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권투선수라는 타이틀은 빛바랜 영광일 뿐, 지금은 젊은 친구들의 스파링 상대나 하고 있는 반백수 조하(이병헌). 자신을 버리고 새살림을 차린 엄마(윤여정)에 대한 원망도 묵은 감정이 된 지 오래. 하지만 17년 만에 다시 만난 엄마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동생 진태(박정민)와의 동거가 조하의 삶을 조금씩 바꿔놓는다.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 이병헌은 모처럼 힘을 쭉 뺀다. 웃기도 많이 웃고, 몸개그도 선보인다. 거의 20년 전 출연한 드라마 <해피투게더>(1999)에서 무명의 야구선수 서태풍이 보여준 인간적 매력을 다시 소환한 느낌이랄까. 카리스마를 내려놓고 허술하고 투박한 동네 형이 된 이병헌을 만났다.
-<싱글라이더>(2017), <남한산성>(2017)에 이어 <그것만이 내 세상>까지 2017년에만 <씨네21> 표지 촬영을 세번이나 했다.
=이제 당분간은 못 볼 수도 있다. (웃음) 곧 드라마를 찍게 될 거라. <남한산성>을 끝내고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갑자기 또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났다. <남한산성> 촬영을 끝내고 봄이 시작될 무렵 <그것만이 내 세상> 출연을 결정짓고 여름에 촬영에 들어갔다.
-<남한산성>의 최명길과 <그것만이 내 세상>의 조하는 극과 극의 인물인데, 그 간극을 오가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공통된 것이 하나도 없는 캐릭터고 장르였다. 하지만 연기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아주 다른 것을 연기하는 데서 오는 재미와 카타르시스가 있었다. 카타르시스의 종류가 다른 거지,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건 매 작품 비슷하다.
-<그것만이 내 세상>은 신파적 설정으로 가득한 영화다. 제작사인 JK필름의 휴먼 코미디 장르에 출연한 건 의외의 선택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사의 특징이 어떻다, 장르적 특성이 어떻다 하는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작품을 고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내 마음이 움직였느냐 아니냐다. 세련된 장르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의 기준도 저마다 다를 거다. 어떤 사람한테는 <싱글라이더>가 세련되지 않은 영화일 수 있고 어떤 사람한테는 <그것만이 내 세상>이 세련된 영화일 수 있다. 어쨌든 내 마음이 움직였다면 믿고 가는 거다. 이번 작품의 경우 전반적인 정서가 좋았다. 조하라는 캐릭터가 가진 투박함도 좋았고.
-조하는 한때 WBC 웰터급 동양 챔피언이었지만 지금은 자기 방 한칸 없는 신세의 인물이다. 그렇다고 조하 캐릭터가 심각하고 거칠기만 한 인물로 묘사되진 않는다.
=객관적으로 보면 조하의 현실은 힘들지만, 조하에겐 힘들고 팍팍한 현실이 어려서부터 익숙하게 경험한 삶 그 자체다. 그렇기 때문에 조하의 감정이 늘 우울하거나 어둡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위기나 불행이 닥쳤을 때도 익숙한 듯 넘겨버릴 수 있고. 그래서 일상적인 모습, 일상의 행복과 기쁨과 웃음을 표현하려 했다. 그런데 감독님이 촬영 중반이 넘어가면서 몇번 그런 얘길 하셨다. 자신이 쓴 조하랑 내가 연기한 조하 캐릭터가 다르다고. 감독님이 쓴 조하는 더 거칠고 나쁜 놈 같은 캐릭터였다고. 내가 시나리오를 잘못 해석했나, 그럼 다르게 연기해야 하는 건가 싶었는데 그러진 않아도 된다고, 나만의 조하가 있다고 하더라. (웃음)
-전직 복서이기 때문에 복서의 몸을 만드는 작업도 수반됐을 것 같은데, 어떻게 훈련하고 몸을 만들었나.
=복싱선수로서의 기본적인 자세나 몸놀림은 복싱선수 출신의 무술팀 스탭에게 배웠다. 대신 몸 만드는 데는 전혀 주력하지 않았다. 어차피 한물간 복서라 몸도 살짝 한물가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핑계로 다이어트를 안 했다. 영화를 보면 아주 보통 몸매다. (웃음) 대신 반팔 티 입고 돌아다니면서 전단지를 돌리는 장면이 있기 때문에, 티셔츠 경계선 따라 새까맣게 팔을 태우는 데는 신경 썼다. 조하가 어떤 삶을 사는 사람인지 생활의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다. 참고로 복싱은 이번이 세 번째다. 20대 때 심은하와 같이 출연한 드라마 <아름다운 그녀>(1997)에서 처음 복싱선수 역을 맡았는데 그때 열심히 도장 다니며 훈련했다. <달콤한 인생>(2005)에선 섀도복싱하는 장면이 있어서 섀도복싱 자세를 지도받았다.
-현장에서 애드리브도 많이 했다던데.
=미리 애드리브를 준비해가진 않았다. 애드리브를 선호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런데 애드리브가 필요한 캐릭터와 장르가 있다. <내부자들>(2015)의 안상구가 그랬고. <그것만이 내 세상>은 캐릭터뿐만 아니라 장르 자체도 애드리브가 발휘될 수 있는 여지가 많았기 때문에 현장에서 아이디어를 많이 낸 편이다.
-올해는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 출연한다. <아이리스>(2009) 이후 오랜만의 드라마 출연이다.
=19세기 후반이 배경이고,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9살에 미국에 건너가 미국인보다 더 미국인처럼 자라 미군이 돼서 자신을 버린 조선으로 돌아오는 인물이다. 김은숙 작가와는 전부터 언젠가 한번은 작품으로 만나면 좋겠다는 얘길 했었고, 이번 작품으로 기회가 닿았다. 이후 영화 계획은 아직 미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