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여성감독②] <파란입이 달린 얼굴> 김수정 감독 - 불편한 정서가 어때서
2018-01-17
글 : 장영엽 (편집장)
사진 : 최성열

‘파란입이 달린 얼굴.’ 이 미스터리한 제목의 의미를 영화는 마지막까지 설명해주지 않는다. “영화 작업을 할 때 제목을 빨리 정하는 편이다. 그런데 유독 이 영화는 그럴 수가 없었다. 시나리오를 다 썼을 때 한 여자의 얼굴이 불현듯 떠올랐다. 유화 물감을 두껍게 덧칠한 느낌의, 파란 입이 달린 얼굴이었다. 입술이 아니라 입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그건 굉장히 추상적인 느낌의 이미지였다.”

김수정 감독이 떠올린 ‘파란입’을 가진 여성. 그녀가 이 영화의 주인공 서영(장리우)이다. 병든 어머니와 장애인 오빠를 둔 그녀의 삶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서영은 뭇 한국 독립영화에서 보아왔던 불우한 여성 캐릭터들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인물이다. 그녀의 목표는 이 정글 같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다. 병든 어머니의 병원비를 더이상 내지 못하겠다고 선언하는 천하의 불효자식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작업복을 빌려 주지 못하겠다는 동료의 외면에 브래지어 차림으로 일하는 한이 있더라도. 개성과 표정을 잃고 오로지 생존을 위해 앞으로만 전진하는 한 여성 노동자의 무시무시한 생명력을, <파란입이 달린 얼굴>은 지극히 현실적인 필치로 담아낸다. 최근의 한국영화에서 완전히 소외된, 자본주의의 사각지대에 위치한 여성의 초상을 남다른 시각으로 조명했다는 데 이 영화의 성취가 있다.

<파란입이 달린 얼굴>의 서영은 김수정 감독의 사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캐릭터다. “창작 활동을 하다보니 생계를 위해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도시락 공장과 마트에서 일할 때 서영과 비슷한 여성들을 만났다. 굉장히 무표정하고, 절대로 타협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자신이 챙겨야 할 것들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할까 싶어 처음에는 너무 불편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수정 감독은 평소 불편하게 생각했던 한 여성이 허겁지겁 끼니를 때우는 모습을 목격했다. 맛을 느끼기는커녕 그저 생존을 위해 음식을 섭취하는 게 아닐까 싶었던 그녀의 모습을 보며 김수정 감독은 그 이면의 이야기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고갈>(감독 김곡, 2008)의 강렬한 연기로 그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배우 장리우가 합류하며 추상적이었던 서영의 모습은 점차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배우들에게 중요하게 얘기했던 건 ‘보이지 않는 공격’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이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궁지에 몰려 있다. 그런 상황에 놓여 있는 인물들이 살아남기 위해 필연적으로 취할 수밖에 없는 공격적인 태도, 그로부터 감지되는 불편함의 정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독특한 리듬감과 그로테스크한 유머는 이 영화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다. 특히 직장에서 잘리지 않기 위해 다른 동료들을 몰아내야 하는 상황에 처한 서영이 에어로빅으로 모두를 순식간에 ‘제압’하는 장면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는 복잡 미묘한 정서를 가진다. “친구와 광안리 바다에서 텐트 치고 잔 경험이 있는데 새벽 6시쯤 에어로빅 노래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깬 적이 있다. 텐트 밖으로 나와보니 동네 아주머니들이 힘차게 에어로빅을 하고 계셨는데 그때의 정서적인 충격이 강렬하게 남았던 것 같다”라며 김수정 감독은 웃었다. 이 장면이 인상적으로 느껴졌다면 그건 “워낙 몸을 잘 쓰는” 배우 장리우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고.

<파란입이 달린 얼굴>

“거칠게 표현하자면 ‘맛이 간 여자들’에게 관심이 많다.” 김수정 감독은 지난 <씨네21>과의 인터뷰(1126호 특집 ‘경기도 다양성영화 지원사업 G-시네마 여덟 감독 이야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대인관계에 서툴고 마음이 불안정한, 사회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어딘가 뒤틀린 인물의 이야기에 관심이 가는 건 나 역시 그녀들과 닮은 점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김수정 감독은 말한다.

부산 태생인 그녀는 지난 2005년 희곡 <청혼하려다 죽음을 강요당한 사내>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찾아온, 갑작스러운 등단이었다. “누군가에겐 죄송스럽게도, 절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어렵지 않게 등단했다. 서울로 올라와 갑자기 대학로에서 작가로 활동하며 혼란스러웠다.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자꾸만 일은 들어왔고, 마음이 어지러우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회피하고 싶은 마음에 여기저기로 여행을 떠났다.” 혼란의 시기, 김수정 감독은 우연히 미디액트의 영화 제작 워크숍을 듣게 됐다. 작품을 올린 다음에는 온전히 배우의 힘으로 진행되는 연극과 달리 영화는 스탭들과의 소통을 통해서만 매 장면을 만들어나갈 수 있었다. “조각난 장면들을 이어붙여”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에 그녀는 완전히 매료되었다. 김수정 감독은 2011년 성매매가 기업화되었다는 가정 아래 성매매를 직업 삼아 살아가는 남녀 이야기를 다룬 <이매진>, 2013년 소심하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육가공공장 노동자의 삶을 조명한 영화 <달을 쏘다>를 연출했다. <파란입이 달린 얼굴>은 그녀의 세 번째 장편영화다.

지난 2015년 제작된 <파란입이 달린 얼굴>은 배급사를 찾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전주국제영화제 배급지원 마켓에서 만난 배급사 관계자들의 반응은 거의 한결같았다. ‘이 영화는 트렌디하지 않다, 이 영화는 불편하다’는 게 그들의 얘기였다. 독립영화만의 고유한 영역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지금의 독립영화는 상업영화로 가기 위한 디딤돌이 되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영화감독으로서의 지속 가능성을 찾고 싶은데, 도저히 찾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이 질문은 물음표로 남아 있다.” 그녀는 부산에서 함께 독립영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활동 중이던 김영조 감독(<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추천으로 부산 유일의 영화배급협동조합 씨네소파를 알게 되었고, 그들의 도움으로 <파란입이 달린 얼굴>을 관객에게 선보일 수 있게 됐다.

<파란입이 달린 얼굴>을 연출하며 김수정 감독은 일련의 변화를 체감했다고 말한다. “어떤 강박관념이 있었다. 예술이 사회참여적이어야 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 되어야 한다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화두로 세편의 영화를 찍었는데, <파란입이 달린 얼굴>이 그 정점이었던 것 같다. 지난 2017년 여름, 해변에서 우연히 만난 남녀의 하룻밤을 조명한 <해변의 캐리어>를 촬영했는데 이 영화부터 좀 달라졌다는 생각이 든다. 훨씬 더 소프트해졌다고 해야 하나.”

김수정 감독은 앞으로도 부산 지역에서 영화 활동을 이어갈 계획이다. “부산 지역에서 영화를 만드는 건 정말로 고되다. 배우도 없고, 제작 인프라도 부족해 서울에 있는 스탭들을 데리고 가거나 내가 서울로 가서 영화를 찍어야 하는 상황이다. 앞으로는 지역에서의 창작 활동이 부디 활성화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즈 야스지로를 존경하지만, 스스로 따뜻하고 소박한 영화를 절대 만들지 못할 것을 안다는 김수정 감독의 관심은 “자기 색깔이 강한 사회 부적응자”들에 머물러 있다. ‘파란입’처럼 이질적인 그녀의 다음 영화를 기다린다.

필모그래피 2017 <해변의 캐리어> 2015 <파란입이 달린 얼굴> 2013 <달을 쏘다> 2011 <이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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