연애가 위협받았을 때 용순이 보이는 감정의 변화를 그린다는 점에서 <용순>에 시선이 갔다.
=선생과 제자간의 사랑을 코믹하게 희석해버리고 싶진 않았다. 그만큼 둘의 관계를 그릴 때 조심스러웠다. 용순이 체육 선생과 사랑에 빠지는 순간보다는 사랑이 시작된 이후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쪽에 초점을 맞췄다. 사랑에 빠지기는 쉽지만 그 사랑을 붙잡아두기는 어려운 것 같다. 사랑이 어느 순간부터는 사랑을 이대로 끝낼 수 없다며 매달리는 목표의 대상이 되는 것도 같고.
-무엇보다 선생이 여성이고 학생이 남성인 경우의 로맨스가 아니라 그 역의 관계라는 점에서 보다 섬세하게 여성 캐릭터를 그리고 돌파해나가야 할 지점이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애인이자 체육 선생인 캐릭터가 시종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게 용순의 화를 부추기는지라 안타까웠다.
=남자 선생님 캐릭터 자체, 캐스팅부터가 어려웠다. 유약하고 빈틈이 보이는 데다 천성이 나쁘지 않아 보이길 바랐다. 용순도 체육 선생의 외양에 꽂혔다기보다 이 사람의 친절한 마음에 빠졌을 거라 생각한다. 체육 선생을 그리는 방식은 편집 때 많이 정리가 됐다. 체육 선생의 분량이 많아질수록 관객으로서는 용순의 입장이 이해되지 않을 것 같았다. 철저히 용순에게 맞췄다. 나는 체육 선생의 태도가 용순과의 현실을 회피하기보다는 조심스러운 태도에서 나왔다고 본다. 체육 선생은 모든 면에서 굉장히 더디고 조심스럽다. 반면 용순은 걷잡을 수 없이 바로바로 박차고 나가고. 체육 선생이 항상 용순보다 한발 늦었으면 좋겠더라. 어른 같지만 아이 같은 체육 선생과 아이 같지만 어른스러운 용순. 그런 지점으로 둘 사이의 나이 차를 뒤집어볼 수 있지 않을까.
-용순 역을 맡은 이수경 배우는 어땠나.
=<차이나타운>(2014)의 쏭이 보여준 강한 인상과 달리 막상 만나보니 굉장히 차분하더라. 체력이 아주 좋았다. 촬영 내내 달리고 또 달려야 했는데도 그걸 다 소화해냈다. 무엇보다 수경씨는 용순이 다 이해된다고 하더라. 그 자신도 사춘기를 지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용순의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영화 속 달리기, 특히 장거리인 5천m 달리기는 용순의 심적 변화 혹은 성장을 동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장치 같다.
=영화에서 용순이 공부하는 장면은 한번도 안 나온다. 용순은 마땅히 꿈이랄 게 없는 소녀다. 그런 아이가 할 수 있는 게 달리기였다. 특별한 교육을 받아야만 가능한 운동도 아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니까 꿈이 없던 그 시절의 누군가를 대표할 수 있지 않을까. 특히 버티면 어느 정도되는 오래달리기지 않나.
-운동장을 롱숏으로 보여주거나 용순의 얼굴을 클로즈업할 때 유독 화면이 아름답게 보였으면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촬영의 레퍼런스로 가장 많이 본 작품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다. 풀숏으로 공간을 많이 보여주고 싶었고 그 속에서 인물들이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흐름이 재밌었다. 용순에게 집중해 들어갈 때만큼은 그 누구보다 용순이 아름답고 예쁘게 나오길 바랐다. 촬영감독님이 빛을 많이 써서 의도적으로 연출했다.
-영화 연출은 어떻게 시작했나.
=공대생이었다. 영화 동아리에 들어가고 영화 현장도 쫓아다녔다. 그래도 한계가 있더라. 군대 가서 고민이 깊어졌고 제대하면서 마음을 굳혔다. 더 늦기 전에 시작하고 싶어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들어갔다.
-<용순>을 마쳤으니 이제 또 어떤 작품에 매달릴 생각인가.
=<용순>의 장편화에 만 3년을 매달렸다. 하루살이 같더라. 계속 영화에 매달리겠지만 그렇더라도 1년 이상의 내 미래를 스스로 설계할 수 있는 제반 여건이 갖춰지길 바란다. 누가 그러더라. ‘감독들은 센 영화 안 하면 자신의 재능을 인정 못 받는다고 생각한다’고. 나는 굳이 그러고 싶지 않다. 나 하나 정도는 의도적으로 자극적인 것들을 피해서, 따뜻한 얘길 해봐도 좋지 않을까. 지금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30대 커플에 관한 내용 등으로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전 세대가 함께 볼 수 있는 메시지가 명확한, 밝은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