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레디 플레이어 원>의 ‘아타리 2600’에 대해
2018-03-26
글 : 케이지 (뮤지션·게임 애호가)
스필버그가 숨겨둔 진짜 이스터에그
아타리 2600.

아타리와 스필버그

<레디 플레이어 원>을 보게 될 국내 관객에게 게임기 ‘아타리’는 추억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지금 우리는 세가와 닌텐도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운좋게도 어린 시절에 아타리를 경험했던 나는 까만 보디에 까만 팩을 꽂고서 거대한 어댑터를 꽂아둘 트랜스를 사러 전파상을 찾아다녔다. 지금도 아타리를 구할 수는 있다. 뉴욕 맨해튼과 퀸스 전역에 있는 레트로 게임숍에서 아타리 게임들을 팔고 있다. 얼마 전 이스트 빌리지의 한 숍에서 우연히 아타리의 게임 <E.T.>를 보게 되었는데 쇼케이스에 고이 전시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기가 찼던 기억도 난다. 스티븐 스필버그에게는 <E.T.>가 자신의 인생을 대표하는 영화겠지만 게임 <E.T.>는 아타리 게임기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리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게임 기업 아타리는 ‘Innovative Leisure’ , 즉 ‘창의적인 놀이’라는 캐치프 레이즈를 내건 수장 놀런 부슈널에 의해 탄생됐다. 아타리의 어원은 적을 포위하고 자기 진영을 넓힌다는 의미의 바둑 용어로 몇년 후 아타리가 맞이할 운명적 복선이기도 했다. <레디 플레이어 원>에 묘사되는 IOI의 수장 놀런 소렌토의 이름은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 놀런 부슈널은 파트너 테드 데브니와 탁구게임인 아케이드판 <퐁>(1972)을 만들어 떼돈을 벌었다. 가정용으로 발매했던 <퐁>은 40개가 넘는 회사가 모방했고 결과적으로 미국 전역에 수백만대가 팔렸다. 당시 부슈널은 가정에서도 <퐁>을 할 수 있고, 또 소프트웨어까지도 바꿔서 플레이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롬 카트리지 게임기 ‘아타리 2600’을 만들어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자금난에 시달리자 그는 <퐁>의 히트를 기회 삼아 당시 아타리를 워너커뮤니케이션의 매니 제라드에게 2800만달러를 받고 매각했다.

1977년 9월 11일, 결국 세상에 나타난 아타리 2600(통칭 Atari VCS)은 모든걸 바꿔놓았다. 당시의 가정용 게임기 시장은 살기 좋은 환경에 적마저도 없는 테라포밍 행성 같았다. 시장이랄 것도 없이 시도하는 모든 것이 역사가 될 수 있는 기회의 장이었다. 아타리 2600은 시장을 완전히 독점했고, 막강한 그래픽과 사운드는 몰입도를 높여줬다. 사람들은 조이스틱을 들고 텔레비전 화면에 개입할 수 있었고, 컴퓨터라는 게 뭔지 비로소 막연하게 알아가기 시작했다. 아타리는 넘버링을 바꿔서 후기 모델을 출시했는데 후속 모델인 2700의 경우, 무선 컨트롤러를 도입할 예정이었다. 당시의 기술 수준을 감안하면 대단히 혁신적인 행보였다. 부슈널은 출시된 지 불과 1년 만에 워너와의 의견 차이로 1978년에 아타리사를 떠난다. 그는 향후 5년간 아타리와 겹치는 시장 업무를 중단해야 했다.

구글이나 애플 이전에 아타리는 꿈의 직장이었다. 일과 파티의 구분 없이 매일 법인카드로 술과 마약을 즐기던 직원들이 <템페스트> <아스트로이드> <센티피드> <건틀렛> 같은 걸작 게임들을 뽑아냈다. 부슈널의 고용방법은 간단했다. 똑똑한 사람들을 파티에 데려오는 것. 놀면서 일한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이들은 기술적이고 창의적인 엔지니어로 성장했다. 게임 개발자 하워드 스콧 워쇼는 1982년 5월에 <야르의 복수>를 성공시켰던 인물로 아타리에서도 에이스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E.T.>가 1982년 6월 박스오피스에서 대히트를 치고 있을 때 스필버그의 천재성에 매료된 워너사의 스티브 로스는 스필버그와 유니버설사로부터 게임 판권을 따냈다. 이전에 <레이더스>를 통해 아타리와 게임 플랫폼에서 단맛을 본 적 있던 스필버그는 당시 하워드 스콧 워쇼를 개발자로 지명했다. 하워드 스콧 워쇼는 즉시 스필버그 앞에서 게임 브리핑을 했다. 영화의 가치를 담을 수 있는 신선하고 혁신적인 게임으로 감동을 주자고 생각했던 그에게 스필버그는 <E.T.> 게임을 그저 <팩맨>처럼 만들자고 제안했다. 한 조각 먹다 남은 피자 모양을 보고 만든 캐릭터에서 출발한 <팩맨>은 성공의 대명사였다. 당시 스필버그의 제안으로 유추해보건대 그는 게임을 또 다른 창작의 영역이 아니라 거대한 판권 시장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비디오게임의 대목인 크리스마스 시즌까지 불과 5주 남짓 남겨둔 시점에서 게임 출시를 너무 급하게 추진한 것이었다. 오리지널 아타리 게임 개발은 보통 5~6개월이 소요되지만 그는 단 5주 만에 완성된 게임을 스필버그에게 보냈다. 스필버그의 승인이 떨어지면 그 즉시 발매에 돌입할 수 있었다. 스필버그가 1983년에한 방송국과 나눈 인터뷰에서 하워드 스콧 워쇼를 미치광이 천재라고 묘사하며 “게임은 어려웠지만 동시에 재미있었다. 내가 만든 영화 기반이니까 당연히 만족한다”라고 말한 적 있는데 스콧 워쇼는 원작자의 만족에 안이하게 대처했다. 그 흔한 베타 테스트도 없이 바로 출시를 결정해버렸다. 그리고 얼마 뒤 아타리 제국은 멸망했다. 창업한 지 불과 3년 반밖에 지나지 않은 때에 벌어진 일이었다.

1982년, 영화 <E.T.>를 싫어하는 사람을 지구상에서 찾기 어려웠던 그때, 크리스마스를 보냈던 아이들 대부분은 <E.T.> 게임을 선물로 받았다. 하지만 아타리 게임 <E.T.>는 너무 어렵고 난해했다. 악질적인 아타리의 퍼블리싱도 문제를 더 키웠다. 소위 말하는 끼워팔기에 소매점들로 하여금 1년치 재고를 미리 주문하라고 선주문 압박을 가했다. 그 후 1년치 게임 재고 400만개가 아타리 창고를 덮쳤다. 아타리는 물론이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미국 비디오 게임 시장 전체의 빙하기가 시작됐다. 트럭 몇십대분의 악성 재고 게임들이 엘라모고도 사막의 한 매립지에 파묻혔다.

아타리 게임 표지 모음.
뉴욕의 한 게임숍에서 판매 중인 아타리 게임 카트리지.

아타리의 귀환

사건 이후 게임산업을 무너뜨린 주범으로 몰린 하워드 스콧 위쇼에게 고작 8킬로바이트의 코드로 10억달러짜리 산업을 파괴할 힘이 있었다는 것이 재미있다. 하지만 본인은 그 평가가 완전히 정당하지는 않았다고 여러 인터뷰를 통해 술회한다. 그리고 파묻은 게임은 도시전설처럼 부풀려져 퍼져나갔다. 2013년, 전세계 게이머들은 이 진실을 목격했다. 뉴멕시코 환경국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파묻힌 게임에 대한 진실 공개를 거부하고 있었으나, 캐나다 엔터회사 퓨얼 인더스트리사에 반년간의 발굴 및 다큐멘터리 제작 권한을 일임하면서 진실이 알려졌다. 발굴 현장에는 수많은 게이머들과 개발자인 하워드 스콧 워쇼, <레디 플레이어 원>의 원작자인 어니스트 클라인까지 함께 했다(그는 이 현장에 원작에서처럼 들로리안을 타고 나타났다). 실제로 매설된 게임의 양은 72만8천개였다는데 발굴된 양은 1300개였다. 아타리와 게임 <E.T.>와 관련해 어떤 누구에게서도 스필버그 책임론을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역사상 최악의 게임을 언급할 때면 언제나 스필버그의 영화 <E.T.>의 일러스트가 그려진 커버가 등장했다. 스필버그 자신도 이를 결코 모를 리 없었을 거다. 어쩌면 게임기 ‘'아타리 2600’이 <레디 플레이어 원>의 결정적 장면에 등장하는 것은 스필버그만의 속죄가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게임 스크린숏.
아타리 게임 신문광고.

스필버그와 이스터에그

또한 주인공 웨이드의 마지막 미션으로 주어지는 게임 아타리 2600의 <어드벤처>는 1979년에 발매된 세계 최초의 액션 어드벤처 게임이자, 최초의 이스터에그 게임이다. 당시 아타리에서는 단 한명의 게임 개발자가 아이디어를 내고 코딩과 그래픽, 효과음까지 만든 다음 자녀들과 테스트해본 뒤에 발매 수순을 밟는 1인 제작이 일반적인 경우였다. 게임 제작자의 이름을 게임 속에서 볼 수 없도록 하는 내부방침 때문에 어떻게든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었던 개발자가 게임 속에 비밀 방을 만들어두고 거기에 자신의 이름을 세로로 새겨넣었던 것이다(이 최초의 기록은 얼마 전에 깨졌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부사장이자 아케이드 게임 마니아인 에드 프라이가 1977년에 출시된 아타리의 <스타십1>에서 이스터에그를 발견했다). 이스터에그는 원작과 영화에서 개발자가 남긴 세계를 구할 수 있는 마지막 열쇠로 묘사된다.

여담이지만, 1980년대의 닌텐도 팬이라면 닌텐도 캐릭터가 영화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 점에 아쉬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한국에서는 닌텐도나 세가의 콘솔로 게임 인생을 시작한 이들이 많을 테니까.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면 스필버그가 1980년대 중반부터 일어난 일본발 게임 혁명의 주역인 닌텐도를 의도적으로 배제하진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다소 타이트한 닌텐도의 라이선스 관리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화에 동키콩 대신 킹콩과 매시업한 다음 ‘콩’이라는 이름으로 착시를 줬다고 짐작해본다. 영화에서 첫 미션을 수행하는 장면에서 스테이지 아래로 녹색 프레임이 펼쳐지는 장면, 참가자들을 부비트랩으로 방해하는 기믹 역시 사실상 게임 <동키콩>에 대한 묘사라고 봐도 무방하다. 오아시스의 설계자 할리데이가 유년기를 보낸 방바닥에는 <닌텐도 파워>로 짐작되는 잡지가 펼쳐져 있다. 묘하게 포커스는 나가 있지만 노란색과 빨간색으로 쓰인 제목에서 잡지 <닌텐도 파워>가 떠오르지 않을 게이머는 없을 것이다. <닌텐도 파워>는 당시 잡지 뒤편에 이스터에그를 수록해 큰 인기를 얻었으니까 말이다.

평소 스티븐 스필버그의 행보가 달갑지는 않았다. 소년, 소녀들이 활약하는 모험 활극의 마이스터임에도 그는 마치 유대인 감독의 의무를 다하려는 듯 역사의 한복판으로 가버린 느낌이 들곤 했다. 그래서 <레디 플레이어 원>이 너무 늦게 도착한, 우리 세대의 정서를 쥐어짜는 상업적 크로스오버, 무책임한 매시업이 되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기우였다. 스필버그는 2018년의 방식으로 아타리를 소환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을 국적과 시대를 불문하고 총망라하면서 자신 역시 그것들을 지금도 충분히 기억하고 있었다고 말하는 듯했다. 영화를 보며 한때 우리가 잃어버리고 지냈던 감정을 따뜻하게 보상해준 느낌이 들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뒷자리의 남성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자신들이 알아본 캐릭터들을 외쳐대는 소리를 들으며, 그 순간 스필버그가 우리에게 남긴 이스터에그가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의 이스터에그 찾기에 얼른 동참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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