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리를 다룬다면 몽정도 다뤄야 하는 것 아니냐, 혹은 탐폰 광고하려고 영화 찍었냐. 이런 댓글을 읽을 때마다 ‘현타’가 오죠.” 다큐멘터리 <피의 연대기>의 극장 개봉을 준비하고 있는 김보람 감독의 말이다. ‘본격 생리 탐구’ 다큐멘터리를 표방하는 이 영화는 지난 2017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 옥랑문화상을 수상한 화제작이었다. 인류의 절반이 경험하고 있지만 아무도 소리내어 얘기하지 않는 ‘생리’에 대해, <피의 연대기>는 지역과 문화, 역사와 종교, 세대와 직종을 가로질러 다양한 담론을 펼친다. 말하자면 ‘월경에 관한 종합백과사전’ 같은 영화라고 할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공개된 뒤, <피의 연대기>는 생리에 대한 실용적인 정보와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으로 관객의 많은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극장 개봉은 또 다른 장벽을 실감하게 했다고 김보람 감독은 말한다. “생리가 특별한 일도 아닌데, 별거 아닌 일로 굳이 영화까지 만들 필요가 있었냐는 네티즌의 반응도 적지 않았다. 그런 댓글을 읽다보면 ‘생리’라는 이슈를 대중적으로 공론화하기에 여전히 장벽이 높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피의 연대기>는 김보람 감독의 네덜란드 친구, 샬롯으로부터 출발한 영화다. 2015년 10월, 다큐멘터리 전문 배급사에 다니던 그녀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네덜란드 영화인들과 친구가 됐다. 샬롯도 그들 중 한명이었다. “서울에서 송별회를 했는데, 샬롯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고 싶었다. 선물을 사러 돌아다녔더니 전부 ‘메이드 인 차이나’더라.” 그녀는 할머니가 직접 만든 생리대 주머니를 샬롯에게 선물로 주었고, 평생 탐폰만 사용해온 샬롯은 그녀의 선물을 신기해했다. “문득 이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왜 한국 여성들은 주로 생리대만 쓰고, 서구 여성들은 탐폰을 사용하는 걸까? 생리용품의 문화적 차이를 주제로 각 국가 여성들의 사례를 비교하는 짧은 단편을 만들어볼까 싶어 샬롯과 헤어진 그날, 집에 돌아와 현존하는 다큐멘터리를 찾아봤다.” 그런 영화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보람 감독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생리와 관련된 일련의 흥미로운 자료들을 찾을 수 있었다. 해외 여성들의 생리대 면세 청원 운동, 인스타그램이 삭제해 논란을 빚은 캐나다 여성 예술가 루피 카우르의 생리혈이 묻은 사진, 뉴욕시의 ‘무상 생리대’ 법안 발의, ‘생리가 커밍아웃한 해’라는 미국 <코스모폴리탄>의 기사. “지금 여기서 무슨 일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늦기 전에 이러한 변화들을 신속하게 담고 싶었다.” 김보람 감독이 회사를 그만두고 자신의 첫 장편다큐멘터리 <피의 연대기>를 연출하게 된 이유다.
<피의 연대기>가 인상적인 까닭은 ‘무상 생리대’ 정책을 추진하는 정치인, 생리에 대한 다양한 지식을 가진 의사, 역사학자 등의 전문가 이외에도 지극히 평범한 보통의 여성들이 화자로 출연해 생리에 대한 경험담을 털어놓는다는 점이다. 선생님, 회사원, 고등학생, 자영업자, 영화 스탭 혹은 누군가의 엄마, 이모, 할머니(영화에서는 김보람 감독의 가족 구성원들이 직접 출연한다)가 들려주는 ‘생리 토크’는 비슷하면서도 각각 다르다. 목화를 베에 넣어 꿰맨 할머니의 생리대, 엄마의 면생리대 등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에는 그들의 세대와 문화와 환경이 반영되어 있다. “이 영화를 찍을 당시만 하더라도 생리에 대해 마음놓고 얘기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우선 잘 알려진 페미니스트와 여성주의 운동을 하는 분들은 최대한 섭외하지 않으려고 했다. 평소 생리에 대한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을 법한, 굉장히 평범하고 어떻게 보면 보수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법한 직업군의 여성들을 섭외하려고 했다.” 흥미로운 점은 인터뷰에 응한 대부분의 여성이 ‘기혼’이라는 점이다. “인터뷰를 수락한 기혼자가 또 다른 기혼자 여성들을 소개시켜주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이런 상황을 경험하고 나니 미혼 여성들이 자신의 몸에 대해 공개적으로 얘기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굉장히 크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대개의 한국 여성들이 생리대 이외의 다른 생리용품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다. “여성들이 생리컵을 쓰고 싶은데 못 쓰겠다고 말하는 이유는 대부분 ‘질을 만지는 게 무서워서’였다. 자신의 몸인데도 만지는 것을 부담스럽고 꺼려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여성의 몸에 대해 지켜야 하고 숨겨야 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얘기만 할 뿐 내 몸을 잘 알아야 한다고 얘기하지 않는 사회와 교육의 문제가 가장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다양한 생리용품의 존재를 인지하고 시도해보는 건 “여성의 몸에 대해 더 잘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고 김보람 감독은 말한다. 해면 탐폰, 스펀지 탐폰 등 <피의 연대기>가 소개하는 다양한 생리용품 중 가장 비중 있게 다뤄지는 도구는 생리컵이다. “다른 생리용품을 사용할 때보다 질을 많이 만져야 하고, 다른 도구들이 피를 흡수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생리컵은 피를 모았다가 버리는 도구이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경험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김보람 감독의 얘기다. 영화 속 가장 인상적인 장면 또한 머리에 고프로 카메라를 단 김보람 감독이 화장실에서 생리컵에 담긴 자신의 피를 흘려보내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순간이다. “촬영감독이 찍을 수도 있었지만 생리는 모든 여성들이 혼자 하는 것이므로 직접 촬영하고 싶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피의 연대기>는 음악감독을 제외하고 20대 혹은 30대 초반의 젊은 여성 영화인들이 스탭으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품이다. 여성 스탭들만 구한다는 소문에 ‘강성 페미니스트’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는 김보람 감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 스탭들과의 작업을 고수한 이유에 대해 “출연진이 카메라 앞에서 진솔한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게 하기 위해”라고 답했다. 그동안 영화 현장에서 젊은 여성 스탭들이 적절한 페이를 받지 못했던 점이 아쉬웠던 김보람 감독이 연출자로서 가장 자부심을 느끼는 지점은 “이번 다큐멘터리로 적정 금액이 여성 스탭들에게 돌아가는 구조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미국 코미디영화와 시트콤을 좋아하는 넷플릭스 세대”라고 김보람 감독은 스스로를 소개한다. 대학 시절 국문과를 졸업하고 소설가를 꿈꾸던 그녀가 다큐멘터리와 인연을 맺은 건 우연한 기회로 EBS 다큐멘터리 <우포늪의 사람들>의 작가를 맡으면서부터다. “등단을 하지 못해 우울해하던 차였다. 우포늪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며 주민들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그동안 너무 나 자신의 문제에만 천착해 살아왔구나, 세상에 넓고 좋은 이야기가 많은데 그게 꼭 픽션일 필요는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후 <저수지 게임>(2017)의 프로듀서로 참여한 김보람 감독은 <피의 연대기>를 시작으로 감독으로서의 관심사와 필모그래피를 넓혀갈 것을 결심했다. “좀더 편하게 소구될 수 있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라는 그녀가 최근 염두에 두고 있는 아이템은 한국 여성 코미디언의 계보를 탐구하는 것이다. “송은이, 김숙씨가 방송가에서 누구도 주목하지 않을 무렵 팟캐스트라는 새로운 매체에 도전했고 그로부터 새로운 방식의 콘텐츠와 캐릭터가 탄생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한국 최초의 여성 코미디언은 누구였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더라.”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 (<SNL>)와 미국 문화에 익숙한, 젊은 감각의 다큐멘터리스트가 바라본 여성 코미디언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그전에 <피의 연대기>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담은 그녀의 책 <생리공감> (1월 말 출간 예정)을 만나볼 차례다.
필모그래피 2017 <피의 연대기> 감독 2017 <저수지 게임> 프로듀서 2014 <우포늪의 사람들>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