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브이아이피> 박희순 - 힘을 빼고 가자
2017-08-15
글 : 임수연
사진 : 오계옥

“그래도 박훈정 감독의 첫 작품 <혈투>(2010) 주인공을 맡았는데 <브이아이피>에서는 중간에 갑자기 사라지는 캐릭터를 주다니, 이건 좀 너무하지 않냐고 물었다. (웃음)” 박훈정 감독의 사무실에도 자주 놀러갈 만큼 친분이 있다는 박희순이 웃으며 캐스팅 뒷얘기를 전했다. “시나리오 모니터링 결과 영화에서 가장 멋있는 역할이 리대범이었다며 날 유혹하더라. 감독과 오랜만에 함께 작업하고 싶어 합류하게 됐다.” 연쇄 살인마이자 북한 고위층 자제 광일(이종석)을 오랜 시간 추적하는 북한 공작원 출신 리대범이 보여주는 세월에 찌든 모습은 흔히들 생각하는 ‘멋’과는 거리가 멀지 모르겠다. 하지만 박희순에게 직접 들어본 리대범에 관한 이야기는, 박훈정 감독이 그에게 분량에 비해 깊은 인상을 남기는 인물이라 설득하기 충분했다.

-네명의 주연 캐릭터에 해당하는 챕터가 모두 존재할 만큼 각자에게 부여된 역할이 확실한 것 같다. 리대범은 어떤 몫을 담당하는 캐릭터라고 보나.

=처음에 문을 여는 역할. 강한 카리스마를 보여준 후 갑자기 사라져서 ‘이 사람은 어디 갔지?’ 하고 궁금하게 만드는 인물이다. 베일에 가려져 있는데도 조여오는 압박감을 주는 느낌의 캐릭터는 해외영화에서나 많이 봤던 것 같다. 내가 이 역할을 잘 살리면 한국영화에서 드문 캐릭터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북한 공작원은 <쉬리>(1998), <의형제>(2010), <공조>(2016) 등 한국영화에서 자주 등장한 직업군이다. 기존 영화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 있나.

=그간 북한 공작원 캐릭터들은 초인적인 힘과 능력을 가진, 그래서 독자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영화적인 인물이 많았던 것 같다. 반면 리대범은 광일 한명을 잡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는, 현실적인 인물이다. 냉철한 수사관이면서, 어떤 사건에 대해 가슴 아파하는 인간적인 따뜻함도 있다.

-시나리오를 보니 리대범이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는 장면이 많더라. 리액션 연기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감정을 담아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을 것 같은데.

=광일을 잡아야겠다고 결심하는 초반은 강렬하고 뜨거운 느낌을 담았다. 광일의 악행이 계속되고 수위도 잔혹해지고, 대범은 계속 그를 잡을 타이밍만 기다리는데, 사람이 점점 지치고 초췌해진다. 그래서 끔찍한 모습을 볼 때의 반응도 점점 무뎌지게 연기를 했다. 하지만 광일을 잡아야겠다는 욕망이 커지다보니 눈빛만은 살아 있는 거지. 가슴에서는 무언가 끓어오르고 있지만 최대한 누르고, 좀더 차갑게. 큰 것을 위해 참고 기다리는 낚시와 비슷할 것 같다.

-분량이 많지 않은 캐릭터다 보니 좀더 강렬하게 연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던가.

=박훈정 감독이 많은 설정이 들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다. 연출로 나머지를 만들어 줄 테니 배우는 힘을 빼고 가자고 말이지. 초반에 리대범이 강렬하게 등장하면서 이 사람의 성격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그래서 이후에는 힘을 빼고 연기하는 것이 가능했다.

-외적으로 변화를 주기 위해 박훈정 감독이 스킨, 로션도 바르지 못하게 독하게 감시했다던데.

=조금만 화장품을 발라도 왜 이렇게 얼굴이 촉촉해졌냐고 묻고. (웃음) 그외에도 얼굴에 있는 흉터로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려고 했다. 아무것도 안 해도 이야기가 읽힐 수 있게끔. 영화에서 대체로 힘들고 지친 표정이 많이 등장한다. 살도 좀 뺐고, 조명이나 카메라도 거친 표정을 담아내는 방향으로 갔다.

-어느덧 데뷔한 지 27년이다. 요즘 생긴 욕심이 있다면 무언가.

=최근 들어 무리를 해서라도 작품을 많이 하고 있다. 우선, 비중에 관계없이 좋은 작품에 함께하고픈 갈증이 있다. 또한 각자 한 작품을 책임질 수 있는 배우들이 어떤 하나의 작품에 다 모여서 함께 연기하기가 어렵지 않나. <밀정>(2016), <브이아이피> 같은 현장에서 함께 작업을 하며 다른 사람에게 배우는 것이 많다. 다른 배우들은 어떻게 현장에서 연기하는지 또한 감독과 어떻게 이야기를 주고받는지 궁금했거든.

-곧 <남한산성>(2017)이 개봉하고, <1987>(2017)은 촬영 진행 중이다.

=주로 문관이 등장하는 <남한산성>에서 홀로 무관을 맡았다. 겨울옷이라 그런지 너무 무겁고, 무관 복장을 하고 칼싸움을 하면 땀이 나서 더웠다. 겨울이라 추워서 입김이 나는데 몸은 너무 더운 신기한 경험을 했다. <1987>에서는 박종철(여진구)을 고문하는 형사로 나온다. 여진구를 사랑하는 누나 팬들에게 원성을 살 것 같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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