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공작> 윤종빈 감독, “너무 완벽한 스파이를 표현하고 싶진 않았다”
2018-08-09
글 : 김성훈
사진 : 백종헌

올해 칸국제영화제(이하 칸영화제)에서 돌아오자마자 윤종빈 감독은 언론·배급 시사 직전까지 재편집과 후시녹음에 매달렸다. 칸영화제 상영 때 들었던 피드백을 반영하고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한 부분을 채우기 위한 목적이었다. 칸영화제가 가져다준 명예 못지 않게 “국내 개봉이 중요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그다. 언론·배급 시사가 끝나자마자 따로 만난 윤종빈 감독은 “모든 영화가 고생한 만큼 온전한 평가를 받았으면 좋겠다”라며 “먼저 개봉한 <신과 함께-인과 연>의 김용화 감독이 학생회장 시절 내게 과 대표를 맡기고 새벽에 깨우는 등 많이 괴롭혔는데 이번에 후배를 위해서 배려해줘야 하지 않을까. (일동 폭소)”라고 농 섞인 출사표를 던졌다. <공작>은 <군도: 민란의 시대>(2013) 이후 윤종빈 감독이 5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칸영화제 상영 후 편집을 다시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칸 상영 버전의 어디를 손댔나.

=처음 편집할 때 칸 상영에 맞춰서 작업했고, 그 버전이 베스트라고 생각했다. 그 버전에서 편집을 끝내려고 했지만 칸에서 영화를 보고 나니 찝찝함이 남아서 다시 손보았다. 국내 개봉 버전은 큰 맥락이 바뀐 것도, 특정 시퀀스가 빠진 것도 없다. 영화적으로 풍부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조금 걷어내고, 관객이 좀더 몰입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작업했다.

-언론·배급 시사 막판까지 후시녹음(ADR)을 열심히 한 것도 그런 고민과 관련 있나.

=편집을 하면서 ADR도 덩달아 손을 봐야 했다. 특히 칸에서 상영했을 때 흑금성(황정민)의 내레이션이 잘 안 들린다는 의견이 많아서 새로 녹음했다. 흑금성과 리명운(이성민), 정무택(주지훈)의 대화 신에서 대사가 유독 긴 부분 몇 군데를 걷어냈다.

맥거핀으로서의 북핵이라는 설정

-옛날 얘기부터 나눠보자. 전작 <군도: 민란의 시대>가 개봉했던 2014년 7월 당시 팟캐스트 방송 <이박사와 이작가의 이이제이>(이하 <이이제이>)의 ‘흑금성 특집’ 편을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전작을 끝내고 난 뒤 국정원 전신인 중앙정보부, 안기부를 취재하다가 우연히 <신동아>에 실린 기사 ‘공작원 흑금성! 北 보위부 침투, 김정일 만나다’를 읽으면서 관심을 가지게 됐다. 이후 <이이제이>를 통해 흑금성을 취재했던 당시 <시사저널> 기자였던 김당씨를 알게 됐고, 그에게 흑금성과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흑금성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감 중이라고 해서 흑금성의 가족을 통해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제안을 했다.

-당시 감옥에 복역하고 있던 흑금성, 박채서씨를 면회간 적 있나.

=면회를 가려고 했지만 박채서 선생님이 당신 같은 유명한 사람이 오면 국정원에 보고된다고 만류하셨다. 대신 영화사 직원을 보내라고 하셔서 손상범 영화사 월광 대표가 면회를 갔고, 영화화 허락을 구했다. 이후 서신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박 선생님과 주고받았다.

-취재하면서 알게 된 흑금성(의 공작)의 어떤 점에 매료됐나.

=많은 사람들이 첩보영화라고 하면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나 ‘본 시리즈’를 떠올리는데 나는 그 영화들이 첩보영화가 아닌 액션영화라고 생각한다. 흑금성 사건을 영화로 만든다면 사실적인 (첩보)영화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보았다. 동시에 첩보물의 주인공인 스파이의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도 가능하겠다 싶었다. 스파이는 군인인데 군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는 피아 식별이 아닌가. 냉전 체제가 낳은 존재로서 스파이의 정체성이 변화하는 과정을 그려낼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무엇보다 흑금성이 공작을 하면서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에 개입하게 되는데 그 과정이 극적이었고,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대학 노트 4권에 달하는 박채서씨의 수기에는 그의 공작이 굉장히 세세하게 기록됐다. 이 실화의 어떤 부분을 시나리오에 취해야겠다고 생각했나. ‘암호명 흑금성’이라는 사실을 살리는 과정에서 각색이 쉽진 않았을 것 같다.

=알다시피 이 얘기는 흑금성의 십 몇년에 걸친 첩보 활동을 다루고 있는데 그 활동 모두 두 시간짜리 영화에 담아내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래서 한반도의 핵심 이슈인 북핵 문제에서 시작해 북의 핵개발을 저지하려는 남한, 그리고 개혁과 개방에 대한 의지를 보이는 북한, 두개의 축을 놓고 각색해야겠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팩트를 지키면서 각색하는 건 불가능하니 그 방향을 중심에 놓고 팩트보다는 영화적 논리로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북핵 문제로 이야기를 시작한 건 그때도, 지금도 한반도를 둘러싼 중요한 이슈니 시의성이 있겠다는 판단에서였나.

=실제로 당시도 북핵 사태가 국제사회에서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 영화에서든 실제 국제사회에서든 북핵 이슈가 한반도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라고 생각했을 때 나는 북핵이 맥거핀이라고 생각했다. 북핵의 실체는 어마어마하고 광범위하지만 모습을 드러내기는커녕 정치적 도구로서만 이용되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남한의 보수 정권은 물론이고,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이 그동안 철저하게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북핵 문제에 접근했듯이 말이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인 1997년은 정치적으로 매우 어수선한 시기였다. 김영삼 정부의 대북 정책은 일관성 없이 냉탕(북핵 위기로 인한 대북 강경책)과 온탕(지방선거 전날 일방적인 대북 쌀지원, 밀가루 북송 사건 등)을 오락가락했다. 전년도인 1996년, 안기부는 4·11 총선을 앞두고 판문점 ‘북풍’(북한군의 판문점 무력시위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1997년의 어떤 모습이 인상적이었나.

=당시 있었던 많은 일들이 신선하고 새로웠다. 그중에서 참 아이러니 하고 재미있었던 점은 금강산 관광 사업 같은 김대중 정부의 남북 화합정책들이 실제로 김영삼 정권에서 안기부가 진행했던 공작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결과물이라는 사실이다.

-영화 속 흑금성인 박석영(황정민)의 전사가 세세하게 소개되는 시나리오와 달리 영화는 박석영이 북핵 실체를 알고 있는 핵물리학자 김장혁 교수의 측근인 황병철을 공작하는 데서 시작된다.

=박석영이 군을 나와 신분을 세탁하기 위해 술을 마시고, 노름을 하며, 돈을 빌리는 과거를 많이 촬영했다. 편집 과정에서 이 이야기의 본격적인 시작은 흑금성이 리명운을 만나는 지점이라고 판단했고, 앞부분의 호흡을 좀 줄이기로 했다.

-영화 속 흑금성의 내레이션은 단순한 정보 전달뿐만 아니라 속내를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스파이로서의 감정과 상황을 설명해주는 역할을 하는데.

=스파이의 정체성을 다루는 이야기인 동시에 흑금성 입장에선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내레이션 사용이 불가피했다. 이 영화는 1시간 반가량 흑금성이 누구에게도 자신의 속내를 얘기하지 않는다, 얘기할 수도 없고. 나중에 정체성이 변하게 되는 순간 그의 생각을 얘기하게 하는 방식이 1인칭 시점밖에 없었다.

박석영은 왜 화를 냈는가

-흑금성이 북한 대외경제위(리명운), 국가안전보위부(정무택)에 접근하는 시퀀스들은 만남이 거듭될수록 서스펜스가 구축되어야 하는 게 관건이었을 텐데.

=각 캐릭터들의 면면과 그들의 관계성이 잘 표현된다면 충분히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령, 대외경제위에 소속된 리명운은 보위부에 소속된 정무택보다 상관이지만 함부로 할 수 없고, 정무택은 리명운을 감시해야 하는 관계 말이다. 또, 흑금성이 그들에게 일부러 짜증내고, 화를 내며, 일을 뒤엎으려고 하는 모습들이 그의 작전처럼 느껴진다면 흥미 있는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박채서 선생님이 쓴 수기를 읽으면서 재미있었던 건 스파이가 북한 인사들에게 화를 내는 게 일종의 작전이었다는 부분이었다. 박 선생님에게 왜 화를 냈냐고 물어보니, 그는 지금까지 우리나라 스파이가 첩보 작전에 실패한 이유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북한에 너무 고분고분했다고 말했다. 모두 북에 끌려간 것도 그래서고. 박선생님이 오히려 ‘나는 안 할 거야’라고 강단 있게 나가니까 북한이 끌려오더라고 얘기해주었다.

-대화 신에서, 특히 흑금성의 클로즈업숏이 많은 이유가 뭔가.

=흑금성의 실제 모습은 박석영인데 흑금성의 외양만 보면 박석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스파이 활동을 하고 있는 그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방법은 클로즈업숏밖에 없었다. 반대로 흑금성이 긴장하고 있을 때 그를 바라보는 상대방 또한 클로즈업숏으로 담아내야 다음 액션으로 이어질 수 있을 거라고 보았다.

-대사 양이 워낙 많다보니 배우들의 입에 붙기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안 들었나.

=예닐곱 차례에 걸친 리딩을 통해 여러 설정들을 테스트하고 수정했기 때문에 큰 걱정은 없었다. 그보다는 배우들이 인물들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잘 표현할 수 있을지 걱정됐다. 너무 완벽한 스파이를 표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파이도 사람이기에 긴장할 때는 떨고, 반대로 일이 잘 풀리면 좋아하는 표정을 미세하게나마 지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공작원을 그리고 싶었는데 황정민 선배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뉘앙스까지 표현해주셔서 그가 기술적으로 얼마나 뛰어난 배우인지 다시 실감할 수 있었다.

-베이징 밀레니엄 호텔에서 흑금성이 리명운의 전화를 기다리며 보는 영화는 장현수 감독의 <게임의 법칙>(1994)인가.

=맞다. 흑금성으로선 베이징에서 사업가로 연기해야 하는데 그걸 영화적으로 어떻게 표현할까. 그 영화를 보면서 캐릭터를 설정하지 않았을까.

-순안국제공항부터 시작되는 평양 시퀀스는 하늘 위에서 바라본 대동강, 아파트들이 줄지어 늘어선 광복거리 등 이제껏 한국영화가 보여주지 못한 스펙터클을 펼쳐놓는데.

=한국 사람들은 여러 영상들을 접하면서 평양을 잘 알지 않나. 관객에게 진짜 평양이라고 믿게 해야 했다. 해외에서 촬영된 소스를 구하고, 평양과 비슷한 풍경을 가진 중국 연변 지역을 물색하고, 세트를 짓고, CG로 합성하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평양을 표현했다.

-기주봉 배우가 어떤 점에서 김정일 역할로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나.

=개인적으로 연기를 좋아하고 김정일과 키가 비슷한 한국 배우 세명의 리스트를 할리우드 특수분장팀(프로세틱 르네상스(Prosthetic Renaissance Inc.)·<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블랙스완> 등 작업.-편집자)에 보여주었다. 그 팀이 기주봉씨라면 김정일과 똑같이 분장할 수 있다는 의견을 주면서 기주봉씨를 캐스팅하게 됐다.

-북한 무용수 조명애와 함께 삼성 애니콜 광고에 출연했던 가수 이효리가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장면에 자신의 역할로 직접 특별출연해 깜짝 놀랐다.

=처음에는 자신의 역할을 연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 부담스러워했다. 이 영화가 어떤 이야기이고, 극중 이효리가 등장하는 장면이니 당신이 안 나오면 안되며, 당신이 마무리하는 작품이라는 내용으로 편지를 써서 이효리씨에게 보냈다. 그렇게 출연해준 덕분에 한 회차 만에 촬영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 여기부터는 영화의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냉전 시대 이데올로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영화의 결말은 흑금성과 리명운의 애틋한 감정이 느껴지던데.

=둘은 오랜만에 만났지만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상황이잖나. 서로에게 ‘나는 괜찮아’라고 안부를 전할 수 있는 ‘아재’들만의 방식이 뭐가 있을까 했을 때 주고받은 선물을 보여주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둘이 각자 할 수 있는 마지막 의사표시라고 보았다.

-박석영은 한 영화 안에서 여러 얼굴을 가진 사나이인데 영화를 찍는 동안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던가.

=그는 나와 너무 다른 사람이다. 군인이고, 국가에 대한 생각이 투철하고, 굉장히 침착하며 흔들림이 없는 사람이라고 설정했다. 그런 확고한 신념이 흔들렸을 때 오는 딜레마를 후반부에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흑금성이라는 스파이를 통해 우리 사회의 고질병이었던 ‘북풍’에 대한 거대한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다.

=북풍은 분단 이후 한국의 보수 세력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용한 도구였다. 거대한 적을 내세우고 우리 안의 결속을 다지는 게 보수라 불리는 세력의 논리였는데 이제는 그게 무너졌다고 생각한다. 그 실체는 지난 정권 때 만천하에 드러났고, 최근의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냉전 시대의 사고와 이데올로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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