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가 허지웅과 <씨네21>이 일본정부관광국의 지원으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 촬영지 투어를 다녀왔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일본에서 ‘동쪽의 교토’라 불리는 가마쿠라 지역과 에노시마섬의 정취를 근사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도쿄에서 1시간 거리로 주말이면 발 디딜 틈 없이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영화 속 에노시마섬의 바다고양이 식당, 자매들이 헐레벌떡 출근하던 고쿠라쿠지역, 첫째 사치(아야세 하루카)와 막내 스즈(히로세 스즈)가 속마음을 털어놓던 기누바리산 정상, 그리고 네 자매가 마지막에 이르러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던 시치리가하마 해변 등을 돌아다니며 다시 한번 영화를 곱씹었다. 그중에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직접 추천한 장소와 음식도 있었다. 허지웅의 기행문과 함께 바쁜 가운데 시간을 내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의 인터뷰를 더한다.
공항을 나설 때면 있는 힘껏 숨을 들이쉬는 버릇이 있다. 다른 동네에 가서 봉변을 당하지 않으려면 조금이라도 빨리 그곳의 공기로 폐를 채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근거는 없다. 신비주의다. 공항 앞에서 차를 잡아타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도로를 막아 선 채 셀카를 찍고 있었다. 화가 잔뜩 난 택시 운전사가 경적을 울리며 그들을 피해 돌아 나갔다.
하네다공항에서 가마쿠라는 멀지 않다. 새벽까지 일을 하고 나왔기 때문에 아무래도 쪽잠을 자고 싶었지만 금세 도착하리라 생각해 대신 책을 읽기로 했다. 로마공화정에 관한 콜린 매컬로의 소설을 e북으로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기절하듯 잠이 들고 말았다. 클레오파트라가 알렉산더의 핏줄이 맞는지 아닌지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정작 내가 읽고 있는 책에서 클레오파트라가 등장하려면 아직 시리즈의 몇권을 더 읽어야 했다. 잠에서 깼을 때 차는 여전히 도로 위였다. 그리고 도로는 단단히 막혀 있었다. 평일이라 이런 상황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알고 보니 오늘은 공휴일이었다. 노인의 날이라고 했다. 거리에는 젊은이들만 있었다.
잔멸치덮밥을, 이곳에선 오직 잔멸치덮밥을
인파와 차량을 뚫고 마침내 가마쿠라 에노시마섬에 위치한 분사 식당에 도착했다. 분사 식당은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 자매들과 돈독한 사이인 타카노 히데코가 운영하는 식당으로 등장했었다. 잔멸치덮밥을 먹기로 했다. 영화에 등장한 바로 그 ‘시라스동’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신뢰가 가지 않았다. 영화에서야 먹음직스럽게 비쳐졌다. 하지만 그건 영화인 것이다. 대체 멸치덮밥이 무슨 수로 맛있을 수 있단 말인가. 예의상 시라스동은 하나만, 대신 머릿수대로 라멘을 주문했다.
주문을 마치고 잠시 식당 밖으로 나섰다. 식당으로 통하는 좁은 길 초입에는 라이더 동호회원들이 모여 튜닝한 엔진의 배기음을 뽐내고 있는 중이었다. 식당 뒤편에는 작은 차 한대가 간신히 지나갈 정도의 교차로가 있고 비탈지게 주차장이 있다. 주차장 방향으로 검은 얼룩이 있는 하얀 고양이 한마리가 햇볕을 쬐고 있었다. 쭈그리고 앉아 빤히 바라보았다. 고양이는 언젠가 사람 손을 탄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조금도 경계하지 않고 내쪽으로 먼저 다가와 만져달라는 듯 고개를 들이밀었다. 눈에 병이 생긴 것 같았다.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같이 놀았다.
식당으로 돌아왔더니 라멘과 잔멸치덮밥이 준비되어 있었다. 맛이 없으면 다른 걸 주문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별 기대 없이 자리에 앉았다. 문제의 덮밥을 한술 떠 입안 가득 우겨넣었다. 한술 더 떠 다시 한번. 그리고 한번 더.
이것은 덮밥의 이데아다. 놀라운 일이다. 잔멸치덮밥은 정말 맛이 있었다. 잔멸치는 딱딱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너무 무르지도 않았다. 간은 적당했고 밥알의 찰기는 잔멸치와 어우러져 온전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이것은 건프라다. 나는 생각했다. 이건 밥알과 멸치라는 파트로 이루어진 건프라인 것이다. 그리고 내 입안에서 기분 좋게 짭조름한 데칼과 만나 완성되고 있다.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대체 밥에 멸치를 올렸을 뿐인 음식이 어떻게 맛있을 수 있지. 덮밥은 금방 동이 났다. 잔멸치덮밥은 놀랍다.
주저하지 말고 들어갈 것
멀지 않은 곳에 시치리가하마 해안이 있다. 천천히 이동했다. 해안을 따라 통과하는 에노시마 철도를 배경으로 해변과 사람들의 풍광이 만화같이 천진하고 힘 있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마지막 장면에서 자매들이 이 해안을 걸었다. 만화 <핑퐁>의 배경이기도 하다. <핑퐁>에 나오는 가타세고교가 여기 있다. 실제 이름은 가타세가 아니라 시치리가하마고교다. 물론 이곳이라면 <슬램덩크>를 떠올릴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이거 지금 장난치는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만화의 배경과 완전히 똑같은 풍경이 이어진다. 너를 좋아한다고 외치고 싶어, 내일을 바꾸어보자아, 라고 흥얼거리면서 건널목에 섰다. 열차가 지나갔지만 뒤돌아보는 소연이는 없었다. 나는 먼 옛날 소연이와 똑같은 여자와 연애를 한 일이 있다. 내가 그 이야기를 할 때마다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 가운데 누군가는 자기 남자친구가 서태웅과 같다고 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아마도 우리는 마음속에 저마다 다른 소연이와 서태웅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파도의 질이 대단히 좋았다. 서핑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여기 오고 싶을 것이다. 후레쉬맨처럼 헬멧과 옷을 차려입은 한 무리의 소년들이 검은 해변에 모여 있었다. 아동용 서핑복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영화 속에서 사치가 어머니와의 갈등을 풀어내는 공간인 고쿠라쿠지(극락사)는 생각만큼 인상깊지 않았다. 아니, 사실 잘 모르겠다. 들어가려고 하는데 마침 마감 시간이었다. 절이 문을 닫는 바람에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아마 절 앞에서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바로 들어갔다면 둘러볼 시간이 충분했을 것이다. 이거 절 맞아? 혹시 신사 아니야? 싶은 마음에 극락사 앞의 표지판을 필사적으로 읽어보느라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었다.
가장 기대했던 건 기누바리산이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공간 중에 이 산만이 관광지가 아니다.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 사치와 스즈가 서로 속마음을 털어놓는 공간이기도 하다. 해가 지기 전에 멀리 후지산까지 보일 정도로 탁 트인 정상의 풍광을 보고 싶었다.
생각이 잦아드는 풍경
쉽지 않았다. 차를 타고 들어갈 수 있는 마지노선을 지나서도 산에 오르는 길을 발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참을 걸어 들어가서야 산길이 드러났다. 바로 전날 큰 비가 내렸기 때문에 산은 온통 진흙투성이었다. 관광지가 아니기 때문에 길이 잘 닦여 있거나 안전이 보장된 것도 아니었다. 산을 사랑하는 벌레떼가 날아들었다. 수시로 진흙에 발이 빠졌다. 외나무다리를 통해 위태롭게 지나야 하는 비탈진 계곡을 건너며 나는 여기서 찍었다는 영화가 <바닷마을 다이어리>인지 <언차티드>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굴러떨어져 다치면 산재가 되는 걸까, 최양일 감독 현장의 배우 기타노 다케시라도 이런 산길이라면 감독에게 주먹을 날리지 않았을까 싶은 의구심이 들 즈음, 마침내 수풀로 우거진 계단이 드러났다. 계단을 타고 또 한참을 올랐다. 오르고 또 오르고 수풀을 헤치고 또 헤치자 정상의 기운이 드리워졌다. 나는 이런 기분을 언젠가 느껴본 적이 있었다. 강화도의 마니산을 올랐을 때 정상 직전 딱 이런 냄새를 맡아본 일이 있다.
수풀이 걷히자 정상이 나타났다. 그리고 세상이 펼쳐졌다. 에노시마. 가마쿠라. 가나가와. 멀리 후지산이 보이고 바다와 지평선과 이제 거의 하루치 일을 끝낸 태양이 보인다. 나는 발을 뗄 수 없었다. 바람이 분다. 생각이 많아졌다. 유물론자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요즘 부쩍 관념적인 것들에 마음이 간다. 모든 걸 상대적으로만 생각하고 살았는데 요즘 들어선 보편적 질서에 관해 자주 생각하게 된다. 운이 좋고 현명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여기라면 회피가 아닌 이해로 삶을 감싸안아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볕이 마침내 사라졌다. 다시 그 길을 되돌아 내려가야 할 일을 생각하며 감독을 떠올렸다. 감독님이 왜 여기서 촬영했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라온 게 아까워서라도 누구나 여기 올라오면 속마음을 털어놓고 얼싸안아 화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