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신문 기사에서 손원평이라는 이름을 우연히 발견했을 때 반가움 반, 놀람 반이었다. 그가 쓴 장편소설 <아몬드>가 제10회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하며 소설가로 등단했다는 내용의 소식이었다. 2001년 <씨네21> 영화평론상 우수상을 수상하며 영화평론가로 데뷔했고, 이후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진학해 <인간적으로 정이 안 가는 인간>(2005), <너의 의미>(2007) 등 몇편의 단편영화를 연출했던 그가 소설이라니. <씨네21>의 오랜 독자라면 아주 낯설지 않을 그는 영화와 소설을 가리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 쓰고 있었다. ‘소설가’ 손원평은 <아몬드>와 <서른의 반격> 두편의 장편소설과 단편 <4월의 눈>(<창작과비평> 2017년 겨울호 수록)을 냈다. <아몬드>는 윤재와 곤이라는 17살 동갑내기 두 친구가 혐오가 팽배한 현대사회에서 가슴으로 교류하며 성장하는 이야기고, <서른의 반격>은 제목대로 서른을 앞둔 여성 김지혜가 사회에서 겪는 고민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한편 주변 사람들과 함께 작은 변화를 도모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소재도, 장르도 다르지만 두 작품은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따스하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오랜만에 만난 손원평 작가와의 대화를 전한다.
-아이가 몇살인가.
=6살. 인터뷰 전에 어린이집에 보내고 왔다. 아이 때문에 일정을 오전에 잡는 걸 선호한다.
-아이를 키우고 있는 입장에서 너무나 공감한다. (웃음) <아몬드>는 5년 전 태어난 아이에게서 감흥을 받고 쓰게 된 이야기라고 들었다.
=임신을 하면 준비하던 영화를 잠깐 중단해야 하지 않나. 임신과 출산을 차례로 겪어야 함에도 일을 그만두지 말아야겠다는 나름 절박하고 굳은 의지가 있었다. 출산은 감흥이 없었고, 그렇게 고생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태어난 아이를 보니 너무너무 작더라. 낮은 침대에서 떨어지기만 해도, 몇 시간만 혼자 두어도 혼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러면서 아이에 대한 감정과 덩달아 인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다. 모든 아이가 발가벗겨진 채 세상에 나왔지만, 삶의 환경에 따라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갈 거라고 생각하니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슬펐다.
-책임감을 절실하게 느꼈나보다.
=부모로서 한 인간을 성장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실감이 안 나면서 ‘얘를 어떻게 키우지?’ 싶더라. 사람들은 자신의 아이에게 ‘건강하게만 자라다오’라고 말하지만, 아이가 자라면 아이에게 거는 기대가 달라지고 기대감 또한 더 커진다. 또 ‘아이를 잃어버리면 어떡하지?’라는 공포감도 생겨났다. ‘산후조리원에서 잠든 사이에 아이가 갑자기 사라지면 어떡하지? 나중에 다시 찾았을 때 아이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까?’ 혼자서 이런 상상을 하니 무서웠다. 나 또한 어렸을 때 엄마를 잃어버린 경험이 두번 정도 있었다.
-몇살 때 있었던 일인가.
=유치원 다닐 때와 초등학교 2학년 때. 초등학생 때 길을 잃어버려서 트럭 운전기사 아저씨에게 갔는데 그 아저씨가 태워준 덕분에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고마운 아저씨인데, 다른 사람이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라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어쨌거나 아이와 관련해 부모로서 두 가지 가정이 이 소설을 쓴 계기라 할 수 있다. 말하지도 못하는 아이와 감정을 통해 소통하는데, (나나 아이가)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되면 아이와 어떻게 교류할 수 있을까라는 가정이 하나다. 또 하나는 ‘아이가 (부모인) 내가 원하는 대로 자라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라는 거다.
-윤재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다. 남을 혐오하는 분위기가 팽배한 지금 시대에서 그의 이성적인 말과 행동은 누구보다 감정을 진솔하게 느끼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인간이 가진 가능성을 믿는 편이다. 씨앗에 햇볕을 충분히 쬐면 싹이 난다고 믿는다. 글을 쓸 때부터 이 소설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가 싹을 틔우고, 소년성을 가지게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곤은 어린 시절 엄마의 부주의로 부모를 잃게 돼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시간이 지난 뒤 부모의 품으로 돌아온다. 그런 상황에 놓이면 부모는 돌아온 아이를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살아온 문화가 너무 다른 사람들이 혈연이라는 이유만으로 내 울타리로 들어온다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 굉장히 큰 갈등을 겪을 것 같다. 함께 살아온 아이조차 사춘기를 거치면서 성격이나 태도가 변하면 아이도, 부모도 힘들어하는데 말이다.
-이야기는 윤재와 곤, 친해지기 힘든 두 아이가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자신의 상처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따뜻하게 그려낸다.
=모든 부모가 한 인간을 책임지다보니 아이와 관련된 상상을 많이 하지 않나. 이야기를 쓰는 사람으로서 그런 상상을 소설로 옮겼다. 결국 두 아이가 사랑받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작가의 말에서 아이가 잠을 잘 잔 덕분에 소설을 쓸 수 있다고 밝혔는데, 육아를 하면서 글을 쓰는 게 가능한가. (웃음)
=심지어 난 육아를 도와주는 사람도 없었다. 오로지 나와 남편 둘이서 아이를 키웠다. 가끔 친정엄마가 집에 들르실 때도 있었지만. 아이가 잘 잘 수 있었던 비결은 수면교육을 주기적으로 시켰고, 분유를 일찍 먹였기 때문이다. (웃음)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힘든 건 안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했고, 진이 너무 빠지는 모유 수유를 빨리 끊었다. 새벽까지 글을 쓰던 영화인의 습관이 몸에 밴 까닭에 아이가 새벽에 깨서 울면 나도 깨어 있으니 분유를 타서 먹였고, 애가 다시 잠들 때쯤 글을 쓰고. 운이 좋았던 것 같다. 내 일에 대한 열망이 컸던 까닭에 첫애를 셋째처럼 키웠다. (웃음)
-<아몬드> 다음에 낸 책 <서른의 반격> 얘기도 해보자. 88년생 여성 김지혜의 고민을 현실적으로 그려낸 이야기인데 어떻게 출발하게 됐나.
=아이를 낳고 <아몬드>를 썼던 2013년은 소설, 시나리오 등 정말 많은 이야기를 쏟아낸 시기다. 이때 쓴 모든 이야기가 출산, 부모가 되는 과정과 연결되더라. 어느 순간 젊은 사람들 이야기를 쓰고 싶더라. 당시 나는 소설의 주인공 김지혜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지만 사회에 나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상실감이 무척 컸었다. 무언가를 계속 쓰고 있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 굉장히 답답했다. 가정과 아이에게서 위안을 받으며 버틸 수 있었지만 너무 힘들었다. 그런 감정을 젊은 친구에게 녹여내 너무 우울하지 않은 시선으로 그들의 고민과 삶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속 김지혜 나이인 28살 때 어떤 고민을 했었나.
=그때는 희망이 좀더 있었던 것 같다. 상업영화를 빨리 찍을 줄 알았으니까. 이 소설을 쓸 때가 지혜의 심정과 똑같았다. 카페에서 글을 쓰고 있으면 나보다 어린 친구들이 모여 취업 준비를 하는 풍경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뭔가 하려고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쉽게 되지 않는 그들에게 동질감을 많이 느꼈다. 나 또한 글을 쓰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오늘 뭐 한 거지?’ 싶더라. 뭔가 열심히 한 것 같은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내가 쓰는 글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계속 써야 하는 막막함이 눈앞의 벽처럼 가로막는 느낌이었다. 이 소설은 유독 힘든 시기에 힘내서 썼던 이야기다.
-김지혜를 포함해 시나리오작가 무인, 기러기 생활을 하는 남은 아저씨 등 등장인물들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거창한 계획을 세우기보다 작은 행동을 실행하지 않나. 이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나비효과처럼 변화의 단초가 된다는 세계관이 인상적이었다.
=개인이 가진 힘을 믿는다. 개인은 사회의 밀알 같은 존재지만 각자가 가진 잠재력이 모여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나 파도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개개인의 생각을 표출할 수 있는 창구가 많아지면서 사회 분위기가 많이 바뀌고 있는 것 같다. 누구 하나가 잘나서 나머지 사람들이 그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저마다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며 자발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아몬드>도, <서른의 반격>도 ‘어떤 어른이 되고 싶나’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같다.
=좀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아몬드>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라면 <서른의 반격>은 어떤 어른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인 것 같다. 살면서 너무나 많은 실패를 경험하고 있고, 그로 인해 생긴 억울함을 가지고도 계속 도전하고 있는 지금까지 너무 힘들었다.
-경력만 보면 실패보다는 성공이 더 익숙해 보인다.
=나 또한 그런 생각을 한 적 있다. <씨네21>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했고, 재수하긴 했으나 영화아카데미도 일찍 입학하면서 빨리 영화감독으로 데뷔할 줄 알았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모든 일이 생각처럼 잘 풀리지 않았다. 영화사에서 영화를 준비하다가 어떤 이유 때문인지 안 되고, 다시 써야 했지만 또 안 되고. 많은 실패를 겪었다. 나중에는 내성이 생겨 실패하면 곧바로 일어나서 다시 도전하고 그랬지만. 그만큼 절박했다. 성공이 뭔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성공하면, 영화감독으로 데뷔하면, 이렇게 힘들었던 시절을 절대 잊지 말아야겠다, 잘난 척하지 말아야겠다, 항상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겠다’라고 생각했다. ‘잘해도 내가 잘해서 성공한 게 아니다, 실패해도 내가 못해서 실패한 게 아니다’, 이런 평상심을 가지게 됐다.
-그간 충무로가 더 많은 여성감독에게 충분하고 공정한 기회를 주지 않았는데.
=굳이 여성감독이기 때문에 차별을 받았다고 생각지 않는다. 여성감독 수가 적은 건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인 추세인데, 일단 장르를 구분하는 시도 자체가 남성적인 개념 같다. 스릴러나 액션 같은 장르는 남성들이 더 잘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나. 여성이 가진 장점은 섬세함일 텐데 그건 시장 분위기와 동떨어진 능력 같고. 그러다보니 남자 넷이 떼로 나와 나쁜 놈을 물리치는 이야기가 범람하는 것 같다. 나쁜 놈과 나쁜 놈이 만나 더 나쁜 놈을 물리치는 이야기. (웃음)
-소설을 쓰면서 영화를 계속 준비했나.
=그렇다. 지금은 영화사와 계약해 시나리오를 썼고, 캐스팅을 위해 시나리오를 돌리려고 한다. 독보적인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인 미스터리 스릴러다.
-최근 법조계를 시작으로 영화계, 공연계 등 여성들의 용기 있는 미투(Me Too) 고백이 이슈가 되고 있는데.
=크랙(균열)이 일어나야 세상이 변화한다. 앞에서 짧게 얘기했듯이 개인이 어떤 열망을 가지고 용기 있는 행동을 했을 때 변화가 물결처럼 이어지는데, 지금이 그런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왜 저렇게까지 난리치고 과장할까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회적으로 인식이 바뀌어야 하고, 바뀌기 위해서는 큰 크랙이 일어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시각에선 한국의 페미니즘이 다소 거칠고 왜곡된 면도 있지만, 지금 같은 소용돌이를 계기로 페미니즘 운동과 관련된 전반적인 움직임이 달라질 것이라고 본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으로서 이현주 감독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예전 같으면 쉬쉬하거나 ‘(그런 걸 가지고) 뭘 그래?’라고 그랬을 거다. 나 또한 학교 다닐 때 황당한 일을 많이 겪었는데 그때마다 정색하면 상대방으로부터 돌아오는 대답이 ‘너는 재미있는 사람인 줄 알았어’였다. 그렇게 나만 예민한 사람이 되고, 그들은 나의 정색을 예민함이라는 카테고리에 넣었다. 지금은 우리 사회가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으로 바뀌고 있고, 또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차기작은 뭔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소설은 영화를 준비하면서 남은 시간을 활용해 쓰고 있다. 소설과 영화 둘 다 하고 싶다. 영화는 사람들과 함께 만드는 데서 오는 희열이 크고, 오랫동안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소설은 장편 두편을 준비 중이다. 하나는 이해하기 힘든 여자가 등장하는 이야기고, 또 하나는 연애소설이다. 하나의 단편을 영역한 단행본 <4월의 눈>은 4월에 출간된다.
-영화감독으로서, 소설가로서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나.
=콘텐츠를 제공하는 사람으로서 재미있는 소설을 쓰고,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작가주의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사람의 마음에 와닿고, 생각할 거리를 주는 이야기 말이다.
<아몬드>
윤재와 곤, 17살 동갑내기 소년인 둘은 평범하지 않다. 윤재는 알렉시티미아라는 감정표현불능증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곤은 어린 시절 엄마의 부주의로 부모를 잃고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부모의 품으로 돌아온다. <아몬드>는 친해지기 힘든 두 소년이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성장담으로, 작가가 부모의 시선으로 두 소년의 상처를 따뜻하게 보듬어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소설가’ 손원평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작품으로, 제10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이다.
좋아하는 여성 작가_ 애거사 크리스티
손원평 작가는 “지금은 좋아하는 여성 작가가 없어 과거에 좋아했던 사람으로 애거사 크리스티를 꼽았”다. “몇 십권을 읽을 만큼 탐독했던 까닭에 기억에 가장 많이 남는다”고. “애거사 크리스티는 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기보다는 추리소설가잖나. 여성 작가로서 하나의 브랜드가 됐다고 해야 할까. 그 점에서 존경받을 만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꼽으라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도 유명하지만 개인적으로 <침니스의 비밀>과 <세븐 다이얼스 미스터리>를 좋아한다”고. “둘 다 번들이라는 20대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이야기인데 그 캐릭터가 무척 매력적이다.”
인생의 영화_ <델리카트슨 사람들>(1991)
“장 피에르 주네 감독의 초기작으로, <아멜리에>(2001)보다 더 좋아하는 작품이다. 영화를 제대로 가지고 노는, 영화적인 영화라고 생각한다. 되게 사랑하는 작품이고, 이런 영화를 언젠가 만들어보고 싶은데 이제는 나오기가 어렵지 않을까. (웃음)”
원고 마감의 친구_ 가수 스웨이드의 베스트 앨범
손원평 작가는 원고 마감할 때 특별히 챙기거나 옆에 두는 물건은 없지만 굳이 꼽으라면 “가수 스웨이드의 베스트 앨범”이라고 말한다. 스웨이드는 1990년대를 풍미한 브릿팝 밴드로, 이 앨범은 스웨이드가 부른 명곡 35곡이 수록됐다. 그는 “보통 어떤 가수의 베스트 앨범이라고 하면 한곡이라도 걸리는 게 있는데 이 앨범은 그냥 넘길 곡이 하나도 없다”며 “내 기준으로 모든 음악이 좋다. 기분이 안 좋을 때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기분이 좋을 때 들으면 더 좋아진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