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드 헤인즈 감독의 영화는 대부분 역사의 큐레이션에 관한 것들이다.” 미국의 영화 전문 매체 <필름 코멘트>가 최근 그에게 내린 평가를 인용해 말하자면, 토드 헤인즈는 훌륭한 큐레이터다. 더불어 “과거의 틀을 들여다볼 때 현재를 좀더 명확하게 알 수 있다”(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고 말하는 그는 어느 시대 누군가의 이야기를 왜 지금 해야 하는지도 잘 설득해왔다. 90년대 말 개봉한 <벨벳 골드마인>(1998)은 70년대 영국의 글램록과 데이비드 보위를 소재로 삼아 세상을 바꾸고자 했지만 결국 우리가 변했다고 80년대에 회고하는 이야기였다. 동성애가 일종의 병으로 취급받던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레즈비언 영화 <캐롤>(2016)은 미국의 동성결혼 합법화가 실현된 이후 관객을 만났다. 그리고 <원더스트럭>(2017)이 개봉한 지금은 어느 때보다 차별과 혐오 이슈가 뜨거운 시대다. 1927년 선천적인 청각장애인 로즈(밀리센트 시먼스)는 유명배우인 엄마 릴리언 메이휴(줄리언 무어)를 만나기 위해, 1977년 사고로 이제 막 청각을 잃은 벤(오크스 페글리)은 얼굴도 모르는 아빠를 찾기 위해 뉴욕으로 향하고 둘은 모두 자연사박물관에 도착한다. 토드 헤인즈가 <원더스트럭>이라는 박물관을 완성할 때 큐레이터로서 선택했을 키워드를 섹션별로 정리해보았다. 여기에 뉴욕 현지에서 진행된 토드 헤인즈 감독과의 인터뷰도 덧붙인다.
청각장애
<원더스트럭>의 원작자 브라이언 셀즈닉은 2007년 <PBS>의 청각장애인에 관한 다큐멘터리 <스루 데프 아이즈>를 보고 작품을 구상했다. 방송을 통해 그는 세상에 얼마나 많은 장애인이 존재하는지 알게 됐다. 그에 따르면 원작의 그림은 “청각장애인 로즈가 자신의 삶을 경험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로즈의 이야기를 경험하게”(미국 공영 방송사 <NPR>) 한다. “청각장애인의 문화는 시각적 문화라고 한다. 그들의 언어가 시각적 언어이기 때문이다. 청각장애를 지닌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그림으로 담아낸다면, 어느 정도는 그들이 경험하는 삶에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청각장애인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그들이 느끼는 감각으로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영화로도 이어졌다. 토드 헤인즈 감독은 미국의 연예 매체 <데드라인>과의 인터뷰에서 “농아 어린이들을 찾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시도하고, 그들이 가진 고유의 지식과 캐릭터에 대한 이해를 영화에 반영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것은 농아 커뮤니티에 우리가 좀더 가까이 다가가고 이해하는 길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제작진은 로즈를 연기할 배우를 찾기 위해 북미 지역의 청각장애인 학교 및 극단을 뒤졌고, 농아학교 연극부에서 신예 밀리센트 시먼스를 발견했다. 그외에도 <원더스트럭>에는 특히 무성영화 파트에서 많은 장애인 배우들이 등장한다.
로즈가 자신의 어머니 릴리언 메이휴를 찾아갔을 때 그와 함께 연극하던 배우들은 물론, 의사, 선생님, 경찰관, 박물관 직원 등 다양한 건청인(청각장애가 없는 사람)들을 농아 배우들이 연기했다. 한편 사고로 청각을 잃은 벤을 연기한 오크스 페글리는 청각장애인이 아니다. 토드 헤인즈 감독은 그와 함께 소음 차단 헤드폰을 끼고 뉴욕을 돌아다니며 “청각장애인의 일상을 조금이나마 체험”해보기도 했다. “느낄 수 있는 감각의 범위가 줄어들었을 때, 우리는 더욱 민감하게 느끼고 경험한다”는 것이다. <원더스트럭>의 청각장애는 다양한 소통의 방법을 제시하는 중요한 설정이기도 하다. 태어날 때부터 들리지 않는 상황에 익숙한 로즈와 달리 벤은 이제 막 사고로청각을 잃고 수화를 알지 못한다. 주변 사람들은 그들과 소통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시행착오를 거친다. 글을 써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며, 신체언어가 중요해진다. 토드 헤인즈 감독은 <인디펜던트>와의 인터뷰에서 “영화의 주인공들은 그들이 희생자라는 느낌에서 벗어나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언어를 찾기 위해 애쓴다. <원더스트럭>은 자신의 언어를 발견하고 가족을 찾는 것에 관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원작자 브라이언 셀즈닉
“글을 읽으며 상상할 때는 머릿속에 어떤 단어를 떠올리게 되지만, 이야기가 그림으로 제시되면 머릿속의 단어는 사라진다.” 삽화와 글이 공존하는 <원더스트럭>을 쓰고 그린 브라이언 셀즈닉은 그림의 힘을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그는 마틴 스코시즈 감독의 <휴고>(2011)의 원작 <위고 카브레>의 작가이기도 하다. 원래는 대부분 어린이책 작가들과 공동 작업을 하며 삽화가로서 경력을 쌓아왔다. 하지만 그림뿐만 아니라 글로 자신이 원하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가 패닝, 줌인과 줌아웃, 편집을 통해 할 수 있는 것, 그림책을 넘길 때 할 수 있는 것, 소설책을 넘길 때 할 수 있는 것을 결합하는 방법이 있을까?”(<NPR>)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결과, 지금과 같은 고유의 스타일을 완성했다. 일반적인 그래픽노블과 달리 그의 삽화에는 따로 글이 존재하지 않고, 최소한의 정보만 그림 속에 어우러진 글자로 전달한다. 특히 <원더스트럭>은 글과 삽화를 각각 서로 다른 시대와 연결하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1927년 로즈의 이야기는 그림으로만, 1977년 벤의 이야기는 글로만 전달된다. 전자가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생각 할 수 있는 언어의 폭을 넓힌다면, 후자는 언어로 미처 표현되지 못한 부분을 시각적으로 상상하게끔 한다. 한편 브라이언 셀즈닉은 <원더스트럭>의 시나리오를 직접 각색했다. 그가 자신의 작품을 직접 각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27년의 뉴욕 vs 1977년의 뉴욕
1927년의 미국은 청각장애를 가진 아이들에게 수화를 가르치지 않았다. 장애인을 위한 시스템은 미비했지만, 로즈가 엄마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뉴욕은 전반적으로 활기와 낭만을 안고 있었다. 1977년의 뉴욕은 이와 정반대다.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교육 체계는 어느 정도 확립됐지만, 전반적인 사회·경제적인 분위기는 암울했기 때문이다. “1920년대는 청각장애인의 교육에 비관적인 시기였다. 1970년대는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훨씬 진보적인 법과 기회가 존재하는 대신 경제적으로 더 고통받는다.”(<필름 코멘트>, 토드 헤인즈 감독) 이 모순적이면서 극명한 대비를 위해 제한된 촬영일정 동안 제작진에게 두 시대를 재현하는 과제가 부여됐다. 이미 옛 모습이 거의 사라진 뉴욕의 경우 오히려 구현해내기 어려운 것은 1970년대였다. 제작진은 가까스로 상대적으로 개발이 덜 된 브루클린의 베드퍼드스타이버슨과 크라운하이츠 지역을 찾아냈다. 또한 고전영화는 시대를 재현하는 데 지침이 되는 가장 좋은 교과서였다. 1920년대 장면을 위해 제작진은 F. W. 무르나우의 <마지막 웃음>(1924), 킹 비더의 <군중>(1928) 등을 함께 감상했고, 영화 속 영화는 빅터 소스트롬의 <바람>(1928)으로부터 직접적인 영감을 얻었다. 1970년대 장면은 <프렌치 커넥션>(1971), <미드나잇 카우보이>(1969), <백색공포>(1971) 등의 촬영을 참고했다.
시각언어에 집중한 무성영화의 시대
<원더스트럭>은 러닝타임의 절반이 무성영화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1927년 로즈의 이야기가 무성영화의 포맷으로 구분되기 때문이다. 1977년의 벤 역시 제이미(제이든 마이클)를 만나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과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이같은 형식은 대화에 익숙해져 영화의 시각언어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는 관객에게 신선한 경험을 선사한다. 순수하게 시각언어에 집중해 작품을 감상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닌, 현대의 영화를 가장 세련되게 만들기 위한 선택이었다. 프로덕션 디자인을 맡은 마크 프리드버그는 “당시 무성영화는 소리가 아닌 다른 언어를 찾고 있었다. 이것은 우리가 본 가장 현대적인 영화 제작 방식 중 하나다. 과거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내다보는, 가장 놀라운 부분이었다”(<필름 코멘트>)며 무성영화의 형식이 지금 갖는 의미를 강조했다. 토드 헤인즈 감독 역시 “1920년대 말, 무성영화는 기본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영화제작의 모든 형태를 만들었다. 이미 그곳에 있었다”(<인디펜던트>)며 고전의 의미를 설명한다. 하지만 릴리언 메이휴가 출연한 영화 속 영화 <폭풍의 딸>을 제외하면 무성영화에 해당하는 부분은 엄격하게 1.33:1 비율로 촬영되지는 않았다. 에드워드 래크먼 촬영감독은 “로즈의 20년대와 벤의 70년대를 연결하기 위해 한 가지 포맷으로 통일했다”(<필름 코멘트>)며 형식에 유연함을 준 이유를 설명했다.
대화가 사라지면서, 대신 강조되는 것은 음악이다. 데이비드 보위와 글램록의 이야기를 담은 <벨벳 골드마인>, 밥 딜런의 독창적인 전기영화 <아임 낫 데어>(2007) 등 토드 헤인즈 감독에게 음악은 중요한 테마였지만, <원더스트럭>의 음악은 조금 다르다. “정말 좋은 스코어는 영화에서 두드러지지 않는다고들 한다. 이 작품에서는 반대다.” 토드 헤인즈 감독은 그의 연인이자 음악 연구가 브라이언 오키프와 함께 플레이리스트를 위해 많은 음악을 참고했다. 1920년대와 70년대 대중음악은 물론 무성영화 속 음악,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벤자민 브리튼 곡 등이 그 예다.
한편 로즈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1927년은 최초의 유성영화 <재즈 싱어>가 개봉한 해이기도 하다. 브라이언 셀즈닉은 “유성영화는 기술의 승리이자, 모든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청각장애인 문화와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유성영화는 청각장애인이 즐길 수 없는 문화였고 이는 비극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무성영화 시대의 스타 릴리언 메이휴가 유성영화가 등장하면서 인기가 하락하고 연극 무대에 도전한다는 설정 역시 이 비극을 정서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