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동건은 전자담배를 꺼냈다. 6개월 전에 담배를 끊었다가 전자담배로 바꿔 피운 지 2주 됐단다. 한때 1mm짜리 담배는 “목만 간질간질해져서 도무지 담배 같지가 않”아 6mm짜리 독한 담배만 피웠던 그다. 담배 종류뿐만이 아니라 작품을 선택하는 취향과 기준도 변했다. <브이아이피>에서 그가 맡은 재혁은 회사원 같은 국정원 요원이다. 무정부주의자(<아나키스트>(2000)), 남북을 넘나든 전쟁의 희생자(<태극기 휘날리며>(2003)), 남북 모두로부터 버림받은 탈북자(<태풍>(2005)) 등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었던 전작들을 떠올렸을 때 체제에 충실한 박재혁은 장동건이 이제껏 보여주지 않은 모습이다.
-전작 <우는 남자>(감독 이정범, 2013) 이후 오랜만인데.
=영화 <7년의 밤>(감독 추창민)과 중국 드라마 <사랑했던 널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를 연달아 찍으며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올해 초는 아내(고소영)가 드라마 <완벽한 아내>를 찍었기에 육아때문에 쉬기로 했다. 아이가 아직 어려 둘 다 일을 하면 부담스러우니까.
-재혁의 어떤 면모에 끌렸나.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감독 드니 빌뇌브, 2015)를 되게 재미있게 봤다. 박훈정 감독이 그 영화처럼 인물의 감정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서사를 흥미진진하게 끌고 가고 싶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해서 공감됐다. 개인사가 있거나 감정을 드러내는 다른 인물들과 달리 재혁은 조직으로부터 압박감과 스트레스를 받으며 항상 궁지에 몰리다가 감정이 점점 드러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다.
-안경을 쓴 것도 회사원처럼 보이기 위한 목적이었나.
=회사 부장님. (웃음) 안경을 쓰고 있으면 눈동자는 안 보이고 눈의 실루엣만 살짝 보이지 않나. 개인의 사연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고 캐릭터는 이미지로만 묘사되고, 사건에 따라 전개되는 이야기라 감독님이 안경 쓴 이미지를 꼭 사용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영화에서 안경을 쓴 건 처음 아닌가.
=드라마 <의가형제>(1997)에서 알 없는 안경을 쓴 적 있다. (웃음) <연풍연가>(1998)에서 초반에 안경을 쓰고 나왔다가 상대역인 아내가 “안경 벗고 있는 게 더 잘 어울려요”라는 대사를 하면서 안경을 벗는 설정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 안경을 쓴 건 처음이다.
-빛 반사에 따라 인상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재혁에게 안경은 중요한 도구였을 것 같다.
=상대 배우와 눈을 마주치는 상황에서 눈앞에 무언가가 가로막고 있으니 처음에는 걸리적거리긴 했다. 점점 익숙해졌다.
-건조하고 피곤에 찌든 모습이 스스로 생소하지 않았나.
=재혁의 현재와 과거는 상반된 모습이다. 과거의 재혁은 안경을 쓰고 약간 헐렁한 코트를 입는다. 현재는 전작 <우는 남자>에서 맡았던 킬러 같은 이미지가 있다. 사건은 과거 분량이 훨씬 많은데 현재로 넘어오면 관객이 익숙한 내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둘 다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상황에 따라 감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설정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감정을 좀더 드러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장면들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감독님이 그렇게 하지말자고 했다. 시나리오에 (행동과 감정이) 설명되어 있고, 관객도 김광일(이종석)에 대한 분노를 충분히 느끼고 있으니 감정을 드러내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재혁을) 따라갈 거라는 거다. 앞부분에서 재혁이 많이 흔들릴수록 뒤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더 격렬하게 다가가지 않을까 싶다.
-그간 혼자서 서사를 끌고 가는 역할을 맡아오다가 동료 배우들과 함께 역할을 분담해보니 어땠나.
=심적으로는 홀가분하고, 재미는 배가 됐다. 과거에는 장점이 70, 단점이 30인 시나리오가 들어오면 30을 되게 심각하게 생각했는데 그런 기준으로 선택을 하다보니 후회되는 게 많았다. 지금은 장점이 있다면 그게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일단 한다. (웃음)
-차기작은 촬영을 앞두고 있는 <창궐>(감독 김성훈)인데.
=왕을 꿈꾸는 병조판서 김자준을 연기한다. 현빈씨는 청나라에 볼모로 간 세자 이청을 맡았는데 왕 자리에 관심이 없는 세자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마블 영화 같다는 인상을 받았고, 재미있는 작업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