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잭슨 감독의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제작해 크게 성공한 제작사 뉴라인 시네마는 실은 블록버스터영화 제작보다는 다른 제작사에서 쉽게 도전하기 어려워하는 저예산 공포영화 제작에 더 관심을 쏟아왔다. 희대의 살인마 프레디 크루거를 탄생시킨 <나이트메어> 시리즈, 샘 레이미 감독의 <이블데드>(1981), <크리터스> 시리즈 등이 바로 뉴라인 시네마의 손을 거쳐 탄생한 공포영화들이다. 2000년대를 거치면서 여러 실패를 거듭하며 잠시 주춤했던 뉴라인 시네마가 최근 제임스 완 감독과 손잡으면서 다시 예전의 공포 전문 제작사로서의 명성을 회복해가고 있다. 뉴라인 시네마가 지금껏 지향해 온 장르영화 제작의 큰 그림과 최근의 공포영화의 흐름이 어떻게 만나 성공 신화를 써내려가는지 살펴봤다.
‘무서운 장면 없이 무서운 영화’라는 <컨저링>(2013)의 홍보 카피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하고는 이야기를 흐지부지 끝내버리거나 쓸데없이 잔인하기만 해서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식상한 공포영화에 질린 관객을 향해 공포다운 공포를 보여주겠다는 의도가 담긴 대담한 카피였다. 효과가 아닌, 연출로서 무언가를 보여주겠다는 것. 제작비 2천만달러로 전세계 3억달러의 수익을 벌어들인 <컨저링>의 인기를 설명해주는 가장 명확한 단서다. 최근의 할리우드 시스템 내에서 비교적 적은 예산으로 기획력과 입소문만으로 흥행을 이끌어내는 이같은 사례는 극장으로서도 꽤나 신선한 현상이다. 슈퍼히어로영화가 제공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고 있는 영화적 재미를 공포영화가 일깨워주고 있다. 이에 가장 앞장선 감독이 바로 제임스 완. <쏘우> 시리즈의 성공으로 할리우드에서 이미 입지를 굳힌 그는 유체이탈을 경험하며 악령에 맞서는 어린아이 이야기인 <인시디어스>(2010)를 몇해 전에 이미 완성해 공포영화로서의 능력도 인정받던 중이었다. 그는 할리우드의 떠오르는 제작사 블룸하우스 프로덕션과 <인시디어스> 시리즈를 계약하게 되는데, 이와 별개로 웨인스타인 컴퍼니 산하의 디멘션 필름에서 외전 격인 <데모닉>(2015) 제작에도 참여하는 등 공포영화 제작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는 제작자로서 영화 전체의 완성도는 연출감독에게 맡기고, 그 자신은 장르적 속성을 어떻게 변주 혹은 계승할지 그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는 마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라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케빈 파이기 같은 인물의 역할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제임스 완 감독의 이같은 제작 전략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기회는 때마침 뉴라인 시네마가 갖고 있었던 <컨저링> 프로젝트를 만나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워런 부부라는 실존했던 퇴마사의 경험담을 토대로 한 <컨저링> 프로젝트는 제임스 완 감독에 의해 ‘컨저링 유니버스’로 확장된다. 애초 스튜디오는 실화 소재의 영화가 흥행에 성공할 것이라 예상하고 <엑소시즘 오브 에밀리 로즈>(2005)를 제작하려다가 경쟁사인 소니에 기회를 뺏긴 상황이었다. 뉴라인 시네마의 창의적인 당시 개봉 전략은 <컨저링>이 개봉하던 2013년 1월 즈음에 마케팅팀에서 제임스 완 감독의 전작인 <쏘우>의 전력을 믿고는 비수기에 개봉하자고 밀어붙인 것이다. 그때만 하더라도 여름 공포영화 시장이 완전히 죽어버렸을 때다. 누구도 여름에 공포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지 않는 시대에 <컨저링>이 개봉 첫 주말에 거둔 수익은 4천만달러였고, 흥행 1위를 차지했다. 이에 힘입어 제임스 완 감독은 본격적으로 뉴라인 시네마와 함께 컨저링 유니버스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인시디어스> 시리즈를 만들고 있는 블룸하우스 프로덕션과는 별개로 규모나 자금 면에서 훨씬 지원이 넉넉한 뉴라인 시네마가 그의 그림을 그리기에 적합했을 것이라 여겨지는데, 아무튼 제임스 완은 뉴라인 시네마와 함께 <컨저링> 1, 2편, 그리고 스핀오프 격인 <애나벨> 1, 2편을 연이어 만든 다음 지금은 또 다른 스핀오프영화 <크록맨>과 <컨저링3>를 구상 중이다. 제임스 완 감독이 그리는 컨저링 유니버스 전략은 앞서 이야기한 마블의 전략과 유사하다. 그는 연출자가 각자 다른 톤 앤드 매너를 지닌 영화를 만들되 중심을 총괄하는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 배경에는 제임스 완 감독의 가능성을 인정해준 뉴라인 시네마가 있었다.
뉴라인 시네마는 미국의 영화 제작 겸 배급사로 시작한 회사다. 1967년 당시 27살이던 영화감독이자 제작자인 로버트 샤예(<인시디어스> 시리즈에서 영매로 등장하는 배우 린 샤예의 오빠다)는 저예산 독립영화와 예술영화를 배급하는 자그마한 배급사를 차렸다. 1970년대 초 대학가를 중심으로 선전영화를 배급하거나 존 워터스 감독의 초기 컬트영화를 주로 맡아왔다. 이후 공동 제작 등의 형태로 영역을 확장하다가 웨스 크레이븐 감독의 <나이트메어> 시리즈를 제작해 큰 성공을 거둔 이후, 공포영화뿐만 아니라 여러 영역으로 확장해 회사 규모를 키웠다. 2000년대 초반 <반지의 제왕> 시리즈 등으로 대성공을 거두지만 이후 급격하게 경영악화를 겪으면서 2008년에 타임워너그룹에 합병되었고 지금은 워너브러더스 산하의 제작 라인으로 들어가 있다. 한때는 과거의 영광에 발목 잡혀 인기 라이선스 캐릭터를 남발하듯 리부트 프로젝트에 목맬 때도 있었지만 팬들이 금방 지쳐 나가떨어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오직 시리즈만을 위한 리부트 작업은 비전이 없음을 금방 깨닫게 된다.
이같은 9회 말 2아웃 상황에서 뉴라인 시네마와 제임스 완 감독의 만남은 여러모로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기 좋은 조합이었다. 그제야 뉴라인 시네마도 과거 공포영화 전문 제작사의 명성을 되찾게 된다. 한때는 혹독한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지만 <컨저링> 성공 이전에 뉴라인 시네마만의 확고한 공포영화 제작 방향은 지니고 있었다. 이를테면 다른 스튜디오가 쉽게 무시해버릴 것 같은 적은 예산의 기획을 뉴라인은 놓치지 않고 있었다. 최근의 대형 스튜디오가 대부분 블룸하우스 프로덕션 같은 전문 제작사와 공동 제작 형태로 손잡고 리스크를 줄여나가려는 추세지만 유독 워너브러더스의 뉴라인 시네마에서는 자체적으로 제작을 꾸려오는 사례가 많다. 그 성과는 워런 부부를 앞세운 <컨저링>의 성공이 증명해주고 있다. 또한 뉴라인 시네마는 <컨저링> 시리즈와 스핀오프 격인 <애나벨> 시리즈 4편의 수익으로 전체 수익 10억달러를 돌파한 컨저링 유니버스라는 프랜차이즈를 갖게 됐다.
컨저링 유니버스는 뉴라인 시네마와 제임스 완 감독의 조합이 있었기에 가능한 성공 사례임과 동시에 뉴라인 시네마 스스로 이제는 장르영화만을 바라보며 투자하는 시대가 끝났음을 증명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물론 컨저링 유니버스라는 세계는 뉴라인 시네마가 가장 잘 만드는 소위 ‘하우스 호러’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영화들로 구성되어 있다. 제임스 완 감독의 영화들은 한정된 공간에서 가능한 밀실 공포, 그리고 일상적인 소품을 낯설게 만드는 공포효과 등을 통해 관객의 공포심을 자극한다. 이를테면 귀신 들린 집을 소재로 한 오컬트영화 장르 규칙의 적절한 사용이 영화의 근간을 이룬다. 가장 일상적인 공간인 집에서 벌어지는 공포는 제임스 완 감독의 전매특허다. 거기에 더해 그가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이탈리아산 호러영화’의 장식미에 대한 애정과 세련된 편집, 그리고 효과적인 음악 사용과 함께 스타배우도 없고 파격적으로 잔인한 장면도 없고 엽기적인 괴수도 없는 공포영화를 완성했다. 그것은 뉴라인 시네마가 지향하는 영화 전략, 장르영화에 투자하지 않고 감독의 비전에 투자하는 시대가 탄생시킨 새로운 결과물이다. 뉴라인 시네마의 리처드 브레너 감독은 이를 두고 “장르에 친숙한 감독을 찾되 장르를 밟고 일어설 수 있는 감독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뉴라인 시네마가 제임스 완 감독에게 투자하는 이유, 혹은 뉴라인 시네마의 부흥을 주도적으로 이끈 제임스 완 감독의 역량을 생각해보면 앞으로 공포영화 시장이 나아가야 할 방향 혹은 컨저링 유니버스에 어울리는 감독의 역량을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역대 뉴라인 시네마의 최고 흥행작 베스트3에 전세계에서 3억2천만달러의 수익을 올린 <그것>(2017)이 <반지의 제왕: 두개의 탑>을 제치고 3위에 오른 것도 이러한 전략의 성과다. 참고로 <그것>은 현재 2편이 제작 중이며 제임스 완 감독은 뉴라인 시네마와 함께 컨저링 유니버스의 정점이 될 ‘악마 수녀’를 소재로 한 <수녀>를 제작 중이다. 그가 뒤이어 DC 익스텐디드 유니버스의 한축을 담당할 <아쿠아맨>의 연출을 맡은 것도 한 장르에만 고여 있는 감독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블록버스터영화 위주로 제작되며 거대 자본을 들여 거대 수익을 내는 시장 구조에서 뉴라인 시네마나 제임스 완 감독이 추구하는 영화들은 어쩌면 보다 고전적인 할리우드의 과거 흥행 방식에 적합한 영화들일지 모른다. 하지만 끊임없이 성공 사례를 만들고 있고 관객층을 넓혀가고 있다는 것은 할리우드뿐만 아니라 많은 장르영화 제작자들이 들여다봐야 할 부분이다. 이에 대해 뉴라인 시네마의 제작자 바버라 무시에티는 “뉴라인은 장르에 있어서는 다른 스튜디오보다 깨어 있다”고 말한다. 도전하는 감독과 제작사의 만남이 흥미로운 영화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프레디가 지은 집
사람들은 뉴라인 시네마를 ‘프레디가 지은 집’(The House That Freddy Built)이라고 부른다. 1980년대 당시 방세 낼 돈도 없을 정도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던 웨스 크레이븐 감독은 <나이트메어> 시나리오를 들고 디즈니와 파라마운트 등의 스튜디오를 돌아다니다가 제작 불가 통보를 받는 등 악몽과도 같은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때 웨스 크레이븐 감독의 가능성을 알아본 이가 바로 뉴라인 시네마의 로버트 샤예다. 그는 <나이트메어>의 가능성을 보고 배급이 아닌 투자·제작까지 감행하는 일생 일대의 모험을 벌인다. 180만달러로 만든 영화가 북미에서만 2500만달러의 흥행을 거둔 데는 뉴라인 시네마의 도움이 컸다. 사실 뉴라인 시네마도 당시로서는 그리 비전이 있는 회사가 아니었다. 영화 제작 당시에는 스탭들에게 임금을 지불하지 못해 고생할 정도로 어려웠던 시기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때의 고통은 이후에도 장르영화에 특화된 제작 시도를 할 수 있게 해줬고 지금의 뉴라인 시네마의 색깔을 견고히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이들의 혁신적인 성공에 ‘프레디가 지은 집’만큼 잘 어울리는 별명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을 다르게 해석해보자면 뉴라인 시네마가 끊임없이 개발해온 ‘하우스 호러’라는 서브 장르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다. 프레디 크루거라는 희대의 악마가 주인공들을 괴롭힐 때 그것도 가장 안락해야 할 내 집에서 공포를 당할 때의 무서움은 당연히 배가된다. 익숙했던 공간이 잔혹한 공간으로 뒤바뀌는 것, 즉 하우스 호러 영화는 집이라는 일상의 공간에서 불상사가 생기는 공포를 노린다. 그것은 제임스 완 감독이 늘 주장해오는 공포영화의 미덕, 가장 따뜻하고 아늑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공포야말로 관객을 사로잡을 공포라는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다. ‘프레디가 지은 집’은 뉴라인 시네마가 지향하는 공포영화 제작 방향을 규정하는 말로도 오래 해석될 것 같다. 다른 어떤 스튜디오도 이런 흥미진진한 별명을 얻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