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바닷마을 다이어리>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 아직 되고 싶은 어른이 되지 못했다
2017-10-17
글 : 허지웅 (작가)
사진 : 백종헌
정리 : 주성철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 후반부에서 첫째 사치(아야세 하루카)와 막내 스즈(히로세 스즈)가 함께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가마쿠라의 기누바리산 정상까지 다녀왔다. 감독님께서 이번 <씨네21>에서 영화 속 촬영지로 꼭 다녀왔으면 좋겠다고 추천한 장소였다고 들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굉장히 높고 힘들어서 걷는 내내 감독님을 원망했다.(웃음)

=기누바리산 정상에서 촬영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우리도 촬영 기자재를 가져가느라 정말 고생했다. 대형 크레인까지 가져가야 해서, 대학 산악부 동아리 학생들이 도와줬다. 사치와 스즈가 정상에 올라 이야기를 나누기까지 땀 흘리며 함께 올라갔다고 하는 게 중요하다. 그렇게 말없이 산을 오르면서 이미 무언의 대화를 나눴다고 생각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주요 촬영지인 가마쿠라 지역과 에노시마섬은 일본의 영화나 드라마 그리고 만화에 종종 등장하는 곳이다. 이 지역이 일본인들에게, 그리고 감독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곳인지 묻고 싶다.

=가마쿠라 지역은 ‘동쪽의 교토’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일본의 역사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가마쿠라 대불도 가볼 만하고, 에노시마섬은 다리를 건너서 다 둘러볼 수 있다. 도쿄는 사라진 게 많은데 그 도쿄에서 1시간 거리인 가마쿠라에서는 옛 역사를 느낄 수 있다. 산과 바다가 가까워 영화 촬영지로도 좋다. 게다가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만들면서는 계절의 변화를 영화에 담고 싶었는데, 가마쿠라는 생활과 계절이 함께하는 느낌을 주기에도 좋은 곳이다. 봄에는 영화처럼 시라스동(잔멸치덮밥)도 좋고 그보다 좀더 지나 여름 직전에는 영화에서 먹지 못했던 전갱이튀김이 맛있다. 가마쿠라에 가면 꼭 한번 맛봐야 할 음식들이다.

-<걸어도 걸어도>(2008) 이후 당신 영화에는 가족이라는 존재가 깊게 담기는 것 같다. 그들이 끈끈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저마다의 개별성 또한 도드라진다. 또 조용한 가운데 무언가와 격렬하게 싸우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 데에는 개인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가족은 하나가 아니다, 라고 말해보면 어떨까. 원칙적으로, 가까운 가족이라도 살아가면서 장애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족이라는 개념에는 그런 양면성이 있다. 좋다, 나쁘다, 그렇게 쉽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영화에 ‘현대 일본 가족의 문제’ 그런 걸 담으려고 노력하는 건 아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한다면 그건 실패다. <아무도 모른다>(2004) 때도 그랬고 <걸어도 걸어도>도 그렇고, 눈앞에 어떤 문제가 닥쳤을 때 가족이 그걸 어떻게 대처하고 또한 무너져가는지, 그런 작은 것부터 담아내고 싶었다. 돈이 없다거나 하는 등 그 이유는 사소할 수 있다. 그처럼 시야를 좁게 해서 오히려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 ‘이런 게 문제야!’ 하고 내세우면 설교적이고 추상적일 수 있다. 그래서 평소에 ‘일본인론’ , ‘가족론’ 하는 그런 거창한 건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다가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을 놓칠 수 있다.

-‘바로 눈앞에 있는 것’ 얘기를 듣고 보니, 당신 영화에는 아름다운 배경과 이야기 속에 차갑게 현실을 직시하는 순간들이 분명히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영화 바깥으로 확장해서도, 일본영화계의 중견 감독으로서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과도 맞닿아 있을 것 같은데.

=항상 현실을 살면서 이질감을 느낄 때가 많다. 뭐랄까, 나이가 들면서 과거보다 확실히 ‘왜’ 라는 질문이 늘어난 것 같다. 일본인은 왜 쉽게 옛 기억을 잊어버리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럴 때 이질감을 느낀다. 비록 관객이 한번에 눈치채기 힘든 작은 것이라도 그런 질문들을 영화에 담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일본영화계의 전반적인 현실도 많이 달라졌다. 중간 규모의 배급사나 영화가 사라지고 지금은 큰 영화와 작은 영화로만 나뉘어 다양성이 사라졌다. 당장 이익을 얻을 것으로 예상되는 큰 작품에만 투자가 이뤄진다. 다양성을 넘어 영화 만드는 사람을 키우지 않는 것 같다. 좋은 영화도, 좋은 영화인도 갈수록 사라지고 있다. 거기서 영화인으로서의 또 다른 이질감이 온다. 그처럼 영화 안팎의 현실이 힘들지만 한명의 영화인으로서, 또 한명의 일본 사회의 어른으로서 책임감 있는 사회적 발언과 행동도 하고 싶다.

-말씀하신 것처럼 1990년대 말까지 아오야마 신지, 쓰카모토 신야, 이시이 소고, 야구치 시노부, 사부 감독 등의 중소 규모 영화를 보면서 한국 감독들이 일본영화의 다양성을 부러워했었다. 우리는 왜 저런 영화들이 없을까, 하는 선망과 문제의식이 공존했다. 한국 또한 중간 사이즈의 영화들이 사라진 채 8할 정도의 대기업 제작 기획영화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 일본과 한국영화계가 동시에 처한 문제라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당신의 복안은 무엇인가? 지금 한국에서는 농담처럼 ‘우리의 살 길은 넷플릭스뿐’이라고 말하는 감독들도 꽤 있다. (웃음)

=맞다, 환경은 계속 달라지고 있다. (웃음) 지금의 나는 ‘내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을 스스로 만드는 것’밖에 길이 없다고 생각한다. 비슷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연대를 만들어서 계속 만들어야 한다. 내가 일본문화청(한국의 ‘문화체육관광부’ 같은 일본 정부 조직.-편집자) 장관도 아니어서(웃음) 그것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래서 4년 전 ‘복을 나눈다’는 의미의 ‘분복’(分福)이라는 이름의 영화사를 차렸다. 나 혼자만이 아니라 영화 만드는 사람들의 집단 개념으로 시작했다. 12∼13명 정도의 감독들이 서로 도와주고 공부하며, 어쨌건 모두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자기가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어나가려 한다. 그리하여 좋은 영화감독을 지속적으로 배출하는 게 1차적인 목표다. 니시카와 미와 감독의 <아주 긴 변명>(2016)도 분복에서 제작한 영화다.

-당신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는 <태풍이 지나가고>(2016)에서 료타(아베 히로시)가 “내가 되고 싶은 어른으로 나이를 먹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냐”라는 자조 섞인 말이다. 그래서 궁금하다. 당신도 어려서 꿈꾸던 어른이 됐는지.

=사실 되고 싶은 어른이 아직 못 된 것 같다. (웃음) 누군가가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고 있는 것 아니야?’라고 물어도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동경했던 감독들의 영화세계의 입구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영화란 게, 찍으면 찍을수록 모르겠다. 아직 많이 부족하다. 현재 부모님이 다 돌아가셨는데, 돌이켜보면 부모님에게도 이상적인 아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도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했다. 영화에서처럼 언제나 되고 싶은 어른이 되지 못한 느낌이 들어 억울하다. 아들이자 아버지로서도, 그리고 한 감독으로서도 늘 그런 마음이다. 아마도 모든 세상 사람이 그렇게 느끼지 않을까.

-당신 영화에는 <걸어도 걸어도> 이후 ‘료타’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계속 등장한다. 어떤 사연이 있나.

=실제 료타라는 이름의 후배가 있다. 고교 배구부 후배였다. 지금도 종종 같이 마작을 하는 친구이다. (웃음) 일본에서 보통 이름으로 료타를 쓸 때 ‘亮太’나 ‘良太’를 쓰는데, 그 친구는 어질고 좋다는 뜻의 ‘良太’여서 느낌이 좋다. <걸어도 걸어도> 때부터 허락받고 쓰기 시작해서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와 <태풍이 지나가고>, 그리고 드라마 <고잉 마이 홈>(2012)까지 네 작품을 함께했다. 이름이 좋아서 자전적인 이야기를 쓸 때나 부모와 자식간의 이야기를 담을 때 항상 썼던 것 같다. 물론 쓸 때마다 전화해서 이번에도 써도 되냐고 허락을 받는다. 그럼 이번 작품에서는 누가 그 역할을 하냐고 꼭 물어본다. 아무나 료타가 되는 걸 원하지 않는 것 같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후쿠야마 마사하루가 료타를 연기한다고 했을 때 가장 좋아했던 것 같다. (웃음)

-당신 영화를 두고 오래전부터 오즈 야스지로 감독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그 어떤 영화보다 오즈 감독 생각이 많이 났다. 실제로 가마쿠라에서 촬영한 오즈 영화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작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막내의 시점이 중요한데 영화화된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맏이의 시점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그래서 오즈 영화에서 종종 강인한 모습의 맏이를 연기한 하라 세쓰코가 바로 떠올랐다. 게다가 영화가 개봉한 2015년이 하라 세쓰코가 세상을 떠난 해이기도 해서 만감이 교차했을 것 같다.

=오즈 감독님과 비슷하다는 얘기를 오히려 해외에서 더 많이 듣는다. 오즈의 계승자라고까지 말하는 평론가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크게 의식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일본에서는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물론 소재적으로 비슷한 측면은 있다. 부모가 있고 부모가 기대하는 아들이 있고, 하지만 그렇게 못 된 아들이 있다. 오즈 감독님은 2차대전을 겪었던 사람이라 언제나 가족의 부재가 있고, 그 없는 사람을 두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게 비슷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연출자로서 배울 점이 많았던 건 오히려 나루세 미키오 감독님이다. 그런데도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보면서 오즈를 떠올리게 되는 데는 처음부터 원작이 비슷해서 그런 것 같다. <바닷마을 다이어리>가 얘기하고 있는 주제는, 시간이 일방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돌고 돈다는 것이다. 오즈 감독님도 언제나 그러한 시간을 얘기해왔다. 또 가족 중에 없는 사람이 있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에는 아버지가 없다. 바로 그 없는 사람을 중심으로 가족들이 모이고 또 배경이 가마쿠라라는 점에서 오즈 감독님의 영화와 비슷하다. 그래서 사실 촬영 전에 오즈 감독님의 <동경 이야기>(1953)를 다시 봤다. 공통점이라면 바로 그 시간이다.

사람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가고 그 안에 삶이 있다. 계절이 돌아오는 것처럼 시간은 일방적으로 흐르는 게 아니라 다시 돌아온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하라 세쓰코와 아야세 하루카가 닮았다는 건 나도 깜짝 놀랄 정도로 그렇게 느꼈다. 특별히 그렇게 연기해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는데 왜 그렇게 보일까,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아야세 하루카는 원래 행동과 몸짓이 아름답고 우아하다. 그냥 앉았다 일어서는 모습, 가만히 걷는 모습, 청소하고 젓가락질하는 모습까지. 게다가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일본에는 집안에 조상을 모시는 경우가 있어서 매일 손을 모아 기도를 하는데, 그 모습도 고전영화의 배우들처럼 그렇게 기품이 있을 수가 없다. 지금의 현대 일본인들이 많이 잃어가는 모습이 그 배우에게 묘하게 남아 있다. 체질적으로 이른바 쇼와 시대 여성배우의 향기를 갖고 있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한창 선배들의 영화를 보며 공부하던 때, 하라 세쓰코를 포함해서 어떤 여성배우를 좋아했었나. (웃음)

=일본영화 황금기의 감독들을 돌이켜보면 오즈 야스지로와 하라 세쓰코, 나루세 미키오와 다카미네 히데코, 마스무라 야스조와 와카오 아야코 같은 환상적인 영혼의 조합들이 있었다. 그 세 감독 모두 언제나 경배해 마지않는 감독들인데, 굳이 얘기하자면 다카미네 히데코와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들을 정말 좋아했었다. (웃음)

-당신의 환상적인 조합은 아베 히로시 아닌가.

=하하, 맞다. 그런 것 같다. 그래도 슬프지 않다. (웃음) 그렇게 떠오르는 감독과 배우의 조합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니까. 앞으로 여성배우와의 꾸준하고 멋진 호흡도 만들어보고 싶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되는 신작 <세 번째 살인>(2017)에 대한 소개도 부탁드린다. 일본에서는 이미 크게 흥행 중이다. 포스터부터 장르적인 향기가 은근히 풍기는 가운데 당신의 기존 작품들과 다르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어 무척 궁금하다.

=맞다. 그렇게 느낄 것이다. 변호사(후쿠야마 마사하루)와 살인범(야쿠쇼 고지), 그리고 유가족이 있다. 변호사는 사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사건 당사자에게 딱히 공감하지 않아도 변호할 수 있다고 믿는 냉정한 변호사다. 그런데 재판이 진행되면서 살인범에게 공감하고 영향도 받으며 사건의 실체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영화 홍보 문구는 ‘법정 서스펜스’다. 보통 서스펜스라고 하면 범인을 찾고 깔끔하게 벌하는 그런 맛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식의 전형적인 서스펜스는 없다. 내 이전 영화들이 그러했듯 결국 ‘인간 드라마’라고 보면 될 것이다. 어서 부산국제영화제에 가서 한국 관객과 만나고 싶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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