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제55회 뉴욕영화제에서 만난 영화들
2017-10-25
글 : 양지현 (뉴욕 통신원)
뉴욕의 가을은 영화로 물들었다.
제55회 뉴욕영화제

리처드 링클레이터, 토드 헤인즈, 우디 앨런, 노아 바움백, 루카 구아다니노, 숀 베이커…. 이름만 들어도 영화 팬을 설레게 하는 감독들의 신작이 뉴욕의 가을 극장가를 물들였다. 제55회 뉴욕영화제가 9월 28일부터 10월 15일까지 뉴욕 일대에서 열렸다. 뉴욕영화제는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영화제 중 하나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영미권 작가 감독들의 신작을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영화축제로 자리매김해왔다. 올해 뉴욕영화제에서는 총 99편의 장편과 69편의 단편영화가 소개됐다. 이중 국제영화제에서 주목받은 작품과 새로운 발견의 영화, 시상식 시즌을 노리는 스튜디오의 영화들이 포진해 있는 영화제의 메인 섹션, ‘메인 슬레이트’에 초청된 영화는 모두 25편이다. 한국 작품으로는 홍상수 감독의 <그 후>와 <밤의 해변에서 혼자>가 이 섹션에 이름을 올렸다.

<플로리다 프로젝트>

여성감독의 수작들, 영화제를 수놓다

이번 영화제의 화두 중 하나는 메인 슬레이트 부문의 작품 중 3분의 1가량이 여성감독의 영화라는 점이다. <자마>의 루크레시아 마르텔, <베스턴>의 발레스카 그리스바흐, <스푸어>의 아그네츠카 홀란드와 카시아 애더믹, <머드바운드>의 디 리스, <렛 더 선샤인 인>의 클레어 드니, <페이시스 플레이시스>의 아녜스 바르다 등이 그들이다. 이중 가장 큰 관심을 모은 작품은 클로이 자오 감독의 <더 라이더>와 배우 그레타 거윅의 감독 데뷔작 <레이디 버드>였다. 중국 출신으로, 뉴욕대에서 영화를 전공한 후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자오 감독은 로데오 선수를 주인공으로 한 일종의 현대 서부극을 만들었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이지만 대부분의 출연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물론 실제 자신의 삶과 비슷한 캐릭터를 연기해 큰 호평을 받았다. 주인공 브래디는 로데오 대회 우승자이지만 최근 머리 부상을 크게 입었다. 평생 말을 조련하고, 로데오에 나가는 것만을 꿈꾸고 살던 그는 이제는 말 위에 올라타는 것마저 힘들어졌다. 브래디는 꿈을 버리고 사는 인생이 과연 의미가 있는지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더 라이더>에서는 근래에 보기 드문 아름다운 황야의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이방인으로서 더욱 사실적이며 객관적으로 미국 문화와 사회상을 담아낸 이 작품은 리안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이나 <아이스 스톰>을 연상하게 한다.

첫 장편 연출작 <레이디 버드>를 선보인 배우이자 감독 그레타 거윅. (사진 뉴욕영화제)

거윅의 데뷔작 <레이디 버드>는 그가 각본과 연출을 담당하고, 자신의 고교 시절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인 작품이다. 시얼샤 로넌, 루카스 헤지스, 로리 멧커프 등 연기파 배우들이 대거 출연해 코믹하고, 때로는 가슴 아픈 성장통을 그렸다. 크리스틴(시얼샤 로넌)은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에 사는 고등학생이다. 그녀는 지금껏 살아온 이 특징 없는 도시에 계속 살며, 집에서 가까운 대학으로 진학해 재미없는 공부를 하고 오빠처럼 슈퍼마켓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될 것 같은 자신의 미래가 미치도록 싫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에게 ‘레이디 버드’라는 미들네임을 지어준다. 레이디 버드라고 부르지 않으면 대답조차 거부하는 그녀에게 갑작스럽게 사랑이 찾아오고, 엄마와의 대립이 극대화되며 크리스틴은 평생 겪을 성장통을 ‘고3’ 때 몰아서 겪게 된다.

<머드바운드>

미국의 과거와 현재를 그린 영화들 선보여

그레타 거윅이 출연한 많은 작품을 감독했으며, 실제로 그녀의 파트너이기도 한 노아 바움백 역시 <더 마이어로위츠 스토리스>로 뉴욕영화제를 다시 찾았다. 뉴욕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바움백 특유의 신랄한 가정사를 통한 유머로 뉴욕 관객에게 사랑받았다. 맨해튼에서 골목길 주차를 시도해본 사람이라면 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장면들도 있어, 관객의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개막작으로 상영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라스트 플래그 플라잉>은 2000년대 초반 이라크전에서 전사한 아들의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베트남전 전우들과 오랜만에 함께 모여 여행을 떠나는 한 아버지의 이야기다. 스티브 카렐과 브라이언 크랜스턴, 로렌스 피시번이 출연한 이 작품은 9·11 테러 이후 자주 볼 수 있었던 할리우드 전쟁영화가 아닌, 링클레이터 감독의 필터를 통해 재조명한 전쟁의 이면을 보여준다. 사실상 전쟁영화라기보다는 로드무비에 가까운 이 작품은 전사한 군인들의 시신이 돌아오는 것을 미디어에 공개하지 않는 미 국방부에 대한 반감과 자녀를 잃은 부모의 모습에 더 초점을 맞췄다. 켄트 존스 뉴욕영화제 집행위원장은 “링클레이터의 다른 영화와 이 작품의 차이는 사회적인 이슈를 다뤘고, 1970년대 로드무비처럼 특정 시대를 배경으로 한 감성적인 작품”이라고 덧붙였다.

<더 라이더>

아역배우들이 주연을 맡은 영화들 역시 눈길을 모았는데, 숀 베이커 감독의 <플로리다 프로젝트>와 토드 헤인즈 감독의 <원더스트럭>이 바로 그 작품들이다. <원더스트럭>이 동화책을 바탕으로 한 아이들을 위한 작품이라 한다면,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중심이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현대 미국 사회의 풍경을 짐작할 수 있는 영화다. 조연을 맡은 윌럼 더포의 연기가 돋보여 많은 기자들이 이미 그를 올해 시상식 시즌의 가장 유력한 남자조연상 후보로 꼽고 있다.

이 밖에도 이미 다른 영화제에서 큰 관심을 모았던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의 <더 스퀘어>, 로뱅 캉피요 감독의 <120 비츠 퍼 미니트>, 디 리스 감독의 <머드바운드>,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희망의 건너편> 등도 화제였다. 다큐멘터리 작품 중에는 레베카 밀러 감독의 <아서 밀러: 라이터>, 마일스 케인 감독의 <보여>, 루시엔 캐스터잉 테일러와 베레나 파라벨 감독의 <카니바> 등이 눈길을 끌었다.

한편 올해 영화제에는 월드 프리미어 작품이 개막작(<라스트 플래그 플라잉>)과 폐막작(<원더 휠>) 2편에 그쳤다. 특히 우디 앨런의 신작 <원더 휠>의 경우 배급사인 아마존 스튜디오 대표인 로이 프라이스가 성희롱 혐의로 사임하자 10월 14일 뉴욕영화제 폐막작 레드카펫 행사를 전격 취소해 화제가 됐다. <원더 휠>에는 <블루 재스민>을 연상시키는 여자주인공(케이트 윈슬럿)이 등장한다. 50년대 뉴욕 코니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상상력이 풍부한 캐릭터의 눈을 통해 당시 미국 사회를 보여준다. <원더 휠>은 디지털로 촬영했지만, 조명이나 색감에 있어 필름과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던 작품이다. 일부에서는 <라디오 데이즈>(1987)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라는 호평도 있으나, 우디 앨런의 과거 작품을 반복하는 듯한 기시감과 배우들의 연기력이 떨어진다는 혹평도 있었다.

<레이디 버드>

스트리밍 배급, 논란이 계속되다

한편 올해 영화제에서는 아마존과 넷플릭스 등이 제작 또는 배급을 맡은 작품들이 크게 늘어났다. 개·폐막작은 물론이고 <원더스트럭> 역시 모두 아마존 스튜디오의 작품이다. 아마존이 배급을 맡은 영화의 경우 지난해 <맨체스터 바이 더 씨>와 마찬가지로 일반 영화처럼 개봉을 한 후 몇 개월 뒤 아마존 프라임을 통해 영화를 스트리밍할 예정이다. 넷플릭스의 경우 <더 마이어로위츠 스토리스>와 <머드바운드> <보여> 등을 선보였다. 특히 넷플릭스는 봉준호 감독의 <옥자>와 마찬가지로, 배급작을 극장과 인터넷에 동시상영 혹은 인터넷에만 공개할 예정이다. <더 마이어로위츠 스토리스>는 영화제가 끝나기 전인 10월 13일에 이미 소수 극장 개봉과 함께 세계적으로 스트리밍을 시작했다. <머드바운드>는 11월 중 공개될 예정이다. 이같은 넷플릭스의 배급 방식에 대해 바움백 감독은 기자회견 중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인터뷰 기사 65쪽 참조). 반면 <머드바운드>의 디 리스 감독은 정반대의 의견을 밝혔다. 리스 감독의 장편 극영화 데뷔작인 <파리아>의 경우 극장 개봉 당시 극소수의 스크린에서만 소개돼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으나, 이후 넷플릭스에서 현재까지 스트리밍되면서 큰 인기를 얻게 된 것. <머드바운드>에 출연한 캐리 멀리건과 개릿 헤드룬드, 제이슨 클라크, 조너선 뱅스, 제이슨 미첼 역시 <파리아>를 본 후 이 작품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리스 감독은 뉴욕영화제 기자회견장에서 “넷플릭스의 배급 방식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며, “<머드바운드>는 40년대 미시시피주의 극심한 인종차별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라 기존 할리우드 영화사들이 꺼려했지만, 넷플릭스만은 예외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작품을 뉴욕이나 LA처럼 국한된 지역의 극장에서뿐만 아니라 해외 어느 곳에서든지 같은 날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생각이냐”며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켄트 존스 집행위원장 역시 “큰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더 좋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제 스트리밍을 통해 영화를 보는 것도 사실”이라며, “감독 중에서도 더 많은 관객에게 접근할 수 있어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대형 스크린에서 영화를 보길 원하는 감독도 있다”고 말했다.

<더 마이어로위츠 스토리스>

지난해 <문라이트>가 뉴욕영화제에서 소개된 후 평론가들 사이에서 계속 회자돼 결국 아카데미상 작품상까지 수상했다. 때문인지, 뉴욕영화제에 소개된 작품이 각종 시상식에서 얼마나 선전할지에 대한 관심도 있으나 영화제쪽은 그다지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고. 켄트 존스 집행위원장은 “좋은 작품이 시상식 후보에 오르면, 그것은 우연한 결과일 뿐”이라며 “때로는 쇼킹한 경우도 있는데, 엄청난 작품들이 후보에 오르지 못할 때”라고 밝혔다. “뉴욕영화제에 초청되는 작품들은 단순히 기억에 남는 것이 아니라, 보고 또 보게 되는 작품들이다. 일부 수상작들을 먼지 속에 날려버리는 작품들”이라며, “우리 영화제가 시상식 시즌에 영향을 미친다고 해도 좋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전혀 상관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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