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한국영화계에서 가장 바쁜 배우 중 한명일 것 같다. 존재감 있는 한국영화에는 항상 조진웅이 있다. 그가 상반기 화제작 <독전>에 이어 여름 블록버스터 화제작 <공작>으로 돌아왔다. “어렸을 땐 연기 그 자체가 목적이었는데 지금은 수단이다. 캐릭터를, 메시지를, 나를 대변하는 도구. 그래서 더 신중하게 연마 중이다.” 안기부 해외파트 국장 최학성 역을 맡아 또 한번 존재감을 과시한 조진웅 배우는 거꾸로 ‘내려놓는 법’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지금 하는 체념들은 내게는 더 아름다운 자유를 준다. 모든 영화, 모든 역할들이 내게 질문을 남긴다.” 비워낼수록 채워지는 연기, 지금 한국영화에서 배우 조진웅이 서 있는 자리다.
-올해 칸국제영화제에 <공작>이 초청됐는데 스케줄 문제로 레드카펫에 함께하지 못했다. 많이 아쉬웠을 것 같은데.
=가고 싶긴 했지만 당시 촬영 중인 작품이 있어서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멀리서 기사로 보니 감회가 또 남다르더라. 못 가서 아쉬웠다기보다는 뭉클했다. 힘이 못 되어 드려 죄송하고. 빡빡한 일정에 얼마나 고생할지 아니까. (이)성민이 형이 기념품으로 만년필을 하나 사다주셨는데 아까워서 열어보지도 못하겠더라. 장식장에 고이 넣어뒀다.
-<공작>은 기존 스파이물의 장르적 접근과는 상당히 다른 캐릭터들을 선보인다.
=윤종빈 감독님이 소개해서 <보안관>(2016)을 성민이 형과 함께했다. 그때 얼핏 다음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설정, 전개 모든 게 독특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숨겨야 하는 스파이는 장르적으로 익숙한 것도 있지만 그를 둘러싼 상황들이 매우 사실적이라 남 일 같지 않았다. 안기부 국장 최학성이 대표적으로 그런 인물이다. 최학성은 확고한 신념으로 직진한다. 내가 있어야 국가의 안위가 보장된다는 당연함의 세계 속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런 견고한 블록이 완벽히 맞춰 있는 사람조차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닥친다면 어떨까. 나 자신도 궁금했다.
-워낙 말맛이 있는 영화라 일찌감치 ‘구강 액션’이 강조되고 있다.
=처음에 대사가 이렇게 많을 줄 몰랐다. (웃음) 물론 대사의 양을 떠나 전달의 화술이 매우 중요한 영화다. 감독님과 회의하고 조율한 첫 번째가 자연스러운 연기였다. 굳이 사투리 표현에 얽매이지 말고 자신이 구사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화술에 집중하자는 거였다. 감독님의 배려가 캐릭터를 정확히 표현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몸으로 보이는 것만큼 음성적, 언어적인 이미지를 그려나가는 게 중요한 영화다.
-칸에서 인터뷰 당시 다른 배우들은 하나같이 ‘숨 막히는’ 현장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솔직히 카메라가 돌아갈 때 특별히 긴장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이번엔 대사 한마디에도 식은땀이 흘렀다. 캐릭터와 캐릭터간의 긴장을 넘어 캐릭터와 공간과의 긴장이 있었다. 한 장면의 엔지가 문제가 아니라 시퀀스 전체가 망가지기 때문이다. 그만큼 밀도 있는 작업이었다. 어떻게 보면 영화 전체가 원신 원컷이나 다름없었다. 숏마다 집중력도 필요했지만 전체적인 흐름과 공기를 머릿속에 그리지 않으면 밸런스가 무너졌다. 1초의 호흡이 전체의 느낌을 바꿀 수 있는, 연극 무대 같은 생동감 있는 현장이었다. 클로즈업으로 손가락만 찍고 있다는 걸 아는데도 발끝부터 연기가 시작되는 기분 좋은 긴장감이 있었다.
-최근 남북정상회담을 비롯해 바뀐 정서와 기시감이 드는 장면도 많다.
=영화적 밀도가 높다는 건 그만큼 관객에게 집중력을 요구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오기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처럼 아무 생각 없이 갔다가 많은 질문들을 채워 올 수 있을 것이다. 선입견 없이 볼수록 많은 것들이 보일 것 같다. 시대를 반추하는 즐거움이 있는 영화라고 자신할 수 있다. 적어도 이제껏 한국영화 중에 <공작> 같은 영화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재밌는 건 찍을 당시와 지금의 분위기가 확실히 변화했다는 점이다. 기획 당시에도 여러모로 당위성이 있는 이야기였지만 남북 화해 모드인 지금 상황에 더 필요한 이야기가 된 게 아닐까 싶다. 지금의 분위기가 얼마나 소중한 순간인지를 잊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