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기예르모 델 토로가 빚은 사랑의 형태
2018-02-21
글 : 장영엽 (편집장)
아름답고 기괴한 성인 동화

“음악을 낮춰주세요. 이 자리에 서기까지 25년의 시간이 걸렸으니, 나에게 시간을 조금만 더 주세요.” 지난 1월 열린 제75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감독상 수상 소감의 끝을 알리는 음악이 울려퍼지려고 하자 기예르모 델 토로는 이렇게 말했다.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2006), <퍼시픽 림>(2013) 등 개성 있는 판타지·SF 영화로 주목받아온 멕시코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는 유독 상복이 없는 감독이었다. 그런 그의 신작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2017)은 그간의 설움을 완전히 씻어버릴, 2018년 미국 어워드 시즌의 가장 강력한 화제작으로 떠오르고 있다. 몬스터영화의 거장이 만든 이 사랑 이야기는 어떻게 할리우드를 사로잡았나. 이 지면에서는 2월 22일 국내 개봉을 앞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에 대한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전한다. 지난 1월 말 진행한 기예르모 델 토로와의 전화 인터뷰와 영화 감상에 도움이 될 주요 레퍼런스에 대한 소개도 함께 담았다.

“자네가 절대 못할 한 가지가 있어.” “그게 뭔데요?” “사랑 이야기. 자네는 소녀도 괴물처럼 만들어버릴 능력은 있어도 진짜 인간의 러브 스토리는 만들지 못할 거야.” 이건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그러니까 기예르모 델 토로가 <헬보이>(2004)를 구상하고 있던 시점에 절친한 감독 제임스 카메론과 나눈 대화라고 한다. 아마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의 델 토로는 <미믹>(1997)과 <악마의 등뼈>(2001)를 만든 감독이었다. 괴수영화를 찍기 위해서라면 그는 무엇이든 할 남자였지만 지극히 평범한 감정인 사랑에 대한 영화를 연출하라면, 글쎄. 제임스 카메론의 말대로 기예르모 델 토로와 사랑이란 단어는 평생 마주할 일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신작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이하 <셰이프 오브 워터>)은 명백한 사랑영화다. 이건 괴물 같은 소녀가 등장하지 않으면서도(대신 인간다운 괴물이 등장한다) 가장 인간다운 사랑 이야기를 하는 델 토로의 작품이다. 더불어 이 영화는 이제는 고전이 되어버린 뭇 로맨스영화들처럼 절절하고 애틋한 감정과 로맨틱한 시퀀스 그리고 감미로운 멜로디를 담고 있다. 제임스 카메론이 틀렸다. 델 토로는 모두의 예상보다 훨씬 근사한 로맨스영화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3개 부문 후보로 오르며 2018년 오스카의 가장 뜨거운 화제작이 된 이 작품은 당분간 기예르모 델 토로의 최고작으로 기억될 듯하다.

어른의 세계에 진입한 기예르모 델 토로

<셰이프 오브 워터>는 1962년 미국 볼티모어를 배경으로 미 항공우주 연구센터의 비밀 실험실에서 일하는 청소부 일라이자(샐리 호킨스)의 뒤를 좇는다. 그녀의 삶은 몹시 고요하다. 일라이자가 말을 하지 못하는 농아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집에는 신식 TV와 매끈한 새 자동차를 갖추고, 직장에서는 소련과의 우주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앞만 보고 나아가는 중산층 미국인들에겐 언어장애가 있는 청소부의 수화를 끈기 있게 들어줄 마음의 여유가 없다. 단조로운 삶을 이어나가던 일라이자는 어느 날 비밀 실험실에 갇혀 있는 괴생명체(더그 존스)를 발견한다. 비늘로 뒤덮여 있으며 아가미로 호흡하지만 인간의 형상을 한 이 정체불명의 존재와 교감하며 일라이자는 어느덧 그를 사랑하게 된다. 한편 소련과의 우주 경쟁에서 밀리자 초조해진 미국은 그들의 히든카드인 ‘아가미 인간’(더그 존스가 연기하는 바로 그 캐릭터다)을 해부해 실험에 박차를 가하려 하고, 일라이자는 실험실의 보안 책임자 스트릭랜드(마이클 섀넌)의 눈을 피해 아가미 인간을 탈출시키려 한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전작과 <셰이프 오브 워터>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그가 이 작품에서 비로소 어른의 눈높이에 맞춰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델 토로의 세계 속에서 중심이 되어왔던 인물들은 <악마의 등뼈>와 <미믹>를 비롯해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처럼 대개 정서적으로, 물리적으로 고립된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페르소나를 보다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델 토로는 그 역시 아이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했다고 고백한다. “그동안 나는 영화를 통해 내 유년 시절을 반영한 이야기를 해왔다. 그런데 <셰이프 오브 워터>를 만들던 시점의 나는 성인이 된 뒤 내게 영향을 미친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영화, 사랑, 다르다는 것을 적대시하는 분위기에 대해.” 아이가 주인공이 아닌, 보기 드문 기예르모 델 토로의 연출작인 <셰이프 오브 워터>는 그러므로 어른의 삶과 사랑을 본격적으로 다룬 델 토로의 첫 번째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소수자의 연대 그리고 몸의 교감

영화에서 델 토로가 주목하는 어른들은 미국 사회의 주변부에 위치한 인물들이다. 언어장애를 겪고 있는 일라이자, 그녀의 동료 청소부이자 흑인 여성 젤다(옥타비아 스펜서), 실직한 게이 아티스트 자일스(리처드 젠킨스)와 신분을 감추고 미국에서 과학자로 살아가는 러시아 스파이 호프스테틀러(마이클 스털버그)가 그들이다. 이들은 미래에 대한 기대로 충만했던 1960년대 미국의 그림자와도 같은 존재다. “나는 사람들이 ‘다시 한번 (1960년대와 같은) 위대한 미국을 만들자’고 말할 때, 그 말이 결코 구체화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당신이 앵글로색슨의 혈통을 지닌 청교도였다면, 1960년대는 좋은 시절이었을 거다. 당신은 제트카를 가졌을 것이고, 모든 것이 신속하게 처리되는 부엌을 가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960년대가 모두에게 그렇게 좋은 시절이었던 건 아니다.” 멕시코 출신 감독으로 미국 사회에 정착해 살아가며 수많은 차별을 경험했다는 기예르모 델 토로는 경제적 풍요의 이면에 인종차별과 성적 지향성에 대한 억압이 존재했던 1960년대의 미국을 소환해 현재의 미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고찰하려 한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와 소수자에게 쏟아지는 차가운 시선 같은 풍경 말이다. 일라이자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아가미 인간은 그중에서도 가장 이질적이고 수용하기 힘든 존재로 묘사된다.

하지만 델 토로가 그려낸 약자들은 스트릭랜드 같은 포식자들에게 마냥 당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가장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이들은 “똥이나 치운다”며 멸시당하고 보이지 않는 존재로 취급받는 청소부들이며, 아가미 인간에 대한 일라이자의 사랑은 웬만한 첩보 기술로 어림도 없을 비밀 실험실에서의 탈출을 가능하게 한다. 사랑과 연대의 강력함을 일깨우는 일라이자와 젤다, 일라이자와 자일스의 뭉클하고도 유쾌한 우정도 인상적이지만 <셰이프 오브 워터>의 정서를 고양시키는 일등 공신은 일라이자와 아가미 인간이 나누는 ‘몸의 교감’이다. 일라이자가 알려준 수화로 소통하는 두 존재의 모습은 고요하면서도 아름답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그의 첫 장편영화 <크로노스>(1993)의 고요함에 대해 얘기하며 무성영화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적이 있는데, 그가 무성영화를 사랑하는 이유는 말이 사라진 자리에서 더 많은 것들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이러한 무성영화의 미덕을 이어받은 영화다. 언어가 야기하는 혼란과 잡음을 배제한 일라이자와 아가미 인간의 관계는 보다 원초적이면서도 본질에 가깝게 묘사되는데, 델 토로는 이러한 연인의 관계를 보다 로맨틱하게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우아한 댄스와 감미로운 멜로디가 흐르는 뮤지컬영화의 설정을 취한다.

다정하고 로맨틱한 섹슈얼리티

섹슈얼리티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는 ‘성인 동화’에 가까운 이 영화에서 감지할 수 있는 델 토로의 변화이자 그의 영화 특유의 아름다운 기괴함을 완성하는 도구라고 할 수 있다. 일례로 아침마다 욕조에서 규칙적으로 자위를 하는 일라이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오프닝 시퀀스를 들 수 있겠다. 동화풍의 이야기를 상상했던 관객에게 정서적 충격을 안기는 이 초반부의 장면은 일라이자가 왕자의 키스라는 클라이맥스를 기다리는 동화 속 공주라기보다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주체적인 여성이라는 점을 한눈에 보여준다. 일라이자와 아가미 인간이 알몸으로 서로를 껴안고 물속에서 정사를 나누는 장면은 <셰이프 오브 워터>의 정서적인 클라이맥스라 할 법한데, <스플라이스>(2009)처럼 파격에 주목하기보다 다정하고 로맨틱한 의도로 연출되었다. 이 장면은 특히 크리처 디자이너 셰인 마한과 몬스터 모델 전문가 마이크 힐 등이 “여성이 키스하고 싶은 입술과 각진 턱, 동그란 눈을 가진 핸섬한 외모”의 크리처를 만들어달라는 델 토로의 주문에 따라 완성한 아가미 인간의 물리적인 아름다움이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반투명 더듬이와 반짝이는 피부를 가진 <셰이프 오브 워터>의 아가미 인간은 델 토로가 만들어낸 크리처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답고 섬세한 외양을 가졌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괴물들에 충성을 다해왔다. 그들이 나를 구원했고, 나는 그들의 일부가 되었다. 지난 25년간, 나는 손으로 빚은 기묘한 동화에 감정과 색깔과 빛과 그림자를 불어넣어왔다. 그리고 그중에서 특별히 세 작품을 언급하고 싶은데, <악마의 등뼈>와 <판의 미로…> 그리고 <셰이프 오브 워터>라는 우화가 내 인생을 구원했다.” 지난 1월 골든글로브 감독상을 수상한 자리에서 기예르모 델 토로는 이렇게 말했다. 그 자신이 가장 아끼는 세 작품 중 하나가 된 <셰이프 오브 워터>는 몬스터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사랑이 가장 대중적으로 인정받는 계기를 마련한 작품이 될 것이다. SF장르와 몬스터영화에 인색한 미국 유수의 시상식이 이 작품을 주목하고 있는 이유는, 목소리를 잃은 공주와 괴물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이 성인 동화가 현대 미국 사회가 간과하고 있는 심연 어딘가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괴물들이 나의 삶을 구원했듯 당신이 괴물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존재가 당신들의 삶을 구원할 지도 모릅니다, 라고, 이 몬스터영화의 거장은 <셰이프 오브 워터>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사진 이십세기폭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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