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정지연의 영화비평] <엘르>가 보여주는 폭력과 에로티시즘의 우아한 조우
2017-06-27
글 : 정지연 (영화평론가)

그가 돌아왔다. 에로티시즘과 폭력 사이에서 거부할 수 없는 매혹과 공포를 조율하던 감독, 폴 버호벤의 귀환이다. <원초적 본능>(1992)에서 가면 뒤로 숨어야 했던 팜므파탈의 강력한 유혹과 범죄는 이 영화 <엘르>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변주된다. 집 안으로 침입해온 괴한이 쓰고 있는 가면은 그저 장르적 수사에 불과하다. 폴 버호벤이 <엘르>에서 선보이는 마스케라드 게임. 이 영화에서 진짜 가면은 ‘얼어붙은 심장’을 연기하는 이자벨 위페르(극중 미셸 역)의 얼굴 그 자체다. 그녀에게선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읽을 수 없으며, 진심과 기만의 경계를 파악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녀는 끔찍한 사건 현장의 유일한 목격자이며, 자신의 쾌락을 위해선 그 어떤 능욕도 마다않는 저돌적이고 직선적인 폭력의 주체이기도 하다.

목격자의 시선에서 행위의 주체로

<엘르>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몇개의 압도적인 장면을 기억해야 한다. 영화의 시작. 어두운 화면 저편에서 한 여성이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고 이내 그녀를 겁탈하는 남성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온다. 곧이어 화면이 영화적 공간을 비추기 시작했을 때, 뜻밖에도 스크린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강간 현장을 목격하고 있는 고양이의 클로즈업 숏이다. 무심한 목격. 고양이가 별스럽지않다는 듯 자리를 뜨고 나서야 관객은 문 저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셸이 강간당하는 장면과 도주하는 범인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더 의아한 것은 이후 이어지는 미셸의 행동들이다. 흡사 고양이만큼이나 무심하게도 그녀는 사건 현장을 정리하고, 목욕을 하며(욕조 거품 위로 올라온 핏자국을 마치 꽃인 양 움켜쥐고 물에 희석시켜버린다), 집을 방문한 아들과 저녁을 먹는다.

그러나 미셸의 무심한 행동들에도 불구하고 오프닝에 제시된 ‘강간의 순간’은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되거나 변주될 만큼 중요하다. 첫 번째 반복은 미셸의 ‘기억 이미지’인 플래시백을 통해서다. 사건 다음날, 귀가한 그녀에게 고양이가 다가오자 그녀는 사건의 전체 순간을 떠올린다. 그러고는 고양이를 향해 “눈알을 뽑아내지는 않을지언정 할퀴는 정도는 할 줄 알았어”라고 힐난한다.

두 번째 반복은 엄마를 만나 수감 중인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직후다. 이야기 중에 엄마는 그녀에게 이제는 늙어버린 아버지를 직접 찾아가볼 것을 강요한다. 그러자 미셸은 “그를 보느니 차라리 내 눈을 뽑아버리겠어요”라며 거부한다. 그리고 절묘하게 이어지는 그녀의 ‘상상 이미지’. 오프닝에서 제시되었던 강간 장면이 반복되지만 후반부의 설정은 뒤바뀐다. 그녀가 복면을 쓴 남자의 머리를 반복적으로 가격해 잔혹하게 살해해버리는 것이다. 다음 장면은 잔혹한 복수극을 상상하고 있는 현실 속 그녀의 엷은 미소를 보여준다. 그런데 그때 한 마리 새가 창문으로 날아와 부딪혀 바닥으로 추락한다. 이때 잽싸게 다가온 고양이가 새의 머리를 잘근거리며 뱉으려 하지 않는다. 이 순간은 중요하다. 미셸의 고양이는 그녀의 ‘얼터 에고’이며, 이후 그녀가 행하게 될 폭력의 결과를 암시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후의 유사한 상황들은 그녀와 범죄자 사이에 사도마조히스틱한 모종의 합의 속에서 반복된 강간 게임을 통해 제시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제일 마지막 장면이다. 그녀가 영화의 첫 장면과 거의 흡사한 방식으로 가면 속 남자와 강간 상황을 재연하고 있을 무렵 새로운 목격자가 그곳으로 유인된다. 이번엔 감정의 동요가 없던 고양이가 아니라 아직 미성숙하고 쉽게 흥분하는 미셸의 아들 뱅상이다. ‘게임의 법칙’을 알지 못하는 뱅상은 그 자리에서 가면 쓴 남자의 머리를 가격해 그를 살해하고 만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우리는 이 영화 <엘르>가 제안하는 중요한 게임의 구조를 눈치채야만 한다. 마지막 강간 장면은 미셸이 상상했던 살해극과 닮아 있다. 그러나 더 궁극적으로는 그녀가 39년 전 연루되었던 사건을 반복한 것이기도 하다. 다만 이번에 이웃을 살해한 살인자가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바뀌었으며, 그녀는 다시금 살해 현장의 유일한 목격자 혹은 희생자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또 하나의 압도적인 이미지, 폴 버호벤 감독의 몹쓸 수수께끼와도 같았던 미셸의 과거 사진에 주목해야 한다. 10살에 불과한 어린 소녀가 반라의 재투성이 몸으로 살해 현장에 서 있다. 미셸은 자신의 이 모습을 사이코패스의 모습이라고 역설한다(대중으로부터 그녀가 받았던 비난). 그런데 이 악몽 혹은 강력한 트라우마적 사건은 미셸이 주최한 크리스마스 파티장에서 이웃집 남자, 패트릭에게 마치 남의 일인 양 무심하게 진술됨으로써 관객에게 전달된다. 아버지가 27명의 이웃 사람들을 무참하게 살해하고 피를 뒤집어쓴 채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 숙제를 하던 미셸은 그런 아버지를 보게 됐고, 이윽고 집까지 불태우는 아버지를 돕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때 어린 소녀는 불길이 주는 묘한 흥분에 사로잡혔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사람만이 아니라 동물들도 살해했어요. 6마리의 개와 고양이 몇 마리를 말이에요”. 호기심 많은 관객이라면 의구심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언론조차 보도하지 않았던 이 사실을 10살의 미셸은 어떻게 알았을까?

그리고 반복된 운명. 이웃이 아들에 의해 눈앞에서 살해되는 상황을 재경험하고 있는 그녀는 가혹한 인생을 되풀이하는 희생자일까? 혹은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유도한 살인의 고안자일까?(이웃집 남자가 죽어가는 순간, 가면을 벗고 그녀에게 ‘왜?’라고 질문할 때 그녀가 짓는 묘한 표정은 그녀가 게임의 승자임을 말해준다.)

오마주와 변주

폴 버호벤 감독의 <원초적 본능>이 앨프리드 히치콕의 <현기증>(1958)에 관한 공간과 인물의 매혹적인 오마주였다면, 이 영화 <엘르>는 <이창>(1954)을 변주한다. <이창>은 다리를 다쳐 창가에 고정된 채 건너편 아파트 창문 너머를 응시하는 제프(제임스 스튜어트)의 시선숏들로 대부분 구축되어 있다. 그의 응시는 건너편에서 아파트 내부에서 벌어지는 범죄를 목격하고, 개입하고 단죄하는 권력적 시선이다. <엘르> 역시 시선과 응시가 중요한 작품이다.

먼저 영화 초반부, 정확히 말하자면 이 영화가 장르적인 포뮬러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미셸은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포획된 존재이다. 부르주아의 화려한 저택은 이웃집 범죄자에 의해 조망되거나 침입받는 공간으로 내몰린다. 강간이 벌어진 이후에도 범인은 그녀를 지켜보며 위협적인 문자 메지지를 보낸다. 이 불온한 위기감은 이 영화 <엘르>를 스릴러 장르의 충실한 포뮬러로 간주하기 쉽게 만든다. 자연스럽게 관객의 호기심은 어쩌면 동일범일지도 모르는 두 사건의 범인(강간범과 직장 내 성희롱 동영상 유포자)을 추적하는 과정에 집중된다.

그러나 서사가 중반에 이르렀을 때, 영화는 너무도 간단하게 범인(이 영화에선 범인 자체가 맥거핀에 불과하다)을 밝혀버린다. 장르의 법칙은 이 순간부터 위반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폴 버호벤의 흥미로운 작가적 날인이 작동되기 시작한다. 폴 버호벤의 모든 여성 캐릭터들이 그러했듯이 미셸 역시 스릴러 장르의 가련하고 나약한 여성 희생자 혹은 멜로드라마의 억압된 욕망의 여성으로 한정되길 거부한다. 게다가 이 영화의 모든 장면은 철저히 미셸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그녀가 등장하지 않는 신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가 온전히 이 영화를 지배하고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게임이 본격화되는 것도 바로 여기부터다. 그녀는 범죄적 상황을 게임의 상황으로 역전시키고, 시선의 주체가 되어 이웃을 훔쳐보거나, 성적 대상을 유혹하는 능동적 행위자로 도약한다. 그리고 극적인 반전은 그녀가 이 위험한 사도마조히스틱한 성적 관계에서 피학적 쾌락에 머물지 않고, 종국엔 상대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폭력의 극단을 수행한다는 점이다. 그녀에겐 과거에 연루됐던 잔혹한 학살극의 희열이 기묘하게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게임의 법칙

영화 초반부, 강간을 당한 바로 다음날 미셸은 개발된 게임 콘텐츠에 대한 검토를 진행한다. 게임 속에서 촉수와도 같은 다리로 여성의 뇌를 파먹는 괴물의 공격 행위(이 장면은 폴 버호벤의 1997년작 <스타쉽 트루퍼스>에서 외계 생명체가 인간을 공격하는 행위와 똑같다)는 흡사 전날, 그녀가 경험했던 잔혹한 강간 장면과도 유사하다. 그러나 그녀는 태연히 게임 속 폭력 행위를 성행위로 비유하며, 살해당하는 여자의 오르가슴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더 나아가 게임 유저들은 공격 행위에서 뜨끈한 핏줄기를 손에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극중 캐릭터가 직면했던 강간 사건과 가상의 게임 콘텐츠의 폭력을 병렬적으로 배치하는 이러한 편집 수사학은 이 영화 <엘르> 속 그녀가 지금 폭력과 에로티시즘, 가장 파괴적인 사도마조히스틱한 쾌락을 위해 돌진하는 위험한 게임의 고안자임을 피력하는 것이며, 이후 전개되는 영화적 모든 사건들은 영화 내 게임과 상동관계 안에서 움직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게임에 관한 서사를 제외한다면 이 영화 <엘르>에서 폴 버호벤 감독은 모든 것을 모호한 상태로 유예시켜놓는다. 과거 그녀의 아버지가 왜 잔혹한 학살을 자행했는가? 그는 왜 딸과 대면하기 직전 자살해야만 했는가? 그리고 언론의 의구심처럼 고작 10살의 소녀는 그 학살의 밤, 어떤 역할을 수행한 것일까? 이 모든 것은 괄호 안에 닫혀 있다. 다만 그녀가 아버지의 사진조차 응시하지 못했던 것은 흡사 도살자 아버지의 얼굴에서 자신의 거울 이미지를 발견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종종 내뱉은 눈알을 뽑아낸다는 수사학은 피핑톰의 처벌 혹은 근친살해를 자행한 오이디푸스의 처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엘르>는 분명 폴 버호벤의 날인이 강력한 영화다. SF와 스릴러, 역사극을 넘나드는 그의 장르 수사학은 강력한 여성 캐릭터(성적 매력과 폭력성, 강인함과 불안을 넘나드는 경계 위의 여성성)들에 의해 수행되고 사건의 극적 한계와 묘사의 노골성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괴력이 이 영화를 지배한다. 부르주아의 표면을 장식하는 교양주의와 우아함은 클로드 샤브롤이 <초콜릿 고마워>(2000)에서 묘사했던 세계와 닮아 있다. 우아한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계급적 퇴폐성과 폭력, 음모의 범죄적 세계를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자벨 위페르가 연기하는 미셸의 폭력성과 에로티시즘은 <원초적 본능>에서 묘사된 여성주인공보다 더 압도적이다.

이자벨 위페르는 이 영화에서 미하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2001)에서 보여준 ‘얼어붙은 심장’과 사도마조히스틱한 에로티시즘의 집착, 그리고 샤브롤의 <초콜릿 고마워>에서 악마적 계략과 잔혹함을 부르주아의 교양과 권태로 표현해냈던 자신의 얼굴 이미지를 교묘하게 섞어놓는 데 성공한다. 그녀의 카리스마 넘치는 표정의 미장센과 폴 버호벤의 원초적인 에로티시즘, 폭력의 조우는 이 영화에서 역설적이게도 가장 우아한 방식으로 마주하고 있다. 그것은 흡사 부르주아의 폭력과 착취, 자기파괴적인 탐욕의 세계를 유머와 ‘은밀한 매혹’으로 풍자해냈던 루이스 브뉘엘의 다크한 버전에 도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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