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공간도 그 공간에 누가 들어서느냐에 따라 분위기와 온기가 달라진다. 지난해 5월 26일 <더 테이블>의 기상도는 정은채가 만들어낸 경진이라는 인물의 마음의 동세를 좇아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새초롬하면서도 다부지고, 강한 듯하면서도 여릿한 경진의 얼굴이 카메라앵글에 클로즈업으로 맺혀 있다. 여사여사한 세상사를 눈앞에 두고서도 호락호락하게 변심하지 않으리라는 듯 어떤 고집이 경진, 아니 정은채의 얼굴 위로 지나간다. 경진은 오늘로서 네 번째 만나는, 그 만남 중 딱 한번 자신의 집에 왔다가 제 손목시계를 남겨두고 홀연히 해외로 여행을 떠났던 남자 민호(전성우)와 재회했다. 경진은 제 마음을 전하고 그 마음을 나누고 싶었던 민호가 이제야 제 앞에 나타난 데 분명히 화가 난 듯 보인다. 몸은 민호와 마주했으나 경진의 시선은 민호를 피해 엉뚱한 곳을 향한다. 정은채는 “경진은 ‘그를 만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지’라며 미리 생각하고 왔을 거다. 그럼에도 상대의 반응에 따라 자신도 어쩔 수 없는 표정이 불쑥불쑥 나온다. 슬쩍 화가 풀렸다가 또 화가 났다가. 그 미세한 감정의 변화를 따라가보는 재미가 있다”고 말한다.
“여성 배우를 위한 역할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이 신선한 기획의 영화에 합류해 시도해보고 싶었다. 여성 배우들은 작품을 향해 뛰쳐나갈 준비가 언제든 돼 있다.” <더 테이블>의 시나리오를 받자마자 정은채가 긍정한 이유다. 그러면서 그녀는 <더 테이블> 속 하루라는 시간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평생을 두고 보면 아무 일도 아니었을 어떤 하루이거나 인생을 바꾼 하루일 수도 있다. 그 하루 동안에도 각자의 마음은 계속 변하겠으나 마음 역시도 결국 지나갈 테니까.” 그리하여 이 배우는 하루의 시간을 “찰나에 집중하고, 작은 목소리에 좀더 귀를 기울이길. 그럼 삶이 조금은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더 테이블>이 규모는 작아도 결코 작은 영화가 아니다”라고 전한다.
<더 테이블>과 함께하던 당시 정은채는 <더 킹>(2016)의 촬영도 병행하고 있었다. “태수(조인성)의 동생 시연 역인데 경진과는 정반대다. 억척스럽고 격하고 가만히 못 있는 인물이라 또 색다르다.” 곡을 만들고(자작곡을 엮어 《정은채》도 냈다) 그림을 그리는 게 정은채에게는 “일이 아니라 나와 계속 같이 가는 것들”로서의 일상이다. 영화는 애정의 대상임에 틀림없다. “최근 <45년 후>(2015), <룸>(2015)을 보며 ‘이야기는 이렇게 영화적으로 풀리는구나’ 생각했다. 요즘은 미처 챙겨보지 못할 때가 있으나 고등학생 때부터 오랫동안 <씨네21>의 정기구독자였다. <씨네21>에 ‘후아유, 커버스타, 씨네스코프, 기획’ 꼭지에 내가 소개될 때마다 ‘내 배우 생활의 변화를 가장 크게 느끼게 해주는구나’ 싶다. (웃음)” <더 테이블>이라는 이름으로 만난 다른 세 여성 배우들을 생각하며 정은채는 자신의 다음 스텝을 가늠한다. “캐릭터의 비중, 영화의 규모에 연연하지 않고 각자의 방식으로 오랫동안 작업해온 분들이다. 그 좋은 에너지를 많이 받았다. 나 역시 가능한 오래, 자유롭게 작업하고 싶다. 지금의 이 마음이 변하지 않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